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김정동 저,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역사의 기록과 복원, 건축의 보존을 향한 열정
충청도의 한적하고 작은 농촌 마을에 어느 날 불현듯 철도가 놓여졌다. 기차 역이 생기고 그 역을 지키기 위한 경찰서가 생겼다.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인구와 물자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촌(村)에서 면(面)이 되었다가 읍(邑)이 되더니, 도청이 옮겨오면서 충청도의 중심도시가 되더니, 대단위 연구단지와 대학들이 유치되어, 급기야 인구 100만이 넘는 광역시가 되었다. 불과 100년이 채 안되는 세월 동안 급속하게 변해왔던 대전광역시의 약사였다. 김정동 교수는 이 도시의 건축적 역사를 쓰기 위해 166개의 건축물 목록을 만들었고,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이라는 책에 그 궤적을 소개했다.
1876년 강제적인 개항 이후 125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정말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 조선왕조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남북 분단과 전쟁, 군사정권과 민주화, 세계화와 정보사회, 냉전과 남북화해까지 아마도 인류사회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경험의 편린들이 한국 근현대사를 구성하는 내용이었다. 현재의 상황은 가까운 역사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나 이 평범한 역사의 진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1세기 전의 역사, 반세기 전의 구체적인 역사를 알지 못한다. 기성세대에게는 너무나 생생했던 암울한 기억이기 때문에 떠올리기 싫었고, 신세대가 보기에는 별 매력이 없는 기간이었기에 연구 성과도, 연구하는 학자도 배출되지 못했다.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대지 안에 벽돌로 만든 오래된 창고가 있었다. 흔히 ‘기기창’ 혹은 ‘병기고’라고만 알려진 이 건물의 잊혀진 의미가 알려진 것은 최근이었다. 이 건물은 1883년에 건축된 것으로 원래는 기기국의 번사창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번사창이란 모래로 주형(鑄型)을 만들고, 거기에 금속 용액을 부어 주조하는 일종의 무기 공장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장 건물로 중요한 역사적 건축인 셈이다. 그보다도 번사창의 역사를 추적해보면, 고종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알 수 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중국의 천진기기국에 파견된 연수생 28명의 노력과 좌절의 역사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조그만 건물은 동학란과 청일전쟁, 수구와 개화 등 근세사 초기의 고난과 갈등을 고스란히 간직한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역시 김정동 교수가 밝힌 의미있는 내용들이다.
김교수는 이미 <일본을 걷는다> 1,2권, <하늘 아래 도시, 땅 위의 건축> 1,2권, <김정동 교수의 근대건축 기행> 등 5권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이번 6번째 저서를 출간함으로써, 건축계의 베스트 셀러 저자로 그 확실한 자리 매김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방대한 저작 활동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성과는 김교수가 한국 근대건축 연구에 투신한 지 25년 동안의 활발했던 연구 활동을 중간 정리하는 일관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건축역사를 전공하는 학자와 학자 지망생들은 꽤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근현대 건축사, 특히 개항 이후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부분을 전공하는 이는 아직도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전국 어느 대학에도 독립된 강의도 없을 정도로 건축계에서는 관심 밖의 부분이었다. 축적된 자료도 없고, 정리된 학설도, 선학들의 연구도 없는, 이러한 황량한 풍토에서 ‘근대건축’에 대한 연구는 저자의 표현대로 독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황무지에서 홀홀 단신으로 연구를 시작한지 불과 20여년 만에 이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그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와 관련한 글에서 “정치사만 역사가 아니라, 건축사도 역사다”라는 논지를 편다. 정치적 의도 때문에 건축물에 역사적 죄과를 묻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없애버린다고 민족의 정통성이 확보된다거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논리는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하다. 저자의 논지를 더 확장하자면, 건축물을 세운 의도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이 비판의 대상이라 하더라도 건축물 자체는 중성적이며 건축적 비판만 타당하다. 암울한 근대사 속에서 건축의 역사를 연구해야하는 학자의 고뇌에 찬 인식론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김정동 교수의 학자적 미덕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은 끈질긴 자료 추적과 분석력이다. 일전에, 술자리에서 김교수는 일본의 어느 고서점에 들렀다가 일제기의 그림엽서 한세트를 발견하곤 주저없이 모든 돈을 털어 구입했다고 기뻐한 적이 있다. 3-40년대의 한국 도시 전경을 담은 엽서로 기억하는데, 10매짜리 엽서의 구입가는 물경 50만엔이었다는 것이다. 소심한 평자로서는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5만원만 해도 살까 말까 망설였을텐데, 그는 100배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한 것이다. 그 엽서가 500만원 어치의 학술적 값어치가 있을까 하는 속편한 평가는 차치하자. 김교수의 자료 수집에 대한 열정만을 놓고 본다면, 그러한 열정이 지금의 업적을 가능케한 원동력이었음에 숙연해진다.
