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사든 일단 “신문에 났다”하면 의심할 바 없는 진실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문에 났다”하더라도 우선 “어느 신문에 났는데?”를 물어보게 된다. 같은 사실도 신문사들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기사가 되기 때문이다. 진실을 짐작이라도 하려면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을 동시에 구독해야 한다는 자조까지 있다. 독자들은 신문에서 객관적 진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신문사의 정파적 입장과 숨겨진 의도를 추론하는 신문비평가가 되었다.
한국의 신문들은 개화기의 애국계몽, 일제 강점기의 독립 문화운동, 해방 이후의 반독재와 민주화라는 역사적 소명과 사회적 대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문민시대에 접어들어 신문들의 당파성과 상업성이 강화되었고 사회적 역량과 소명의식은 오히려 퇴화되고 말았다. 상대 정파를 매도하는 언론 폭력, 자전거 경품까지 동원된 과도한 구독경쟁, 기사를 인질로 협박에 가까운 광고 수주 등의 폐해 앞에서 신문의 공신력과 객관성은 심각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외적인 상황까지 신문의 매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최근 탄핵사태에서도 입증되었듯, 방송매체의 현장성과 신속성, 반복성이 만들어 내는 가공할 위력 앞에서 신문은 당파성만 드러낼 뿐이었다. 또한 저예산 운영구조와 쌍방향 소통원리, 그리고 신세대적 감각으로 무장한 인터넷 매체의 폭격 속에서 제도화된 신문들은 기존의 권위는 고사하고 생존까지 위태로울 지경이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적응할 능력도 의지도 갖추지 않음으로써 자초한 자업자득이다. 여전히 정치면이 제1면을 차지하며, 경제면은 어렵고 딱딱하고, 스포츠면은 가십거리로 채워지고 문화 예술면은 장식효과가 우선한다. 신문의 당파성은 정치면에서만 나타날 뿐, 경제정책이나 예술의 경향성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가진 신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면만 제외한다면 “그 신문이 그 신문”인 셈이다.
신문기자들의 희망부서 1순위가 예전에는 정치부였으나, 지금은 문화부와 경제부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내부부터 변하고 있지만 상층 편집진은 여전히 정치 우선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제왕적이었던 정치권력은 급속하게 약화되어 가지만, 신문사의 제왕적 비판권력은 여전히 정치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 눈으로 탄핵정국을 보면 노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던 60%의 국민들은 반노 핵심들이며,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 70%는 친노 분자들이다. 반노와 친노를 합하면 국민의 130%가 되니 계산이 맞지 않는다. 엄청난 후폭풍을 맞고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탄핵에 대한 평가가 동시에 벌어진 별개의 진실임을 인정하는 데 답답할 정도로 인색하다.
과거의 단선적인 논리구조로 본다면 21세기의 사회는 매우 혼란하고 무질서한 세상이다. 국가 장래와 정치에 냉소적이던 젊은 층들이 어느 순간 촛불집회와 사이버 상에서 애국자로 등장하는 현실이다. 재벌을 비판하면서도 앞 다투어 대기업 사원이 되기를 희망하고, 청년실업의 난국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은 인력난에 시달린다.
그러나 개별적인 현상들이 이율배반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그 복잡계 전체를 관통하는 숨겨진 질서가 있고 복잡한 원칙이 있다. 한 인간 안에 문화인과 정치인, 직업인이 공존하는 새로운 인간형이 양산되고 있으며, 정치적 보수와 예술적 진보가 짝을 짓기도 하는 복잡한 문화계가 형성된다. 21세기의 복잡계는 과거의 산술적 논리 대신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논리들이 작동하는 세상이다. 신문의 주관심도 정치에서 문화면으로 옮겨져야 하고, 다양한 시각과 복잡한 논리가 필요하다. 오늘은 야당지를, 그러나 내일은 여당지를 발행할 수 있다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복잡계 신문만이 새로운 시대의 정론과 목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