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의 분위기와는 달리 20세기말은 무척이나 평화로우며, 다가올 미래도 낙관하고 있다. 이제 ‘세기말’이라는 혼돈이나 종말론은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세기초’의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희망에 차 있는 것이 우리의 1994년이다. 냉전구도의 종식과 문민정부의 출현을 함께 맞은 한국의 현재는 더욱 더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미래가 낙관적이던 혹은 비관적이던 간에 지금이 엄청난 변환기라는 인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단지 100년 혹은 1,000년 단위의 절대 시간적 변환 뿐 아니라, 포스트 모던 논쟁이 이미 결론을 내린 바와 같이, 서구의 경우 길게는 르네상스 이후 500여년에 걸친 이성의 역사가 혹은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의 기계문명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소위 모더니즘의 시대가 마감되는 끝 머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로 한정하더라도 식민지와 함께 시작되었던 근대의 역사가,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한 단계를 뛰어 넘어 세계국가로의 도약을 요구받고 있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미래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미래란 항상 현재의 선택에 의해 지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의 전환점에 서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보다는 선택하고 만들어 나가도록 요구를 받고 있다. 즉 앞으로 건축은 무엇을 선택하여야 하고, 어떠한 패러다임의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 역시 현재 건축의 모색과 갈등 속에 방향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색없이는 한국 건축의 미래를 낙관할 근거가 전혀없다. 지금 사회전반을 휩쓸고 있는 일말의 위기와 기대감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지구촌 전체 환경의 변화일 뿐이다.
적어도 20세기말 동시대적 건축의 주제는 ‘도시’와 ‘기술’로 요약할 수 있다. 모더니즘 건축이 미쳐 예견치 못했던 자본의 탐욕은 건축에 도시문제를 얹혀주었고, 반면 자본의 자기번식력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기술 발전의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즉 도시와 기술의 문제는 근대 자본주의의 양면성의 결과이다. 초기 모더니스트들의 낙관적인 도시관, ‘전원도시’와 ‘빛나는 도시’ 들은 이미 그 실현 가능성을 잃은 지 오래이다. 자본주의의 도시는 전체적 계획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개체적 건축들의 자기 현시와 상품화로 황폐해왔다. 특히 우리의 도시들은 천민자본에 의해 형성되어 왔고, 자본의 횡포를 통제해야할 행정권력까지 자본과 결탁함으로써 도시 전체의 혼돈을 가중시켜왔다. 현대건축의 위기는 자본의 공포와 위력에 맞서다가 혹은 애초부터 복종하고 좌절한 데서 비롯된다. 황폐화된 도시 속에서 건축은 자포자기로 흐르고, 좌절된 건축들의 집합은 다시 도시 전체를 추악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건축가 승효상이 절규하는 ‘간꼬구노 겐치구분까’의 저급함 (“플러스” 94년 2월호)은 건축가 개개인의 무지와 저질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개인은 결국 도시적 좌절의 희생물이기도 하다. 이제 건축가들이 거대한 ‘도시계획’ 혹은 ‘도시설계’의 수단을 통해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이 분야의 밥그릇은 소위 도시전문가들의 차지가 되어버렸고, 자본의 시장이 더욱 세분화 자율화되어 가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 도시계획 자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축소된 건축의 영역을 인정하고 부분적인 해결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초기 모더니스트들의 낙관론 – 빛나는 도시 전체를 만들 수 있다는-이나 마찬가지로 후기 모더니스트들의 판단 착오 -빛나는 건축이 빛나는 도시를 만든다-를 경험한 지금 그 답은 부정적이다. 여기에 20세기말 건축가들의 질곡이 시작되는 것이다. 도시를 개조할 수단은 빼앗겨 버렸고, 부분적 해결만으로는 건축 자체의 만족도 얻을 수 없는. 그렇다면 차선의 대안,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건축이 도시를 끌어안음으로써, 개별적인 도시적 건축을 통해서 도시를 재구축하는 전략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기술의 문제는 현대건축의 희망이기도하다. 물론 앞으로의 기술이란 고전역학의 세계를 표상하는 기계공학적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자공학적 기술을 지칭하는 것이며, 정보공학적인 소프트웨어를 의미한다. 기술의 건축이란 두가지 대상을 포괄한다. 첫째는 기술 자체의 구성원리가 건축을 이루는 부류들이다. 신소재의 채용으로 이룰 수 있는 거대한 내부공간이라든지, 혹은 정보제어기술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부분적 인테리젼트 빌딩들. 