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 제정이 불가능한 다양한 건축들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학술적으로 전공하는 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유혹이 있다. 한국의 문화예술을 관통하고 있는 거대한 미학적 체계를 발견하고, 이를 명쾌하게 규정하고 설명하고픈 욕망이다. 예를 들어 “한국 예술은 비애의 미학”이라든가, “한국의 문화예술은 흥과 한을 기조로 형성되었다” 등 마치 핵심을 찌르는 것 같은 결론들이다. 건축분야로 한정한다면, “한국건축의 특징은 적절히 휘어진 처마의 선에 있다”든가, “비어진 마당과 같은 여백의 공간적 아름다움”이라는 그럴듯한 확신들이다.
그러나 전통건축이란 어느 시대의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화려하고 정교한 신라시대의 건축인가, 아니면 종묘나 병산서원과 같이 규범적이고 절제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것일까? 신라와 조선은 1,000여년이라는 긴 시간의 차이 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라는 상반되는 사상체계가 만들어낸 대척적인 문화의 시대이기도 하다. 불교와 유교는 한국문화를 형성해 온 두 개의 거대한 산맥이기도 하지만, 수원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물줄기이도 하다. 따라서 불교적 문화와 유교적 문화를 함께 아우르는 공통적 특징을 찾아내기는 불교와 유교라는 종교를 통합하려는 헛된 노력과 다르지 않다.
같은 시대의 건축이라 해도 한마디 말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의 향교와 사찰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강릉항교나 경주향교는 엄격한 중심축에 따라 대칭적으로 배치되었고, 건물의 모습도 엄숙하고 장식이 절제되어 있다. 마치 학문이 높은 고고한 선비를 대하는 인상이다. 반면 지리산 화엄사 등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비대칭적으로 배치되며, 건물의 모습은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유교건축의 정신과 불교건축의 정신은 그만큼 큰 차이를 보인다.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금욕적이고 정제된 유교의 정신과 장엄하고 교화적인 불교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사찰 만 예로 든다면 삼국시대의 절은 매우 기하학적이며 대칭적으로 구성되었다. 황룡사 불국사 뿐 아니라 고구려의 정림사, 백제의 미륵사 들은 자로 잰 듯한 정확한 계획 아래 정교한 치수와 비례로 건립되었다. 건물들 간의 관계도 정확한 직각을 이루는 기하학적 집합체였다. ‘기하학적 질서’가 고대 사찰건축의 특징이라면, 근세 사찰건축은 오히려 ‘반정형적인 유기적 질서’를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찰들은 구불거리는 산지 지형에 맞추어, 건물들 사이가 임의의 각도로 틀어져 있으며, 건물 하나에도 정교한 기술보다는 호방한 원초성이 돋보인다. 일제 때의 식민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건축문화의 퇴화라고 매도했지만, 어불성설이다. 각 시대마다 조형의 의지가 달라지고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어느 지역의 건축을 한반도 건축의 대표로 삼아야 할 것인가? 산지 경사 지형에 익숙한 영남지역인가, 아니면 평야 지형에 적응하여 발전한 충청-호남지방의 것들인가? 흔히 ‘신라계 건축과 백제계 건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영남과 호남의 건축을 비교하곤 한다. 산이 험하고 평야가 적은 경상도의 건축은 폐쇄적 배치와 수직적인 모습이고, 산이 완만하고 들이 넓은 충남-전북의 건축은 개방적 배치와 수평적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한 예로 창녕 관룡사와 김제 금산사를 비교하자. 관룡사는 산 중턱 좁은 대지에 위치해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아주 폐쇄된 마당을 이룬다. 반면 금산사는 널찍한 평지에 개방적인 배치로 이루어진다. 관룡사 대웅전의 모습은 높이가 높아 매우 수직적이지만, 금산사 대적광전은 길쭉한 수평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구성과 형태상의 지역적 차이는 두 지역의 지형적 차이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추론되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각 지역마다 특징적인 건축문화가 존재하고, 서로 차이가 나는 건축문화권이 상존했다는 사실이다.
이쯤 논리를 펴면, 그런 시대적 계층적 지역적 차이란 같은 종 안에서의 작은 차이들이 아니겠는가 하는 반론이 있을만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한국어라는 동일한 어법체계 속에서 존재하는 지역적 방언들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건축분야에서만큼은 표준어를 정할 방법이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벽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건축의 어법이라면, 세계의 모든 건축은 같은 어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건축은 같은 언어족에 속한다. 따라서 전 세계의 모든 건축이 방언이듯이, 한국의 역사적 지역적 건축들 역시 동등한 비중의 방언이 된다.
