집필일
1998.06.22.
출처
서울건설신문
분류
건축비평

서울 부암동 골짜기, 북악 스카이웨이 시작하는 어귀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환기미술관은 수화 김환기의 유작들을 보관 전시하는 개인을 기념하는 미술관이다. 김환기는 한국 현대미술의 모더니즘 1세대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화가였다. 50년대 빠리 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한국적 조형과 정감을 표현하는 절제된 그림들을 그렸고, 60녀대 이후 작고할 때까지 뉴욕에서는 점 선 면의 내밀한 서정을 담은 추상화들을 그렸다. 외로운 뉴욕의 한 다락방에서 한국의 친지들을 떠올리며 밤하늘과 같이 어두운 화면에 수많은 점들을 찍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연작은 현대적인 추상회화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적 정서를 연상케하는 명작이다.
수화의 모국에 대한 그리움은 작고 후에 부인 김향안 화백에 의해 결실을 맺었다. 수화 부부가 살던 서울집은 성북동 골짜기였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고급 주택가들이 들어서 미술관을 지을 수 없었다. 성북동의 지형과 가장 유사한 곳을 찾던 중 고른 곳이 바로 여기 부암동 골짜기였다. 2-4층 짜리 중산층 주거지로 둘러쌓인 이곳은 폭이 좁고 깊은 골짜기다. 게다가 경사도 급한 곳이었다. 보통의 도심형 미술관을 건축하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한 땅이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재미건축가 우규승이었다. 우규승 역시 수화와 비슷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젊은 나이에 유학하여 30년이 넘는 기간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원천적인 조국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건축가였다. 김환기의 우규승의 만남은 동병상련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우규승은 그의 이력이 말해주는 것과 같이 깔끔한 모더니즘적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환기미술관의 형태만 본다면 뉴욕이나 뮌헨에 있어도 좋을 국제적인 건축이라할 만하다.
그러나 환기미술관의 건축적 가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규승은 우선 대지의 지형적 조건과 잠재력을 읽어내는데 성공했다. 커다란 단일건물의 매스를 앉히는 대신, 리셉션동을 입구부분에 배치하고 대지 깊숙한 뒤쪽에 전시동을 위치시켜 크게 두 동으로 매스를 분화시켰다. 전시동은 두 개의 보울트지붕과 정사각형 입방체, 그리고 여기에 붙은 계단식 사무동으로 매스를 분절시켰다. 도한 지형의 경사도를 활용하여 전시동의 벽면을 타고 외부계단이 연속되며, 어느 순간 전시장 내부로 동선이 연결되는 순환동선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내외공간의 입체적 연속과 순환은 한국의 전통건축 공간에서 잘 활용됐던 기법들이다. 또한 지형의 경사에 따라 잘잘한 매스들이 배치되고 그들 사이에 형성되는 외부공간을 걷노라면 다시금 한국적 공간의 원형을 느끼게한다.
그렇다고 한국적 정서가 스며있다는 것이 환기미술관의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건축이 이룩한 의미있는 성과들이 세련되고 정확하게 구사됐다는 점이 이 건물의 가장 큰 가치라 할 수 있다. 원통 입방체 등의 단순한 기하학적 매스들은 내부의 공간과 기능의 필연적인 표현이다. 내부는 기획전시실이자 다목적의 입방체 공간과 위층의 상설전시실로 이루어진다. 기획전시실은 입방체 매스 속에 다시 또 하나의 입방체가 설정되고 그 사이 사방으로 계단이 놓여져 윗층의 상설전시실로 연결된다. 또한 사방의 계단 상부에는 톱라이트가 설치되어 빛의 판으로 둘러쌓인 공간이 된다. 이른바 ‘집 속의 집’을 넣음으로써 얻어진 겹공간과 빛의 효과였다. 물론 내부로 도입된 자연광은 벽면에 걸린 미술품들을 효과적으로 조명하기도 한다. 기능, 빛, 동선 등이 서로 보족적으로 통합된 뛰어난 공간이다.
기획전시실 옥상은 톱라이트 구조물이 마치 4면의 건물같이 둘러싸고 가운데 중정을 형성한다. 마치 한옥의 안마당같이. 중정 가운데에는 원형 우물이 놓여있는데, 실상 이 우물은 또 다른 내부의 톱라이트다. 우물과 빛의 묘한 메타포다.
환기미술관은 모더니즘 건축의 어휘들을 완벽하게 구사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적 공간의 원형들이 스며있다. 마치 김환기의 후기 작업이 모더니즘적 추상회화에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듯이. 건축가 우규승은 환기미술관 설계에 임하면서 많은 망설임이 있었을 것이다. 수화의 예술세계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수화의 이미지와 결별하고 건축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것인가? 아마도 그는 후자의 길을 택한 것 같다. 평면적이고 순수한 회화작업과 입체적이고 실용적인 건축 사이에는 유사성보다 차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규승의 건축은 수화의 예술세계와 조우하고 있다. 직접적인 형태나 상징이 아닌, 매우 고급스럽고 근본적인 태도와 방법으로.

김 봉 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