후학들이, 혹은 학계 차원에서 근대건축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김교수에게 신세를 져야함은 물론이다. 건축학회와 어느 출판사가 협동으로 일제기에 간행된 건축학술지인 <朝鮮と建築> 전질을 영인할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여러 원로들이 나누어 소장하고 있는 잡지를 다 수집해도 전질의 절반 정도 밖에는 구할 수 없어서 애를 태웠으나, 김정동 교수는 거의 대부분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었음이 알려져서 전질 영인이 가능했다. 그는 공식적인 건축 자료 뿐 아니라, 일제기 또는 해방 전후의 보통학교(초등학교) 졸업 앨범, 당시의 전화번호부 등 근대건축물이 일부라도 실렸거나 단서가 될만한 자료면 그 질적 경중이나 구입가의 고저를 불문하고 수집하고 있다. 혹자는 자료를 독점한다거나, 자료 수집 중독증에 걸렸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체계적 자료가 전무한 상황에서 그의 개인적 노력은 우선 찬사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남아있는 역사, ……>에서도 그의 자료 수집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모든 내용이 철저한 고증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캐나단인 건축가 고든과 영국건축가 마샬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고든의 행적과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직접 캐나다에 사는 증손자를 방문하여 여러 응답들을 받았고, 출입금지 구역인 마샬의 영국공(대)사관을 추적하기 위해 대사관 측에 서한을 띄우기도 했다. 물론 엄청난 양의 풍부한 기초 사료들을 확보한 후에 행했던 후속 작업이었다.
근대건축 연구는 마치 쓰레기 집하장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작업이다. 한점의 의미있는 자료를 찾기 위해 하찮고 쓸모없는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분석 평가해야 하는 지난한 작업. 상상할 수 없는 인내와 지루한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며, 더욱이 홀홀 단신으로 수집부터 평가까지 모든 작업을 소화해야 하는 초인적 노력이 필요하다. 어떨 때는 저돌적이기 까지한 김교수만이 가능한 연구성과였다.
이 책의 가치는 여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기존 근대건축에 대한 연구가 일제나 선교사들이 남겨 놓은 개별 건축물에만 치중되어 있어 근대기의 전반적인 건축적인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명하기에는 미흡했다. 김교수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연구대상을 개발하고,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총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서설로서 20세기 한국건축사를 개괄하고, 2부는 역사적 도시들인 심양, 부산의 왜관, 해미읍성을 다룬다. 일종의 도시사적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3부는 개화기에 활동했던 3명의 서양인 건축가에 대한 내용으로서, 코스트와 명동성당, 마샬과 영국공사관, 고든과 세브란스 병원 등을 조명하고 있다. 4부는 근대사에서 특히 정치사적 의미를 가졌던 번사창과 정관헌, 조선총독부 청사에 대한 건물사를 서술한다. 마지막 5부가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서, 근대사 속에서 한 지역의 도시와 건축의 변모를 조명한 내용들이다. 강경포구의 성쇄, 최초로 밝혀진 대천 외국인 수양관 단지의 전모, 대전의 근현대사, 그리고 목포 -나주 -광주의 한국인 상점가 등, 기존 연구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지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의 학자적 시각은 이제 완숙기에 접어든 듯하다. 개별 건축물 뿐 아니라, 도시와 인물들, 지역사에 대한 성과는 앞으로 이 분야 연구의 지평을 넓혀준 공헌이며,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라 할 수 있다.
저자와 이 책의 많은 부분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몇가지 이견과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선, 이른바 ‘근대’와 ‘건축’, ‘건축가’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 후하다는 점이다. 한국건축사에서 ‘근대’는 어느 시기이며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는 너무 복잡한 논쟁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생략을 하더라도, 모든 남아있는 건물들을 ‘건축’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동의하기 어렵다. 자료상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지방 도시의 평범한 2층상가 건물까지 건축사적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하는가는 의문이다. 또한, 모든 건축청부업자와 건설기술자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건축관련인들을 ‘건축가’로 호칭하는 것도 문제라고 보인다. 아무리 근대적 의미의 건축가가 희귀했다 하더라도 대천 외국인 수양관의 마종유는 돌집 전문 토건업자였고, 현지 목수는 기능인이지 건축가로 취급하기 어렵다.
‘근대건축물과 건축사’에 대한 과도한 애정은 간혹 비판의식을 흐리기 쉽다. 그 극단적 예가 지나친 보존-복원 지상주의적 주장들이다. 예를 들어 “목포의 만호진, 나주읍성, 광주읍성 등의 복원이 급선무다”라는 주장은 현재 이들 도시가 처해있는 역사적 단계를 무시한 낭만적 인식이라 보인다. 변화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이 건축사요, 도시사다. 물론 그나마 희소한 역사적 선례들이 무분별하게 훼손되는 것은 막아야하겠지만, 모든 건축물들, 거리와 도시들을 과거 그대로 보존하고, 더 나아가 복원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몇가지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저자의 연구는 한국 근대건축사 연구의 시작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은 1차적 자료가 확보되어야만 해석도 가능한 것이 역사 연구의 필연적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의무를 김정동 한 개인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 더욱 많은 능력있는 후학들이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그리고, 거액의 사재를 털어가며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더 이상 신화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학계 전체의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자료 수집과 정리에 나설 때가 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