전자시대에 맞는 진정한 하이테크 건축이라면 건물 자체의 공간이동이 가능해야하고,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형태를 가져야할 것이다. 아직 이러한 건축적 가능성은 출현하지 못했다. 건축도 첨단공학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기계미학이란 결국 건축적 기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계적 유추를 통한 건축을 구축했듯이, 건축은 건축 본연의 존재 양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기술이 근본적인 건축의 주제가 되어야하는가. 그것은 기술로 대표되는 현대의 정신을 표현해야하는 건축의 운명이며, 그 표현 도구를 기술의 차원에서 선택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된 기술의 원리와 변화된 과학적 패러다임을 도입하고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건축의 지평을 열어야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도되고 있는 건축 속에서의 기술 표현이란 기계시대의 가구식 구조를 대신하여 케이블 구조 등 다양한 구조기술로서 공간을 구성하기도 하고, 비철금속과 세라믹 등 신소재를 채택하고 그에 맞는 디테일을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피막과 형태를 얻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 표현의 노력은 물론 국내 건축계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 노력들의 대부분은 기술 표현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형태에 대한 취미일 뿐 기술 표현이 갖는 문화적 의미가 간과되어 있다. 또한 현대기술의 표현 자체가 현대건축이 된다는 착각에 빠져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의 테크놀로지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계공학적 기술이 건축의 공간과 형태와 개념을 유도했던 20세기와는 달리, 이제는 오히려 건축의 선택에 의해 적절한 기술이 개발되는 단계에 왔기 때문이다. 즉 건축가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어떤 건축이든지 실현 가능한 시점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의 표현이 아니라, 그것들을 선택하고 조절하고 지시할 수 있는 건축가의 능력과 인식전환이다.
도시와 기술의 개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 놓은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세계건축의 고민과 모색이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부닥치는 구체적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건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겉으로는 도시와 기술의 건축을 서양과 일본의 문제로 도외시하면서도 속으로는 피상적 모방에 급급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다른 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건축과 건축가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하는 반가움과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건축가 승효상의 최근 두작품은 앞서 말한 도시와 기술의 주제를 말할 수 있는 극히 소수의 건축이다.
이문동치과와 영동제일병원은 모두 기존 도시 패브릭이 형성된 속에 위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문동은 오래된 주거지역의 근린시설이고, 영동은 개발의 막바지에 다다른 환경 속에서 비교적 큰 규모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도시적 요소를 끌어들이려는 개념의 설정이 강렬하고, 피막의 디테일과 하늘과 만나는 방법의 개념이 동일하다. 도시적 요소는 이문동에서는 노출된 직선계단으로 귀착된다. 직선계단은 연장된 도시가로로서 주택가 주변 상가의 흐름을 대지 내부로 끌고 들어 올 뿐 아니라 3층 레벨까지 수직적 가로의 역할을 한다. 직선계단이 도시적 도로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본체의 매스를 반달형으로 구성하고 반대편 대지경계에는 3층 높이의 벽을 쳤다. 한쪽은 맊고 다른 한쪽은 틔워서 도시흐름을 자연스럽게 연장시킨다. 이런 규모의 근린시설에서 본체와 계단을 분리하고 가벽을 치고, 원호형 매스를 이용해 흐름을 유도하는 설정은 안도의 건축에서 즐겨 채용된 요소들이다. 그러나 안도의 건축보다는 모든 요소들이 훨씬 개방적으로 집합되어 있다. 한도의 거축 요소와 장면들은 분명 도시의 일부분들을 차용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건축 외부의 도시와는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따라서 안도가 비록 도시적 요소들을 건축 안에 재현하고 잇다고는 하지만, 그의 건축이 도시적 건축은 아니다. 도시는 도시인 채 그의 건축에서 유리되어 있고, 안도의 건축은 파편으로서 도시 속에 밖혀 있을 뿐이다. 반면 이문동치과는 주변 도시인들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개방되어 있고, 3층까지 접근을 시각적으로도 부드럽게 연결시켜 준다. 비록 안도의 건축에 비해 극적인 장면들이 생략되어 있기는 하지만, 도시적 건축이란 정지된 몇개의 장면이 아니라, 도시를 끌어들이는 역동적 부분, 즉 개체 속에 전체를 포괄하는 큰 부분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문동 치과의 도시적 가치가 있다.
