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아시아 건축의 질곡
아시아의 근대화란 곧 서구화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아시아 건축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산업화 근대화를 통한 빈곤 퇴치의 노력은 국가적 차원의 건설과 개발사업으로 이어졌고. 그 개발의 모델을 미국과 유럽의 도시와 건축에 두었다. 구미의 모델을 지향하면서, 필연적으로 아시아권 전체는 상호 경쟁 체제로 재편되었다.
아시아권의 연대와 협력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시장을 잠식하는 거대하고 치열한 생존 투쟁의 사냥터가 되어 버렸다.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일본이 부흥하는가 하면,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경제는 활성화됐다. 중동의 오일달러 덕분에 일본과 한국의 건설업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각국의 건설업계는 끝없이 해외시장을 개척했는데, 동남아로, 중국으로, 늘상 그 대상은 같은 아시아권의 국가들이었다. 상호 협력없는 건설무역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호혜적으로 창조하기 보다는, 일정량의 파이를 누가 더 많이 먹느냐의 생존 법칙이 지배하는 정글이었다.
아시아 건축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50억 세계인구의 55%가 아시아인들이다. 건설물량은 전세계 시장의 절반에 해당한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아시아 건축이 발전하면 세계 건축이 발전한다. 아시아의 도시가 행복해지면, 인류의 절반 이상이 행복해진다. 대단한 기회의 땅이다. 그러나 막대한 건설물량에 불구하고 세계적, 아니 아시아적 건축과 도시의 성공사례는 드물다. 속전속결, 그러면서도 최고최대를 선호하는 거대주의의 망상 때문이다. 개발이 곧 건축이라는 패러다임을 버리고, 느리지만 가치있는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자. 그러면 곧 양적 확대가 질적 변환으로 나타날 것이다.
건축전공 대졸자만 해도, 한국은 세계 2위, 일본은 3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적 수준의 건축가는 배출되지 않는가? 지도적 건축가보다는 건축 기술자 양성에 급급한 교육체제와 목표 때문이다. 서구에는 나라마다 도시마다 있는 건축 전문교육기관이 아시아권에는 전무하다. 목표가 낮으면 실현은 더 낮을 수밖에 없다. 목표만 높인다면, 아시아권의 과열된 고등 교육열은 세계적 건축을 위한 충분한 자원이 될 것이다.
유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까지 모든 고등 종교가 발생하고 발전한 곳이 바로 아시아다. 뿌리깊고 다양한 문화 전통을 가진 곳이다. 동아시아의 목조 건축문화, 인도대륙의 혼합 건축문화, 기술과 정신이 조화된 서남아시아의 아랍 건축문화. 20세기 세계건축은 온갖 실험과 기술개발 끝에 막다른 한계에 봉착해 있고, 아시아의 정신과 전통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아시아 건축가 스스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로마가 서구 건축문화의 출발지였다면, 7세기 중국 당나라는 동아시아 건축의 근원지였다. 중국-한국-일본은 목조문화를 공유했고, 유교와 불교라는 동일한 정신세계를 구축했고, 더욱이 한자라는 공동의 의사소통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일 세 나라는 서로 대립과 경쟁 속에서 지난 세기를 허비했다.
물론 세나라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100년간을 제외하고는 늘 세계사의 중심에 있었던 중국. 다시 거인의 모습으로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한때 세계 건축시장의 1/3을 차지했던 일본의 경제력. 메타볼리즘, 도시풍경론 등 새로운 담론이 세계건축계에 어필하면서 수많은 국제적 스타 건축가들을 배출했다. 적어도 건축에 관한한 일본은 G7의 반열에 드는 유일한 아시아 국가다. 양대 거인국 사이에서 한국은 건설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기적에 가까운 중동건설, 200만호 주택과 신도시를 5년간에 지어댄 물량생산의 귀재였다. 수없이 황당한 시행착오를 체험하면서 어느 나라보다 풍부한 건설 노하우를 쌓은 나라다.
결국 동아시아 삼국이 아시아 건축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한중일 세나라가 이룩한 자원들을 다른 아시아권에서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세나라의 이해와 협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각자의 발전 모델을 먼 미국과 유럽에서 구하지 말고, 이웃 세나라의 장점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건축계의 시스템을 구축하여 활발한 교류를 이루어야 한다.
한국건축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중국은 건설 물량으로, 일본은 건축적 자부심으로, 서로 양보하기 어려운 대국들이다. 또한 근세사의 적대관계로 아직은 소원하다. 그 틈새를 한국이 메꾸어야 하고, 메꿀수 있다. 중국에는 개발 정책의 시행착오를 충고할 수 있고, 일본에는 동아시아적 가치관과 정신을 상기시킬 수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걱정을 하지말고, 오히려 어부지리를 노리자. 국가간 리더십은 중재와 합의의 기술이다. 우선 중국과 일본의 건축과 문화를, 그리고 아시아 건축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상호 연대 속에서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자. 그것이 한국건축이 살길이고, 아시아 건축의 희망이다. 또한 세계건축의 돌파구이기도 하다. <<끝>>
사진설명
1. 아시아의 유산 -1. 중국 자금성 태화전.
2. 아시아의 유산 -2. 타이랜드 아유타야의 불교사원.
3. 넘어야할 빈곤의 현실. 캄보디아 프놈펜의 강변 주거지.
4. 전통의 속박과 현대화의 갈등. 인도네시아 대학 본관.
5. 추상화를 통해 전통성을 추구한다. 타이랜드 적십자사. (설계 : 분디트 쿠라사이 외)
6. 완벽한 수준작 속에서만 지역성은 의미를 가진다. 인도, 천문 천체물리학 센터. (설계 : 챨스 꼬레아)
7. 철저한 현대화 속에서도 가능성은 풍부하다. 말레이지아, 메나라 메시니아가 빌딩. (설계 : 켄 양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