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대를 버리고
최초의 엑스포는 1851년 런던에서 열렸다. 그때 조경설계가인 팩스톤은 유명한 수정궁을 발표하여 당시는 물론 근대건축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고, 그러한 건축적 사건은 빠리 엑스포의 에펠탑 (1889), 바르셀로나 엑스포의 독일관 (1929) 등으로 이어졌다. 작년의 세비야 엑스포는 물론 대전 엑스포의 건축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역대 엑스포 건축의 세계사적 의의에 익숙해 왔던 탓이다. 기대에 걸맞게 세비야 엑스포의 몇몇 전시관에서 새로운 건축적 가능성들이 나타났다. 최첨단 항공기 보다도 훨씬 정교한 프랑스관, 기후 환경에 적극 대응한 영국관, 자기나라의 문화적 성격을 뚜렷이 표현하고 있는 미국관과 이탈리아관 등. 일년 후의 대전 엑스포는 어떠한 건축적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인가.
필자에게 의뢰된 글의 내용은 “대전 엑스포와 세비야 엑스포의 전반적 건축 비교”였다. 작년 이맘 때 유럽 여행 중 세비야에 들러 하루 관람한 것이 인연이 되었던 까닭이다. 두개의 대상을 비교한다는 것은 항상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다. 우선 두개의 대상이 비슷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만이 비교가 가능하고 의미가 있다. 한국과 스페인의 이벤트는 “엑스포”라는 동일한 행사 명칭이어서 비교가 가능할 것 같지만 실상은 행사 내용에서 부터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알려진 대로 국제박람회 (엑스포)에는 몇개의 등급이 있다. 명실상부한 종합 엑스포는 참가국 스스로가 경비를 부담하고 설계하여 자신들의 전시관을 건설하는 것으로 앞 서 언급한 런던 빠리의 예, 1970년의 오사까, 작년의 세비야가 여기에 속한다. 그보다는 한 등급 낮은 것이 소위 ‘전문 엑스포’로서 올해의 대전, 내년의 비엔나 등이며, 주최국이 모든 시설을 전담하여 참가국들에게 임대해 주는 형식이다.
이러한 개최 방식의 차이는 벌써 세비야와 대전을 비교하기 어려운 건축적 차이를 내포한다. 세비야의 110여개 나라별 전시관은 각기 국가의 명예를 걸고 최선의 기술과 공법을 동원해 최고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물론 세비야 한국관 같은 예외는 있다 – 건축들이다. 대전의 경우는 어떠한가. 전시관들의 설계는 참가하는 재벌 그룹들의 설계실에서, 혹은 몇몇 연고를 통해 선정한 국내 건축가들이 담당하여, 건축에만 국한한다면 애초부터 국내 건축가들의 전시장일 뿐이다. 구태여 국제성을 찾자면 항공우주관과 소재관의 기본 설계에 일본의 설계 조직이 참여한 정도이다. 대전 엑스포의 개최 효과가 한국의 발전상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에 있듯이, 엑스포 시설물들의 의미는 국제적인 시각에서 한국 현대건축의 수준을 평가하는 데에 있다. 물론 참여한 건축가들의 국적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엑스포라는 축제 혹은 관람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건축적 프로그램의 문제이다. 또 표방하고 있는 주제와 같이 “새로운 도약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역사적인 수준의 문제이다.