반면 영동제일병원에 도입된 도시는 더욱 은밀하다. 작가는 건물의 매스를 두개로 나누어 앞 동은 환자용, 뒷 동은 의사용의 기능을 부여했고, 그 사이에 중정을 도입했다. 작은 대지에 앉혀질 복잡한 기능을 가진 병원 건축으로서는 감히 설정하기 힘든 발상이며 실현이다. 대지는 앞 뒤 두면의 도로에 면해 있는데, 외부 도시-즉 도로면-에서는 길에 달라붙어 있는 통상적인 모습이다. 내부에 중정이라는 좋은 장소가 있음을 알기 어렵다. 물론 부인과, 그 중에서도 불임시술 전문 크리닉이라는 성격 상 도시에 대해 은폐되어야할 기능적 요구이기는 하다. 어쨌든 이문동에서 나타난 외부적 개방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중정을 둘러싼 3개의 외벽은 투명하게 처리되어 건물과 건물 사이의 개방감이 돋보인다. 여기서의 중정은 건물 속의 마당이면서 동시에 시각적으로는 도시적 광장의 역할을 노리고 있다. 광장의 요건인 경계를 이루는 건물들과 광장 사이의 긴밀한 개방성은 확보되어 있다. 반면 중정의 지상 레벨은 이용자들의 도시적 행위를 담기를 포기하고 바라보는 시각적 트임으로써만 존재한다. 이문동에 비해 도시성이 약해 보이는 까닭은 중정의 애매한 이중성에 기인한다. 두 매스 사이를 연결하는 복도는 앞 뒤 도로를 이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이 복도가 앞뒤 도로를 잇는 제3의 도시가로로서 설정되었더라면 중정의 도시화도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지 내부의 건축을 도시화하려는 의지는 지상의 배열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개방된 계단과 중정 위에 두 건물 모두 브릿지가 떠 있다. 고층 도시들에서 포착되는 하늘의 도시화가 재현되는 것이다. 현대 도시는 지상 뿐 아니라 지하와 하늘까지도 이용해야할 만큼 과밀해 진 것이고, 서울의 건축 역시 노출 계단을 건폐율로 산입해야할 만큼 도시화 된 ㄱ서이다. 두 건물에서 인상적인 것은 떠다니는 브릿지와 함께 옥상에 만들어진 마치 우주선과 같은 방들이다. 옥상을 이용해야 한다는 꼬르뷔제의 교의 뿐 아니라 하늘을 도시의 자연으로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이란 산과 숲과 강이 아니다. 그것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생존조차 어려운 녹색의 식물성 자연이란 도시 공해의 해악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모든 대지에 부여된 자연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을 자연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건축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공허일 뿐이다. 도시건축의 옥상은 옥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표면이어야 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바라볼 수 있는 실내가 필요하다. 그 방들은 아래 건물의 일부가 아니라 새로운 표면에 마련된 별도의 건축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하늘의 건축이어야 한다. 아직은 무한한 자연인 하늘. 도시의 인공적 협심증을 풀어줄 열쇠는 하늘에 있다.
승효상의 건축에서 기술 표현이 주된 주제는 아니다. 김수근의 영향 속에 있었던 과거의 건축은 물론 최근 ‘빈자의 미학’까지 그의 주된 관심은 건축의 공간과 무형의 의지에 쏠려있다. 그러한 면에서 지금의 두 건물이 택하고 있는 소재들의 참신한 조합과 형태화된 설비라인들을 기술 표현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변동성당까지 보여주었던 무거움이나 눌원빌딩 등의 피상적 가벼움과는 달리 경쾌한 재료들을 사용하고 극도의 세련성으로 질서를 부여한 피막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하이터치의 건축임을 말해준다. 이 두작품으로 본격적인 기술 표현의 문제를 논의하기에는 적합치 않다. 단지 공간과 미학과 도시에 관심을 가진 작가에게서도 기술 표현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고, 그의 선택 여하에 따라 도시와 기술이 융합된 건축을 기대해 본다.
