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의 반을 지난 박근혜 정부의 국정기조는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이다. 정치권에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세 가지” 중의 하나라고 조롱받던 창조경제의 실체가 비교적 분명해지고 있다. 20세기 말에는 지식사회, 지식경제라는 개념이 휩쓸더니, 이제는 그를 넘어서 창조사회, 창조경제의 개념을 이해해야한다. 영국의 경영전략가인 호킨스(John Howkins)가 처음으로 제창한 창조경제란 창의성을 바탕으로 부를 창출하는 경제적 행위를 의미한다. 창의성이란 과학 분야에서는 발명이나 발견에, 인문사회분야에서는 사회나 조직의 혁신에, 예술분야에서는 창작 작업에 필수불가결한 가치이다.
창조경제의 목표는 고부가가치 생산을 통한 부의 축적에도 있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경제 성장을 통해 문화를 융성하게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문화가 융성하게 되면 개인이나 사회의 창의성이 높아지고, 높아진 창의성은 다시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되어 창조경제를 실현한다는 선순환 논리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는 하나의 트랙을 달리는 릴레이 선수와 같다.
결국 핵심은 문화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누구나 문화의 뜻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그 정확한 의미를 묻는다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영국이 낳은 대석학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는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논의되는 문화의 정의가 17가지가 넘는다고 정리한 바 있다. 그만큼 넓고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것이 문화라는 개념이다.
그 중에 하나, 비교적 명쾌한 정의가 있다. 자크 랑(Jack Lang)이라는 프랑스 정치인은 1980년대 9년 동안 문화부 장관을, 1990년대 5년 동안 교육부 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의 교육체계를 문화예술기반 교육으로 바꾸어놓은 장본인이다. 그는 문화란 “인문학과 예술”이라고 범위를 명확하게 정하고, 초중등학교의 문화기반교육을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학교육과 예술 실기교육으로 구성했다. 현재 프랑스의 문화기반교육은 물경 15년이라는 세월을 한 사람에게 문화와 교육행정을 맡긴 결과로 이룬 쾌거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는 문화대국이었지만, 자크 랑의 개혁을 통해 더욱 더 문화강대국으로 가고 있다. 기껏해야 2년 미만의 짧은 기간 동안 문화와 교육부의 장관직을 스쳐가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결단이요, 개혁이다. 문화기반교육이란 온 국민을 인문학자나 예술가로 만드는 교육이 아니다. 그것이 노리는 핵심은 결국 ‘창의성 교육’이며, 과학자든 정치가든 경영자든 어느 직종에든 창의성이란 21세기의 핵심 가치임을 직시한 교육이다. 그 결과 프랑스의 중산층이란 “하나 이상의 외국어에 능통하고,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계층”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만큼 국제적인 교양이 있고, 예술적 취미를 통해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 그럼으로써 자신의 직업에 창의적으로 종사할 수 있는 계층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문화기반교육이란 결국 행복하고 창조적인 중산층을 양성하는 교육이다.
반면 우리의 중산층은 누구인가? 암암리에 “30평대 아파트를 소유하고, 중형 승용차를 타며, 1년에 한번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계층”을 의미하지 않는가? 철저하게 경제적인 기준에 의존한 정의이다. 한국적 기준에 따르면 필자는 틀림없는 중산층이지만, 프랑스의 중산층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러한 두 나라의 차이와 괴리는 프랑스의 교육이 문화기반교육이었다면, 한국의 교육은 경쟁 원리 속에서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성공을 위하 교육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성공을 위한 경쟁 교육으로 한국 사회는 급성장한 혜택을 보았지만, 창조경제, 문화융성, 창의성 교육이라는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기에는 이미 낡은 패러다임이다.