대전의 건축들을 둘러 보면 세비야의 한국관을 대했을 때의 분노가 다시 솟구친다. 세비야 한국관은 우선 박람회 건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리한 경사로를 통해 힘들게 올라가야 주 전시장이 나타나고, 전시장을 복도형식으로 기다랗게 레이아웃 해 메세지 전달을 방해했다. 건축적으로는 예의 ‘전통의 현대적 변용’으로 어정쩡하여 미래지향적인 가능성은 물론 한국적인 이미지 전달에도 실패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분개한 것은 우리의 건축적 수준을 제대로 나타내지도 못할 삼류건축가를 등용함으로써 차원 낮은 만용과 자기 과시 만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전 엑스포의 건축은 완벽한 실패작들의 전시장이다. 세비야 한국관의 집단적인 컬렉션에 불과하다. 우선 한국의 건축 수준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므로 국제 무대에 선전하지 못하는 점에서 실패이다. 우리의 건축 수준이 아무리 이 정도만 못하랴. 능력있는 건축가들의 진지한 작업의 흔적은 전혀 없고, ‘미래’ 또는 ‘첨단’이라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재료와 구조의 무분별한 나열과 건축적 주제의 실종 만이 존재한다. 내부 전시의 내용이 얼마나 충실하여 이러한 혹평을 상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건축에 한정해 본다면 집단적인 국제적인 수치를 자초하고 있을 뿐이다.
2. 비인간적인, 빈곤한 상상력의 마스터플랜
국내와 세계의 것을 비교할 때 우리의 행사에 대한 폄하와 비판은 제발 피하고 싶고, 될 수 있으면 대전 엑스포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 엑스포는 전체 계획부터 실망을 더하게 한다. 단지 중앙의 순환로가 중심 보행로이며 그 위로 모노레일이 지나고 있다. 모노레일은 모두 3개의 역이 있어서 관람객을 중간중간에 수송하도록 되어 있으나, 그 궤도가 굳이 중심 보행로 상에 놓여져야 하는지 부터 의심스럽다. 보행자들의 편의 보다는 첨단을 가장한 첨단운송 기관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뿐만 아니라 보행자들을 위한 시설들이 미비되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는 아무런 계획없이 방치되어 있으며, 중심 보행로에는 가로수 만 계획되었을 뿐 8,9월의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해 줄 아무런 차단 시설이 없다.
세비야의 마스터플랜은 효율적인 관람 동선과 함께, 뜨거운 기후로부터 관람객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을 입체적으로 계획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바닥에는 군데군데 물이 흘러 발을 담글 수 있고, 머리 위에는 전체 보행로를 덮는 퍼골라가 있어서 그늘 속을 걸을 수 있다. 모노레일은 보행로와 분리하여 전시장 건물 사이를 뚫고 다니도록 되었고, 장애자용 전기 자동차 전용 차선이 넓은 인도와 분리해 시설되었다. 대전 엑스포의 보행로는 위로는 굉음의 모노레일이, 지상으로는 수많은 인파와 관리용 차량과 셔틀 버스들이 뒤엉킨 아비규환의 통로가 되고말 것이다. 관람객들이 쉴 곳은 잘 눈에 뜨이지 않으며, 편의시설인 식당 휴게실 매점들은 주 보행로에서 격리된 구석구석에 위치하고 있다. 게다가 그 편의시설들의 형태는 19세기의 온실이나 시장건물들을 연상케 한다. 전시관들은 미래지향적인 흉내라도 냈지만 관람객의 편의시설들은 흉내마저도 망각하고 있다.
또 하나의 꼴불견은 서쪽 입구 왼쪽에 마련된 위락시설 지역이다. 엑스포 자체가 축제와 오락의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위락지역을 만들었다. 엑스포 이후의 공원화 계획에 대비한 것이겠지만 그 발상의 천진난만함에 당황스럽다. 아마도 계획자들은 청룡열차를 설치하면 저절로 관람객들이 몰려들 것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과거에도 독립기념관에 관람객들이 줄어들자 그 옆 땅에 놀이 시설들을 설치해 끌어 모으자는 발상들이 나왔듯이, 엑스포 관람객 유치에 자신이 없는지 예의 놀이장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도 첨단이나 미래와는 전혀 거리가 먼 구태의연한 시설들이다. 엑스포 자체의 내실보다는 상업적 성과에 급급한 유치한 발상들이다. 놀이시설은 엑스포 이후 장기 프로그램에 의해 시설해도 늦지 않을 것이며, 성급한 설치는 국제적인 웃음을 자초하는 행위이다.