이 두 작품에서 보여준 건축가로서 승효상 자신의 변모는 주목할 만하다. 한마디로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합리주의로의 변신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작년 발표되어 주목을 받은 ‘빈자의 미학’- 수졸당- 바로 전단계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과거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감성이 합리적인 자기 훈련을 겪은 후에 계속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란 건축적 프로그램을 전제로 하며 그것을 섬세한 디테일과 순발력 있는 적응성이 뒤받침하여 세련성을 얻는다. 프로그램의 재해석은 영동제일병원에서 돋보인다. 단일 크리닉의 기능을 해체하여 재조합한 결과, 지하는 의료공장으로, 지표면은 카페와 같은 만남과 기다림의 장소로, 상층부는 연구소 혹은 비즈니스 호텔로, 옥상부는 또 하나의 표면으로 환원되었다. 여러 개의 대기실을 하나의 진료단위로 묶어서 환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의사 순회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의료 서비스의 질을 재해석한 점도 신선하다. 또 복도의 에리베이터 홀을 살짝 비틀어 환자의 동선을 진료부 쪽으로 유도한 재치와 비행기 화장실 유니트를 화장실에 도입한 센스, 약국 대기실을 분리하여 카페테리아로 바꾼 대담함 등이 프로그램 재해석의 성과를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이문동 치과는 비교적 단순한 기능을 갖기 때문에 영동과 같은 시스템 재구축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치과의원 내부에 있는 3개의 진료 의자에 앉아 보는 도시적 풍경이야말로 이 건물의 백미 중의 백미이다. 치과의 진료의자란 참으로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치료 직전의 기다림은 치료의 고통보다 몇배 아픈 가상의 고통과 긴박감을 준다. 진료의자 앞 적절한 높이의 창을 뚫고 그것을 통해 잔잔한 주거지의 경관을 끌어들여 고통을 이완시키고 있다. 3개의 의자는 칸막이 벽으로 쌓인 독립된 방들에 놓여 자기화된 도시경관을 마주하게 되어있다. 프로그램을 기능과 면적규모로만 수용하지 않고 건축적 공간과 체험의 구체적 모습으로 환원시킨 결과이다.
프로그램의 성공적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내부와 외부구성의 논리가 일관성을 갖지 않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문동 치과의 경우 치과 내부의 여러 개 작은 방들의 집합 방식은 너무나 평범하게 구성되었다. 외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복도를 내부의 도시적 가로로 설정하고 부분들을 집합시켰으면 이 작품의 주제가 더욱 살아났으리라. 또한 중요하게 설정된 반달형의 매스의 공간감이 내부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영동의 경우 진료부와 수술부의 기능들은 더욱 복합적이어서 많은 부분들이 얽혀있고, 이들에 구성적 질서를 부여하는 데 많은 노력의 흔적을 읽는다. 그러나 이들의 재집합은 기능적 질서만 충족시키고 있다. 중정과 떠나니는 통로들과 같이 다시 한번 도시적 집합의 방법을 도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간절하다.
두 건물 가운데 어느 것이 우수하냐고 묻는다면 영동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는 하나의 전제를 수반하고 있다. 병원이라는 극히 기능적인 건축을 재구성하여 도시 건축적 차원으로 격상시켰다는 전제이다. 물론 재료나 디테일의 풍부함과 세련성도 이문동과 비교되지 않는다. 건축가의 의지가 실현 가능한 이유 중 하나가 재력과 지성이 풍부한 건축주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건축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문동 건물이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영동제일병원은 성격상의 한계이긴 하겠지만 도시적 개방성이나 도시 장면의 재현을 강조하지는 못한다. 즉 전체성 보다는 어느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있는 것 같은 부분적 체험이 강조된다. 반면 이문동 치과는 부분적 완결보다는 전체적 구도가 돋보인다. 건축주의 수준 때문에 또는 제도적인 불합리 때문에 혹은 시공 기술의 미흡 때문에 건축가의 의지가 꺾였다는 진부한 책임 전가는 더 이상 정당하지 못하다. 건축가의 의지가 건축주의 수준을 돋보이게 하거나 시공 기술을 뽐내는 데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동제일병원의 우수함이란 이런 것들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문동 치과의 성과는 더욱 근본적인 도시와 건축적 성과일 것이다.