어떤 문화가 좋은 문화인가를 묻는다면, 서슴없이 다양한 여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문화라고 답할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통일된 문화가 있다면 교과서적으로 암기하기에 쉽겠지만, 시대가 바뀌고 여건이 변하면 그런 문화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중국이라는 세계의 중심 곁에서 5,000년의 민족문화를 지켜온 힘은, 그 수많은 외침과 변화 속에서도 한국건축이라는 모국어적 전통을 형성해온 동력은 바로 우리 건축문화가 가졌던 다양함에 있다. 반대로 어떤 문화가 가장 위험한가를 묻는다면, 바로 획일화된 문화일 것이다.
다양한 것은 무엇인가
또 다른 우문. 모든 시대를 통틀어도, 사찰이나 서원이나 관계없이 모두 나무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린 지붕들인데, 무엇이 다르고 다양하다는 것이냐? 나무기둥이나 기와지붕이라는 앞의 전제는 맞지만 뒤의 질문이 틀렸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사람은 귀 둘,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동일하다는 우매한 결론에 이른다. 모든 사람이 다른 점은 그 소재적 구성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소재들(이목구비)의 다양한 결합 정도와 방법이라는 미묘한 차이 때문이다. 그보다도, 모든 사람이 다른 까닭은 서로 다른 생각과 영혼을 가진 독립된 존재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전통건축의 다양함이란 외형이나 구조기술의 다양함이라기보다, 그를 만든 사람(건축가)의 정신과 생각의 다양함을 의미한다. 건축가의 정신이 반영된 건물을 건축이라 부르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단지 건물에 머문다. 건축이 아닌 건물들에서는 어떠한 예술적 감동이나 문화적 동질성을 찾기 어렵다.
누가 건축가였는가? 흔히 전통건축의 건축가는 목수였다는 주장이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크게 맞는 말도 아니다. 목수나 석수는 건물을 설계하고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불어 넣는 형이상학적 건축가들이 아니었다. ‘집짓기’ 과정 중에 현재 건축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역할은 한 사람들은 승려들이나 양반층과 같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현대 건축가같이 전문적인 건축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목수와 같이 집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을 해석하여 어떤 위치에 어떤 규모로 집을 앉혀야 하는지, 자신의 집이 자연과 어떻게 어울려야하는지, 사회 속에서 어떤 위상을 가져야하는지를 생각하고 결정했다. 수많은 기와집들이 서로 다른 차이를 갖는다면, 결국 이들의 세계관과 생각의 차이이며, 이를 읽어내는 것이 진정한 전통건축 감상의 방법일 것이다.
물론 건축을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건축물이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졌고, 역사적으로 어떤 희소한 가치가 있으며 어떤 외형적 아름다움이 있는가? 그러나 이런 점에만 치중해 본다면, 전통건축은 고고학적 대상이 되거나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골동품에 머물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에도 살아 숨쉬는 전통건축의 생명력을 다시 찾아보는 일이다. 나무기둥과 기와지붕은 썩고 부서지기 마련이고, 이는 얼마든지 새것으로 갈아 끼울 수 있다. 그러나 건축적 생각과 정신은 이미 건축이 선 그 땅위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도 없고, 한번 훼손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건축적 생명의 실체인 것이다.
전통건축의 대표작으로 항상 1,2위를 다투는 것이 부석사와 병산서원이다. 두 건축은 영주와 안동이라는 근접한 곳에 있어, 동일한 지역문화권에 속한다. 그러나 부석사는 고려시대의 불교사찰이며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 서원이다. 이 두 건축만 비교하더라도 불교적 건축과 유교-성리학적 건축의 차이를 알 수 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의 건축적 정신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그만큼 두 건축을 시대와 사상을 대표하는 우수작이기 때문이다.
부석사 입구에는 ‘봉황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어느 사찰이든 대개 ‘**산 **사’라는 식으로 산 이름을 병기하고 있다. 봉황산은 부석사의 뒷산이며, 무량수전의 배경이 되는 산이다. 그만큼 불교사찰에서는 뒷산이 중요하며, 모든 건물들은 뒷산의 위치와 형태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병산’은 서원의 앞에 있는 산이다. 옥산서원의 이름 역시 서원 앞에 있는 자옥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만큼 서원에서는 앞산이 중요하다.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조건 속에서 왜 이런 대조적인 차이가 나타나는가? 다시 말해서, 부석사를 건립한 불교 승려들은 왜 뒷산을 중시했고, 병산서원의 성리학자들은 왜 앞산을 중요시했는가? 결국 두 건축의 주인이자 건축가인 그들이 건축에 대한 생각, 자연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불교도들은 건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늘 건물의 바깥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뒷산은 배경으로서 건물과 함께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석사 무량수전은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외형을 가져야 하며, 부석사 뒷산이 봉황산과 잘 어울리는 형태로 지어져야 했다. 반면 성리학자들은 늘 서원 건축 내부에 머물기 때문에 뒷산을 볼 방법이 없다. 그들이 대하는 산은 건물 안에서 바라보는 앞산이 되며, 당연히 모든 건축적 질서는 앞산의 방향과 형태에 맞추어져야 했다. 또한, 자신을 감싸고 있는 건물의 외형은 자신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외관의 비례나 장식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부석사와 병산서원의 차이는 불교건축과 유교건축의 대표적 차이이며, 더 나아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차이이기도 하다.