단지 중앙에는 상징 탑과 광장 주제관, 그리고 중심 조경지역이 설치된다. 상징 탑의 둔탁함, 나는 새 모양의 국제관의 유치한 조형도 실소를 자아내지만, 주제관 뒷편의 큰 연못을 주위로 펼쳐진 정원에 또 한번 기가 막힌다. 연못과 전체의 레이아웃은 신라시대의 안압지를 재현하고 있다. 경주의 안압지는 과연 자랑할 만한 선조들의 유산이다. 그러나 그것을 미래를 준비한다는 엑스포의 한가운데 끼어 넣었을 때, 우리 조경계획에 대한 발상의 수준을 고백하는 것으로 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늘상 선조들의 유산을 팔아 먹어야 할 만큼 우리의 상상력은 빈곤한 것이다. 가짜 안압지의 축대 위에 놓인 시설물들은 추상화된 전통건축도 아니고, 첨단의 조경시설도 아니다. 단지 저열한 디자인 능력과 빈곤한 상상력을 ‘전통’이라는 무기로 감추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엑스포와 관련된 어떤 주제를 찾아볼 수 있으며, 아니면 순수한 건축적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3. ‘미래’와 ‘첨단’에 당혹한 전시관 건축들
전시관 건축들은 꽤나 역량이 있다는 건축가들에게 맡겨졌다. 그들도 다른 나라의 엑스포를 직접 보았거나 듣기는 해서, 엑스포의 건축사적 의의를 인식하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모든 전시관에 사용된 재료와 공법, 그리고 조형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도 새로운 건축을 시도해 보려고 노력은 했다”는 변명에만 성공했을 뿐이다. 사용된 재료들은 철재와 비철 금속, 그리고 유리. 채택된 구조법들은 트러스나 스페이스 프레임, 그리고 파이프와 케이블 구조. 즐겨 쓰인 공간 요소들은 아트리움과 톱 라이트. 이 정도면 20세기 말 시대의 흐름에 합당한 건축 요소들임엔 틀림없다. 문제는 그것들을 조합할 수 있는 기술과 이해의 수준이다. 더욱 근본적인 한계는 건축이 재료와 구조와 요소들로만 이루어진다는 안이한 건축관이다. 새롭다는 것은 재료와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대전에 쓰여진 모든 구조 재료 공법 요소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또한 박람회의 기능을 색다르게 해석하려한 진지한 노력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대전 엑스포의 모든 건축은 새로운 실험도, 건축 본연의 진지한 개념도 없는 구태 의연한 건축물의 집합장이다.
하는 수 없이 세비야의 예로 돌아가야겠다. 각국 전시관 중 백미는 프랑스관이었다. 50m×50m의 넓은 지붕은 불과 지름 50Cm의 4개 기둥으로 지지되고 있다. 그나마 기둥의 끝은 뽀족하게 테이퍼가 져, 마치 접시돌리기의 묘기를 보는 듯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전시장 입장을 대기하는 관람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대기하는 동안 기상천외한 재료와 구조의 쇼우를 즐기게한다. 여기에 공중에 매달린 스프레이 분수는 계속 물보라를 내뿜어 뜨거운 스페인의 기후를 식히고 있다. 내부의 전시 공간은 더욱 상상을 초월한다. 유리 바닥 아래에 빠리 시가의 모형을 깔아 관람객들은 마치 항공 비행을 하듯 빠리를 내려다 보며, 주 전시장의 거대한 홀로그램의 풀장에는 우주의 탄생과 미래에 대한 현란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그 풀장 위에 떠 있는 공중 이동로를 지나는 성미 급한 관람객들은 진짜 첨단과 미래가 연출하는 감동에 경탄하고 만다. 영국관은 또 어떠한가. 하이테크 건축에 정통한 건축가 그림쇼는 세비야의 기후에서 그의 건축적 개념을 추출하였다. 건물의 앞 유리벽 전체에 물을 흘러 내려 보기에도 시원한 수벽을 만들고, 입구의 다리 양 쪽에서는 스프레이 분수에서 내 뿜는 물방울의 폭포가 형성된다. 내부 공간은 완전 개방된 각 층을 무빙 벨트들이 연결하고 있어 내외부의 개방성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그림쇼가 생각하는 박람회란 그런 것이었다. 55m 높이의 포스트에 거대한 도우넛 모양의 캐노피를 띄우고 있는 독일관은 구조 개념의 승리이다. 모든 시설과 외부공간을 그늘 속으로 넣으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팝건축과 미국식 대중문화의 가벼움을 그대로 표현한 벤투리의 미국관, 로시류의 도시건축 개념을 재현했으나 차거운 현대건축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이탈리아관 등은 첨단의 기술보다는 원론적인 건축적 개념이 돋보이는 전시관들이다. 심지어 내우외환에 찌들린 러시아관마저도, 광활하고 어두운 내부공간은 시베리아의 황막한 분위기와 우주공간의 신비로움을 재현하고 있었다.