기술은 과학에 뿌리를 두고, 문화는 예술에 기반을 둔다. 다시 말해서 과학 없는 기술의 발전이 없듯이, 예술이 없는 문화의 융성을 기대할 수 없다. 국내 문화계 상황을 분석하면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치들로 가득하다. 2014년 한해에 거래된 국내 미술시장의 규모는 3,900억 원에 불과하다. 작년 GDP의 0.02%에 불과하고, 그나마 2007년 6,000억 원 규모에 비해 35%가 감소했다. 한국미술협회에 등록된 미술가들만 30,000명이다. 순수하게 그들의 작품들만 거래됐다고 가정해도 1인당 1,300만원에 불과하다. 다른 직업이 없는 전업미술가라면 최소임금에도 모자라는 수입이다. 게다가 미술시장의 절반 이상이 해외 작품들이어서 국내 미술계의 수입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비공식적 통계이지만, 국민의 30%만 일생에 한 번 무용 공연을 본다고 한다. 국내 무용계에서는 1년에 공연을 보는 순 관객 수는 대략 3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그 수많은 무용 공연에 오는 관객은 결국 3만 명 안의 누군가가 매니아가 되어 매번 출석함으로 채워진다. 메르스가 휩쓸었던 올 상반기 공연계는 거의 전멸 상태였다. 한국의 대표 공연 상품이었던 ‘난타’마저 70% 이상 관객 수가 감소했다고 한다. 공연의 대부분을 요우커들의 단체 관람으로 채웠던 결과이다. 중국 관광객이 발을 끊으니 고사하고 마는 국내 공연 시장의 실상이었다.
필자의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세계 예술계에서 각광받는 젊은 예술가들은 무수히 배출했다. 피아노의 손열음이나 김선욱, 바이올린의 임지영과 신아라, 무용계의 김기민, 영화계의 나영길 감독 등은 여전히 세계가 주목하는 예술가들이다. 우리학교 출신 뿐 아니라 한국 출신의 더 많은 세계적 예술가들이 배출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국내 예술시장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유능한 젊은 예술가들은 유럽에서 뉴욕에서 머물며 외국 시장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공급은 충분한데 수요가 없는 지극히 불균형의 국내 예술계이다.
예술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예술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한다. 예술은 익숙하고 이해해야 향유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악기 연주를 통해 음악을 이해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어 미술을 이해해야한다. 초중등학교에 연극반이나 영상클럽을 활성화해서 공연예술을 이해하고, 영상예술의 기술들에 익숙해야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창의성이 생기고, 성인이 되어서는 자연스럽게 예술 향유층이 되어 생활 속에 예술을 즐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자크 랑의 예술기반교육이 추구하는 목표가 이것이다.
예술가를 만드는 교육도 전통적인 장르 예술을 넘어, 장르 간에 통섭되고 예술과 기술이 결합하는 새로운 융합예술 쪽으로 변화해야한다. 전통적인 예술장르는 이미 발전할 대로 발전했고, 서구사회의 주도권 속에서 한계에 도달했다. 예술은 원래 하나의 복합적인 제의에서 출발했다. 수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음악 무용 미술 연극 건축 등 전문 분야로 분화한 것이다. 지난 세기부터 이미 음악과 미술이 만나고, 무용과 건축이 만나는 등 장르 융합적 실험이 계속되어 왔고, 이제는 융합이란 어떤 분야에도 당연시되는 새로운 경향이 되었다.
또한, 예술과 기술은 원래부터 하나였다. 영어의 art는 예술과 기술로 번역된다. 근대에 와서 전혀 다른 분야로 인식되었지만, 중세 유럽의 화가들은 안료를 만드는 화학 길드에 속해 있었고, 조각가들은 건설 길드의 일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예술과 기술은 Techne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 있던 동일체였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예술과 기술은 별거하여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의 대척적인 분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탈근대사회의 예술은 기술과 불가분의 관계를 회복하고 있다. 거대한 스테인레스 스틸 강아지를 예술작품화한 제프 쿤스와 같은 미술가들은 첨단의 금속 가공 기술 없이는 그들의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고스트’와 같은 뮤지컬도 조명과 순간 이동의 현란한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한다.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음악 등 새로운 장르의 예술들은 어디가 기술의 영역이고 예술의 영역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문화융성은 지속가능한 예술생태계가 조성되어야만 달성 가능한 목표이다. 예술가의 공급과 일반 국민들의 예술 소비 수요가 적정하게 유지되어야 하며, 새로운 예술소비는 예술기반 교육과 융합예술의 발전에서 창출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새로운 기술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고, 창조경제의 소중한 씨앗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