집합성이 건축이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5개의 궁궐이 조영되었고, 그 가운데 경복궁과 창덕궁은 서로 견줄만한 대표적인 궁궐이다. 그러나 두 궁궐은 너무나 다르다. 경복궁이 규범적이고 위엄이 있다면, 창덕궁은 자연스럽고 친근하다. 두 궁궐의 법식과 규모는 거의 비슷하다. 건물을 만든 형식이나 기술은 거의 동일하다. 두 궁궐의 큰 차이는 수많은 건물들이 얽혀져 이루는 관계, 다시 말해서 집합되는 구성법이 다름에 있다. 경복궁은 가상적인 축선에 맞추어 엄격한 규칙과 좌우대칭의 원칙에 충실하다. 그러나 창덕궁은 뒷산 자락의 높낮이와 휘어짐에 맞추어 조화를 이루다보니 결과적으로 불규칙한 궁궐이 되었다.
사찰과 서원이 다른 까닭도 건물의 차이가 아니라 그 집합적 구성법의 차이에 기인한다. 사찰의 기능과 서원의 기능은 다르며, 그 차별적 기능에 맞도록 건물들을 배열하다보면 서로 다른 집합체가 된다. 같은 사찰들이라도 주어진 땅의 지형적 조건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다른 지형에 맞추어 건물을 배치하면 결과적으로 다른 사찰을 만들게 된다. 수많은 건축물들은 이런 기능적, 지형적 해석과 해결을 통해 독자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오게 되는 신선한 발상과 절묘한 공간의 구성, 자연과의 일체화된 조화 ….. 들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전통건축의 참맛이며 뛰어난 다양함이다.
병산서원에는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우수한 건물은 없다. 건물들은 별 볼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그 집합적 구성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부석사 역시 무량수전 단독건물의 아름다움 보다 백두대간의 웅장한 자연을 적절히 해석하고, 적절하게 터를 닦고, 건물들을 배열한 솜씨와 안목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집합성이란 부분과 부분간의 관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한국건축 구성 단위 가운데 최소의 것은 ‘방 또는 칸’이다. 칸이란 4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단위를 말한다. 방들이 모이면 건물이 된다. 안방과 부엌이 모여 안채라는 건물을 이루고, 사랑방과 사랑마루가 모여 사랑채를 이룬다. 그러나 궁궐이나 사찰과 같은 권위건축에서는 방 하나가 한 건물이 된다. 불국사 대웅전은 25칸이 하나의 방을 이루며 그 자체가 한 건물이다. 이 점이 서양건축과 가장 커다란 집합적 차이다. 즉 서양의 건축은 여러 개의 방이 모여 하나의 건물이 되며 대부분 그로써 완결된 건축이 되지만, 한국건축은 건물은 곧 방이며 하나의 건물로써 완결된 건축이 되지는 않는다. 불국사를 예로 들면 대웅전 부분의 완결을 위해서는 대웅전 한 건물 뿐 아니라 그 주위를 둘러 싼 회랑과 두 개의 석탑, 청운백운교와 입구인 자하문 등 여러 개의 건물과 구조물이 모여야 한다. 이를 건물군집 (cluster)이라 한다.
서양건축의 눈으로 본다면 한국건축의 건물이란 방이고, 건물군집이 하나의 건물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한국건축은 건물 한동 한동 감상하는 것보다 건물군집을 감상하는 편이 훨씬 정확한 방법이고, 많은 깨달음과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건물군집 자체가 건축적 집합의 끝이 아니라 자연 환경까지 확대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정원건축들이다. 민간정원의 대표격인 소쇄원은 보기와는 달리 완벽하게 인공적으로 재구축한 정원으로서, 자연적 요소들을 독창적으로 집합화하는 데 성공한 위대한 성과이다.
한국건축의 집합성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 건축 역사에 대해 가졌던 많은 의문을 풀 수 있다. 천여 년에 걸친 한국의 건축은 왜 변하지 않았는가? 눈을 하나의 건물, 나무 뼈대에만 맞추다 보면 분명 한국건축은 변하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기록된 건물의 구조방식이나 조선말의 건물이나 똑같은 기와집에 똑같은 나무집이다. 그러나 한국건축을 집합의 건축이라 정의한다면, 삼국시대의 집합법과 조선시대의 집합법은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즉 각 시대마다 서로 다른 건축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자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전통건축을 대표하는 명작들로 뽑혔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왜 뽑혔는가,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한국건축의 어떤 가치와 특징들이 평가를 받는가가 중요하다. 우선 각 건축의 공통점들을 찾기보다, 각자의 개성과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자. 그리고 자연과 인공적 건축물들이 이루는 관계를 살펴보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집합법을 뜯어보자. 그래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고민과 생각과 안목과 정신들을 발견하자. 그것이 전통의 실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