승효상의 도시 끌어안기
Urbanism in Seung’s Architecture
김 봉 렬 (울산대학교 부교수)
Kim, Bong-ryol
19세기 말의 분위기와는 달리 20세기말은 무척이나 평화로우며, 다가올 미래도 낙관하고 있다. 이제 ‘세기말’이라는 혼돈이나 종말론은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세기초’의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희망에 차 있는 것이 우리의 1994년이다. 냉전구도의 종식과 문민정부의 출현을 함께 맞은 한국의 현재는 더욱 더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미래가 낙관적이던 혹은 비관적이던 간에 지금이 엄청난 변환기라는 인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단지 100년 혹은 1,000년 단위의 절대 시간적 변환 뿐 아니라, 포스트 모던 논쟁이 이미 결론을 내린 바와 같이, 서구의 경우 길게는 르네상스 이후 500여년에 걸친 이성의 역사가 혹은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의 기계문명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소위 모더니즘의 시대가 마감되는 끝 머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로 한정하더라도 식민지와 함께 시작되었던 근대의 역사가,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한 단계를 뛰어 넘어 세계국가로의 도약을 요구받고 있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미래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미래란 항상 현재의 선택에 의해 지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의 전환점에 서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보다는 선택하고 만들어 나가도록 요구를 받고 있다. 즉 앞으로 건축은 무엇을 선택하여야 하고, 어떠한 패러다임의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 역시 현재 건축의 모색과 갈등 속에 방향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색없이는 한국 건축의 미래를 낙관할 근거가 전혀없다. 지금 사회전반을 휩쓸고 있는 일말의 위기와 기대감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지구촌 전체 환경의 변화일 뿐이다.
적어도 20세기말 동시대적 건축의 주제는 ‘도시’와 ‘기술’로 요약할 수 있다. 모더니즘 건축이 미쳐 예견치 못했던 자본의 탐욕은 건축에 도시문제를 얹혀주었고, 반면 자본의 자기번식력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기술 발전의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즉 도시와 기술의 문제는 근대 자본주의의 양면성의 결과이다. 초기 모더니스트들의 낙관적인 도시관, ‘전원도시’와 ‘빛나는 도시’ 들은 이미 그 실현 가능성을 잃은 지 오래이다. 자본주의의 도시는 전체적 계획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개체적 건축들의 자기 현시와 상품화로 황폐해왔다. 특히 우리의 도시들은 천민자본에 의해 형성되어 왔고, 자본의 횡포를 통제해야할 행정권력까지 자본과 결탁함으로써 도시 전체의 혼돈을 가중시켜왔다. 현대건축의 위기는 자본의 공포와 위력에 맞서다가 혹은 애초부터 복종하고 좌절한 데서 비롯된다. 황폐화된 도시 속에서 건축은 자포자기로 흐르고, 좌절된 건축들의 집합은 다시 도시 전체를 추악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건축가 승효상이 절규하는 ‘간꼬구노 겐치구분까’의 저급함 (“플러스” 94년 2월호)은 건축가 개개인의 무지와 저질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개인은 결국 도시적 좌절의 희생물이기도 하다. 이제 건축가들이 거대한 ‘도시계획’ 혹은 ‘도시설계’의 수단을 통해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이 분야의 밥그릇은 소위 도시전문가들의 차지가 되어버렸고, 자본의 시장이 더욱 세분화 자율화되어 가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 도시계획 자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축소된 건축의 영역을 인정하고 부분적인 해결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초기 모더니스트들의 낙관론 – 빛나는 도시 전체를 만들 수 있다는-이나 마찬가지로 후기 모더니스트들의 판단 착오 -빛나는 건축이 빛나는 도시를 만든다-를 경험한 지금 그 답은 부정적이다. 여기에 20세기말 건축가들의 질곡이 시작되는 것이다. 도시를 개조할 수단은 빼앗겨 버렸고, 부분적 해결만으로는 건축 자체의 만족도 얻을 수 없는. 그렇다면 차선의 대안,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건축이 도시를 끌어안음으로써, 개별적인 도시적 건축을 통해서 도시를 재구축하는 전략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기술의 문제는 현대건축의 희망이기도하다. 물론 앞으로의 기술이란 고전역학의 세계를 표상하는 기계공학적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자공학적 기술을 지칭하는 것이며, 정보공학적인 소프트웨어를 의미한다. 기술의 건축이란 두가지 대상을 포괄한다. 첫째는 기술 자체의 구성원리가 건축을 이루는 부류들이다. 신소재의 채용으로 이룰 수 있는 거대한 내부공간이라든지, 혹은 정보제어기술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부분적 인테리젼트 빌딩들. 