대전 엑스포 전시관 모두를 비평할 가치도 의욕도 없다. 단지 ‘첨단’ 혹은 ‘미래, 새로움’에 대해 기본적인 학습이 너무나 모자라다는 것이고, 진지한 건축적 개념이 부재하다는 것이며, 디자인의 기본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너무나 원론적인 비판만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새로움은 커녕 진부한 기술의 나열 뿐이며, 그로테스크한 형태와, 기술과 유리된 공간 요소의 우격다짐과, 유치한 발상에 의한 호기심의 유발 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군계다학 (群鷄多鶴?)의 건물이라면 포항제철의 소재관, 대한항공의 미래항공관, 신언학의 주제관, 최관영의 국제관 A블럭 정도를 꼽고 싶다. 이 전시관들은 적어도 나머지 범작 또는 폐품들과는 구별되어야 할 정도의 수준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두 건물은 일본인들의 기본계획으로 케이블 구조와 곡선 트러스 구조의 성질에 정통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래도 일제가 우수한 것일까? 소재관의 나선형 구성은 이해가 가지만 구태여 나선형의 매스를 분리해야 할 타당성과 그로 인해 난립된 포스트들은 수긍이 가지 않는다. 미래항공관의 경우도 격납고의 이미지를 철골 구조로 표현하는 데 성공은 했으나, 케이블 구조를 연상케 하는 안테나의 설치는 사족으로 보인다. 주제관은 전체 매싱과 무반사 메탈판넬 재료 사용의 신선함이 돋보인다. 단 160m 길이의 매스가 주제탑과의 상징성만 추구하고 있도록 너무 단조로와 아쉬움을 남긴다. 국제관 A블럭은 18m×18m 그리드 모듈의 케이블과 막구조이다. 특별한 구조적 해석이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지만, 교과서적인 구조와 형태가 오히려 인상깊다. 나머지 건물들, 특히 바로 앞 또 다른 국제관의 기괴함과 억지 형태와 대비되어 정통파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교가 안되는 대상을 억지로 견주어야 할 때, 비교 결과에 대한 씁쓸함을 참기 어렵다. 대전 엑스포는 우리의 행사인 만큼 세비야 엑스포와 적어도 대등한 건축의 축제이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기대와 희망을 산산히 부수어 놓은 결과는 누구의 책임인가? 정통성 없는 정권의 과시와 전시 행정의 무모함에만 원천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시간이 부족했다는 참여 건축인들의 변명도 너무나 진부하다. 대전 엑스포의 건축을 대하면서, 미래는 커녕 현재의 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으며, 비젼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요구된 큰 행사에 어쩔 줄 모르는 우리 건축계의 현실만을 재확인할 뿐이다. 또한 이처럼 무책임하고 나태한 행정부와 건축계의 폐품을 관람하고 이것이 국제적이고 첨단적인 것으로 속아 넘어갈 국민들이 애처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