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충청도는 ‘양반의 고장’이라고 했습니다. 양반들은 넓은 땅에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 것 이상으로 재산을 모았고, 그 여유를 가지고 유학을 공부하고 글을 썼던 조선시대의 사회 지도층이었습니다. 유독 충청도에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서 양반의 고장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어요.
그 가운데 윤증(1629~1711)이란 분은 양반 중의 양반이었지요. 학문이 높고 인격이 훌륭하여 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주어 우의정까지 임명했는데,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단 한 번도 실제 벼슬길에 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세속적인 권력을 욕심내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며 살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윤증 선생을 ‘백의정승’이라 부르며 그의 인품을 칭송했습니다. 지금도 그 분이 살았던 집이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남아 있어요. 윤증 선생이 사시던 곳이라 하여 ‘윤증고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집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인데,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해야 관람할 수 있답니다.
우리나라 옛집들을 감상하려면 우선 그 집이 앉아있는 터를 살펴봐야 합니다. 윤증고택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노성산의 남쪽 기슭, 완만한 경사지에 자리 잡았습니다. 남향하고 있는 집의 남쪽으로 큰 연못이 있고, 작은 샘물도 있습니다. 집의 뒤쪽에는 산이, 앞쪽에는 물이 있는 이러한 땅의 생김새를 ‘배산임수’형이라 부르며, 아주 좋은 명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집의 서쪽에는 ‘노성향교’라는 유학을 가르치던 옛날 학교가 있고, 동쪽 언덕을 넘으면 ‘노성궐리사’라는 공자님을 제사지내던 건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유학자의 집인 윤증고택을 포함하여, 이 일대는 유학의 성지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예전의 사회는 주인과 하인,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높고 낮음이 있었습니다. 하인은 주인을 받들어야 하고 주인은 하인을 먹이고 재워야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보살펴야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제대로 키워야 했습니다.
특히 양반집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높낮이 관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윤증고택은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와 고간채, 사당채 등 모두 5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채와 안채에는 주인들이 살고, 행랑채에는 하인들이 살면서 집안일을 하는 곳입니다. 고간채는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이고, 사당채는 돌아가신 조상신들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입니다.
사랑채에는 남자주인들이 살고, 안채에는 여자주인들이 삽니다. 부부라도 남편과 아내가 건물을 달리하며 따로 살았던 것이 지금과 큰 차이입니다. 아들과 손자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랑채에서 지내야하고, 며느리와 딸은 할머니와 함께 안채에서 지내지요. 안채에는 식구들 외에 다른 남자들은 일절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을 서로 피했던 이런 풍습을 ‘내외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있는 출입문을 내외문이라 하여, 외간 남자들의 출입을 금지했던 것이지요.
윤증고택은 ㄷ자 모양으로 생긴 안채와 一 자 모양의 행랑채가 모여서 口자 모양의 집을 이룹니다. 행랑채에 있는 내외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별도의 사랑채가 동남쪽 모퉁이에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사랑채 앞은 넓은 마당이 터져 있어서 아무나 사랑채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사랑채 마당은 가족들 뿐 아니라, 멀리서 온 손님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때때로 찾아와 주인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던 곳입니다. 사랑채는 열려 있지만, 안채는 철저하게 닫혀져 있습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들의 집은 그 생김새부터 완전히 다릅니다.