전자시대에 맞는 진정한 하이테크 건축이라면 건물 자체의 공간이동이 가능해야하고,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형태를 가져야할 것이다. 아직 이러한 건축적 가능성은 출현하지 못했다. 건축도 첨단공학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기계미학이란 결국 건축적 기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계적 유추를 통한 건축을 구축했듯이, 건축은 건축 본연의 존재 양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기술이 근본적인 건축의 주제가 되어야하는가. 그것은 기술로 대표되는 현대의 정신을 표현해야하는 건축의 운명이며, 그 표현 도구를 기술의 차원에서 선택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된 기술의 원리와 변화된 과학적 패러다임을 도입하고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건축의 지평을 열어야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도되고 있는 건축 속에서의 기술 표현이란 기계시대의 가구식 구조를 대신하여 케이블 구조 등 다양한 구조기술로서 공간을 구성하기도 하고, 비철금속과 세라믹 등 신소재를 채택하고 그에 맞는 디테일을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피막과 형태를 얻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 표현의 노력은 물론 국내 건축계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 노력들의 대부분은 기술 표현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형태에 대한 취미일 뿐 기술 표현이 갖는 문화적 의미가 간과되어 있다. 또한 현대기술의 표현 자체가 현대건축이 된다는 착각에 빠져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의 테크놀로지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계공학적 기술이 건축의 공간과 형태와 개념을 유도했던 20세기와는 달리, 이제는 오히려 건축의 선택에 의해 적절한 기술이 개발되는 단계에 왔기 때문이다. 즉 건축가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어떤 건축이든지 실현 가능한 시점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의 표현이 아니라, 그것들을 선택하고 조절하고 지시할 수 있는 건축가의 능력과 인식전환이다.
도시와 기술의 개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 놓은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세계건축의 고민과 모색이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부닥치는 구체적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건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겉으로는 도시와 기술의 건축을 서양과 일본의 문제로 도외시하면서도 속으로는 피상적 모방에 급급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다른 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건축과 건축가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하는 반가움과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건축가 승효상의 최근 두작품은 앞서 말한 도시와 기술의 주제를 말할 수 있는 극히 소수의 건축이다.
이문동치과와 영동제일병원은 모두 기존 도시 패브릭이 형성된 속에 위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문동은 오래된 주거지역의 근린시설이고, 영동은 개발의 막바지에 다다른 환경 속에서 비교적 큰 규모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도시적 요소를 끌어들이려는 개념의 설정이 강렬하고, 피막의 디테일과 하늘과 만나는 방법의 개념이 동일하다. 도시적 요소는 이문동에서는 노출된 직선계단으로 귀착된다. 직선계단은 연장된 도시가로로서 주택가 주변 상가의 흐름을 대지 내부로 끌고 들어 올 뿐 아니라 3층 레벨까지 수직적 가로의 역할을 한다. 직선계단이 도시적 도로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본체의 매스를 반달형으로 구성하고 반대편 대지경계에는 3층 높이의 벽을 쳤다. 한쪽은 맊고 다른 한쪽은 틔워서 도시흐름을 자연스럽게 연장시킨다. 이런 규모의 근린시설에서 본체와 계단을 분리하고 가벽을 치고, 원호형 매스를 이용해 흐름을 유도하는 설정은 안도의 건축에서 즐겨 채용된 요소들이다. 그러나 안도의 건축보다는 모든 요소들이 훨씬 개방적으로 집합되어 있다. 한도의 거축 요소와 장면들은 분명 도시의 일부분들을 차용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건축 외부의 도시와는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따라서 안도가 비록 도시적 요소들을 건축 안에 재현하고 잇다고는 하지만, 그의 건축이 도시적 건축은 아니다. 도시는 도시인 채 그의 건축에서 유리되어 있고, 안도의 건축은 파편으로서 도시 속에 밖혀 있을 뿐이다. 반면 이문동치과는 주변 도시인들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개방되어 있고, 3층까지 접근을 시각적으로도 부드럽게 연결시켜 준다. 비록 안도의 건축에 비해 극적인 장면들이 생략되어 있기는 하지만, 도시적 건축이란 정지된 몇개의 장면이 아니라, 도시를 끌어들이는 역동적 부분, 즉 개체 속에 전체를 포괄하는 큰 부분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문동 치과의 도시적 가치가 있다.
반면 영동제일병원에 도입된 도시는 더욱 은밀하다. 작가는 건물의 매스를 두개로 나누어 앞 동은 환자용, 뒷 동은 의사용의 기능을 부여했고, 그 사이에 중정을 도입했다. 작은 대지에 앉혀질 복잡한 기능을 가진 병원 건축으로서는 감히 설정하기 힘든 발상이며 실현이다. 대지는 앞 뒤 두면의 도로에 면해 있는데, 외부 도시-즉 도로면-에서는 길에 달라붙어 있는 통상적인 모습이다. 내부에 중정이라는 좋은 장소가 있음을 알기 어렵다. 물론 부인과, 그 중에서도 불임시술 전문 크리닉이라는 성격 상 도시에 대해 은폐되어야할 기능적 요구이기는 하다. 어쨌든 이문동에서 나타난 외부적 개방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중정을 둘러싼 3개의 외벽은 투명하게 처리되어 건물과 건물 사이의 개방감이 돋보인다. 여기서의 중정은 건물 속의 마당이면서 동시에 시각적으로는 도시적 광장의 역할을 노리고 있다. 광장의 요건인 경계를 이루는 건물들과 광장 사이의 긴밀한 개방성은 확보되어 있다. 반면 중정의 지상 레벨은 이용자들의 도시적 행위를 담기를 포기하고 바라보는 시각적 트임으로써만 존재한다. 이문동에 비해 도시성이 약해 보이는 까닭은 중정의 애매한 이중성에 기인한다. 두 매스 사이를 연결하는 복도는 앞 뒤 도로를 이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이 복도가 앞뒤 도로를 잇는 제3의 도시가로로서 설정되었더라면 중정의 도시화도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지 내부의 건축을 도시화하려는 의지는 지상의 배열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개방된 계단과 중정 위에 두 건물 모두 브릿지가 떠 있다. 고층 도시들에서 포착되는 하늘의 도시화가 재현되는 것이다. 현대 도시는 지상 뿐 아니라 지하와 하늘까지도 이용해야할 만큼 과밀해 진 것이고, 서울의 건축 역시 노출 계단을 건폐율로 산입해야할 만큼 도시화 된 ㄱ서이다. 두 건물에서 인상적인 것은 떠다니는 브릿지와 함께 옥상에 만들어진 마치 우주선과 같은 방들이다. 옥상을 이용해야 한다는 꼬르뷔제의 교의 뿐 아니라 하늘을 도시의 자연으로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자연이란 산과 숲과 강이 아니다. 그것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생존조차 어려운 녹색의 식물성 자연이란 도시 공해의 해악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모든 대지에 부여된 자연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을 자연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건축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공허일 뿐이다. 도시건축의 옥상은 옥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표면이어야 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바라볼 수 있는 실내가 필요하다. 그 방들은 아래 건물의 일부가 아니라 새로운 표면에 마련된 별도의 건축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하늘의 건축이어야 한다. 아직은 무한한 자연인 하늘. 도시의 인공적 협심증을 풀어줄 열쇠는 하늘에 있다.
승효상의 건축에서 기술 표현이 주된 주제는 아니다. 김수근의 영향 속에 있었던 과거의 건축은 물론 최근 ‘빈자의 미학’까지 그의 주된 관심은 건축의 공간과 무형의 의지에 쏠려있다. 그러한 면에서 지금의 두 건물이 택하고 있는 소재들의 참신한 조합과 형태화된 설비라인들을 기술 표현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변동성당까지 보여주었던 무거움이나 눌원빌딩 등의 피상적 가벼움과는 달리 경쾌한 재료들을 사용하고 극도의 세련성으로 질서를 부여한 피막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하이터치의 건축임을 말해준다. 이 두작품으로 본격적인 기술 표현의 문제를 논의하기에는 적합치 않다. 단지 공간과 미학과 도시에 관심을 가진 작가에게서도 기술 표현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고, 그의 선택 여하에 따라 도시와 기술이 융합된 건축을 기대해 본다.