사랑채 내부를 잘 살펴보면, 방이 두 개 있고 마루가 두 개 있습니다. 바깥쪽에 있는 방을 큰 사랑방, 안쪽에 있는 방을 작은 사랑방이라 합니다. 큰 사랑방은 할아버지가 쓰는 곳이고, 작은 사랑방은 아버지가 씁니다. 아주 어린 아들은 안채에서 자지만, 소년기가 되면 보통 할아버지와 함께 자면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습니다. 두 방에는 각기 마루가 딸려있습니다. 큰 사랑방 옆 마루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고, 작은 사랑방 앞 마루는 다른 방바닥보다 높은 누마루입니다. 누마루에 앉으면 앞쪽으로 연못과 멀리 산들이 겹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앉아 경치도 감상하면서 시도 짓고 대화도 나누며,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하게 낮잠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ㄷ자 안채에는 3개의 방이 있습니다. 안방은 시어머니가 계시는 곳이고, 건넌방은 며느리가 쓰는 방입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습니다. 그리고 건넌방 앞으로 작은 마루가 있고, 그 너머에 안 사랑방이 있습니다. 안채에 있는 사랑방이란 뜻의 이 방은 이 집을 방문한 여자 손님들이 머무르던 곳입니다. 주로 여자 친척들이었겠fn지요. 안채의 대청마루는 제사 때 각지에서 온 일가 친척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함께 먹던 곳입니다. 보통 제사에는 50여명이 모이기 때문에, 식구 수에 비해서 아주 넓게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온돌방에는 꼭 하나의 마루가 옆에 붙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을 태서 온돌을 따뜻하게 데우는 방은 추운 겨울에 쓰기 알맞습니다. 반대로 나무판으로 만든 마루는 여름에 시원합니다. 방과 마루가 하나씩 쌍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집들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또 방은 벽으로 막혀있지만, 마루는 벽 없이 터져있습니다. 막힌 것과 터진 것이 하나의 쌍을 이루는 현상을 ‘음양의 효과’라고 하기도 합니다. 철학적인 경지의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집들은 기능적으로도 효과적이지만, 철학적인 생각까지 담고 있다고 합니다.
안채 서쪽에 고간채가 서 있습니다. 고간채는 추수한 곡식들, 살림살이,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고간채와 안채 사이에는 고방마당이 있습니다. 안채 부엌과도 통하는 이 마당은 음식 장만이나 빨래 등 집안일을 하는 마당입니다. 그런데 이 마당은 뒤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양입니다.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더운 여름철에 바람이 잘 통해서 시원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안채와 고간채에서 빠져 나온 지붕들이 그늘을 만듭니다. 집안일 하는 하인들에게 그늘과 바람을 제공하여 좀 더 쾌적하게 하려는 배려입니다.
집의 뒤편 언덕 위에는 사당채가 있습니다. 이 집 선조들의 위패를 모신 건물인데, 조상신이 이곳에 계시면서 자손들의 제사를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당은 이집에서 가장 높고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만큼 조상들을 우선적으로 받든다는 뜻이겠지요. 윤증선생은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사당에 올라 조상들에게 문안을 드렸고, 외출할 때와 돌아와서도 꼭 사당에 아뢰었다 합니다. 대단한 효도를 몸으로 실천한 분이지요.
윤증고택에는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사랑채에는 ‘안고지기문’이라는 희한한 문이 있습니다. 보통 문은 앞뒤로 여는 여닫이문과 옆으로 미는 미닫이문으로 구별됩니다. 두 문은 열리는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이 안고지기문은 미닫이로 밀어서 두문을 포갠 다음, 다시 여닫이로 여는 신기한 문입니다. 특별한 장치를 해서 가능한 문이며, 이 집만 가지고 있는 자랑거리입니다.
바깥의 사랑채 쪽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행랑채가 딱 막고 있고, 그 가운데 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문은 두 칸이나 되는데, 한 칸은 앞쪽으로 문 뒤쪽으로 벽이고, 다른 한칸은 반대로 앞이 벽, 뒤가 문입니다. 문을 열어두어도 밖에서 안을 볼 수가 없고, 들어가려면 두 번이나 꺾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안과 밖을 구별한다고 해서 문 이름도 ‘내외문’이고, 가린 벽도 ‘내외벽’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내외벽이 땅하고 만나는 부분은 비어 있어, 벽이 공중에 떠 있는 모양입니다. 안채에서 보면 이 틈을 통해서 손님들의 신발이 보이고, 그 신발을 보고 누가 들어오려고 하는지 알아서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양반집은 주인과 하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뿐 아니라 조상과 자손들이 함께 어우러져 생활했던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식구들 사이에도 엄격한 법도와 질서가 있어서, 각자의 공간이 정하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도록 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생활에 편리하도록 여러 가지 재미있는 발명품들이 집안 곳곳에 마련되었습니다. 윤증선생이 최고의 양반이었듯이, 윤증고택도 최고의 살림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