이 두 작품에서 보여준 건축가로서 승효상 자신의 변모는 주목할 만하다. 한마디로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합리주의로의 변신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작년 발표되어 주목을 받은 ‘빈자의 미학’- 수졸당- 바로 전단계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과거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감성이 합리적인 자기 훈련을 겪은 후에 계속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란 건축적 프로그램을 전제로 하며 그것을 섬세한 디테일과 순발력 있는 적응성이 뒤받침하여 세련성을 얻는다. 프로그램의 재해석은 영동제일병원에서 돋보인다. 단일 크리닉의 기능을 해체하여 재조합한 결과, 지하는 의료공장으로, 지표면은 카페와 같은 만남과 기다림의 장소로, 상층부는 연구소 혹은 비즈니스 호텔로, 옥상부는 또 하나의 표면으로 환원되었다. 여러 개의 대기실을 하나의 진료단위로 묶어서 환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의사 순회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의료 서비스의 질을 재해석한 점도 신선하다. 또 복도의 에리베이터 홀을 살짝 비틀어 환자의 동선을 진료부 쪽으로 유도한 재치와 비행기 화장실 유니트를 화장실에 도입한 센스, 약국 대기실을 분리하여 카페테리아로 바꾼 대담함 등이 프로그램 재해석의 성과를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이문동 치과는 비교적 단순한 기능을 갖기 때문에 영동과 같은 시스템 재구축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치과의원 내부에 있는 3개의 진료 의자에 앉아 보는 도시적 풍경이야말로 이 건물의 백미 중의 백미이다. 치과의 진료의자란 참으로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치료 직전의 기다림은 치료의 고통보다 몇배 아픈 가상의 고통과 긴박감을 준다. 진료의자 앞 적절한 높이의 창을 뚫고 그것을 통해 잔잔한 주거지의 경관을 끌어들여 고통을 이완시키고 있다. 3개의 의자는 칸막이 벽으로 쌓인 독립된 방들에 놓여 자기화된 도시경관을 마주하게 되어있다. 프로그램을 기능과 면적규모로만 수용하지 않고 건축적 공간과 체험의 구체적 모습으로 환원시킨 결과이다.
프로그램의 성공적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내부와 외부구성의 논리가 일관성을 갖지 않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문동 치과의 경우 치과 내부의 여러 개 작은 방들의 집합 방식은 너무나 평범하게 구성되었다. 외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복도를 내부의 도시적 가로로 설정하고 부분들을 집합시켰으면 이 작품의 주제가 더욱 살아났으리라. 또한 중요하게 설정된 반달형의 매스의 공간감이 내부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영동의 경우 진료부와 수술부의 기능들은 더욱 복합적이어서 많은 부분들이 얽혀있고, 이들에 구성적 질서를 부여하는 데 많은 노력의 흔적을 읽는다. 그러나 이들의 재집합은 기능적 질서만 충족시키고 있다. 중정과 떠나니는 통로들과 같이 다시 한번 도시적 집합의 방법을 도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간절하다.
두 건물 가운데 어느 것이 우수하냐고 묻는다면 영동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는 하나의 전제를 수반하고 있다. 병원이라는 극히 기능적인 건축을 재구성하여 도시 건축적 차원으로 격상시켰다는 전제이다. 물론 재료나 디테일의 풍부함과 세련성도 이문동과 비교되지 않는다. 건축가의 의지가 실현 가능한 이유 중 하나가 재력과 지성이 풍부한 건축주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건축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문동 건물이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영동제일병원은 성격상의 한계이긴 하겠지만 도시적 개방성이나 도시 장면의 재현을 강조하지는 못한다. 즉 전체성 보다는 어느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있는 것 같은 부분적 체험이 강조된다. 반면 이문동 치과는 부분적 완결보다는 전체적 구도가 돋보인다. 건축주의 수준 때문에 또는 제도적인 불합리 때문에 혹은 시공 기술의 미흡 때문에 건축가의 의지가 꺾였다는 진부한 책임 전가는 더 이상 정당하지 못하다. 건축가의 의지가 건축주의 수준을 돋보이게 하거나 시공 기술을 뽐내는 데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동제일병원의 우수함이란 이런 것들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문동 치과의 성과는 더욱 근본적인 도시와 건축적 성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