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8.06.22.
출처
서울건설신문
분류
건축비평

천안에서 서산으로 가는 국도를 달리다 보면, 온양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왼쪽으로 3-4동의 하얀 건물들이 눈에 띈다. 이 건물들은 푸른 논 한 가운데 서있는 차라리 하나의 벽면들이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이들은 모두 신도리코 아산공장과 연관된 기숙사동과 본관 건물들로서 건축가 민현식의 작품들이다.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이 제1 기숙사동이고, 제2 기숙사동에 이어 본관건물이 완공됐다.
민현식은 이 건물군들을 설계하면서 땅-대지의 형상으로서의 건축을 실험한다. 대지 위에 군림하는 건축이 아니라, 대지가 원하는 형상의 잠재력을 잘 읽고 실현하려는 의도였다. 푸른 논 가운데 하얀 벽면이 하나 서고, 그 벽의 앞에 유리면을 만들고 그 안에 침실을 만들면 기숙사가 된다. 그 벽은 건축이기도 하고, 대지의 예술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선 두 개의 기숙사는 대지의 경관을 감싸안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새로운 대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복사기 등의 사무기기를 생산하는 신도리코 아산공장은 2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성장해 왔다. 기존 공장동과 창고들로 가득찬 공장 대지 내에는 여유가 없어서 기숙사도 떨어진 독립 대지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밀한 곳에 새 본관건물을 계획해야 했다. 남겨진 곳이라고는 얇고 길쭉한, 그리고 급경사에 서쪽으로 앉은 땅밖에 없었다.
작가는 기존 공장동 앞의 얇은 대지에 다시 얇은 벽면을 세웠다. 복도와 화장실 등 설비를 갖춘 얇은 벽체는 뒤의 공장동과 마주 보면서 새로운 마당을 만들었다. 벽체 앞으로는 다시 반은 직선이고 나머지 반은 곡선으로 마무리되는 앞벽을 세운다. 뒤벽과 앞벽 사이는 2개층이나 높이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는 4층이고 뒤에서는 2층인 건물이 됐다.
두 벽면이 만나는 부분을 넓게 파내어 내부이면서 외부인 묘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 부분은 본관의 반옥외 로비인 동시에 앞뒤의 외부공간을 수직적으로 이어주는 연결부이기도 하다. 2층 차이의 공간들을 계단으로 연결하여 오르내리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거울과 같은 폭포가 설치되어 이동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본관 건물에서 가장 공간감이 풍부한 중요한 곳이다. 민현식의 건축에서 중심 공간은 항상 비어있다. 비어있음은 무엇이나 담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풍요하다.
직선벽을 가진 부분은 2개층을 뚫린 시원한 휴게실-식당과 2층의 사무실 공간이고, 곡선벽으로 마무리진 곳은 강당과 회의실, 임원실들이다. 두 부분은 반옥외 로비 위에 설치된 브리지를 통해 연결된다. 브리지를 걸으면 마치 건물과 건물 사이에 놓인 육교를 건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이는 우연한 효과가 아니다. 실제로 건축가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건물을 설정했고, 앞뒤의 벽면이 이를 하나의 몸체로 통합한 것이다. 더 나아가 각 층의 공간들 역시 서로 별개의 건물들을 수직으로 적층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의 건물 같지만, 이 본관에는 적어도 4동의 개념적 독립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은 수평적으로는 브리지에 의해, 수직적으로는 중앙 반옥외 로비의 직선 계단에 의해 이어지고 통합된다. 이 건물이 비록 지방의 벌판에 서있기는 하지만, ‘도시적 건축’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건물의 구성방법에 있다. 위치는 전원이지만, 내부의 구성개념은 복합적이고 도시적이다.
서쪽으로 향한 면은 넓은 들판과 멀리 제1기숙사를 바라보는 경관이 탁트인 좋은 조건이었다. 건물은 서향을 할 수밖에 없었고, 오후에는 따가운 서향빛을 받아야하는 불리한 일조조건을 안고 있다. 서쪽 빛을 약화시키기 위해 크고 작은 루버가 등장한다. 이 건물의 전면을 이루는 유일한 형태 요소는 루버와 구멍뚫린 창일 뿐이다. 기능적 요구와 필요에 의해 형태는 저절로 결정된다. 따지고 보면 건물의 형태는 대지의 고저차를 이용하고 서쪽의 경관을 얻기 위해 건물을 굳이 서향으로 앉힌 선택의 결과였다. 민현식이 주장하는 바대로, 대지의 조건과 잠재력이 건물의 형상을 이루는 과정이었다.
합리적이고 규칙적인 골격체계, 군더더기 없이 절제되어 사용된 여러 요소들, 여러 단계의 회색을 주조로한 차분한 색채들. 이 점만 본다면, 이 건물은 철저하게 논리적이며 이성적이다. 그러나 이 논리의 그릇 안에는 외부의 전원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장치들이 있고, 무엇보다 내부-외부 공간의 긴장에서 빚어지는 감동이 있다. 이처럼 논리적이면서 아름다운 감수성을 던져주는 건축은 그다지 흔치 않다. 합리적이면서 지루하지 않고, 도시적이면서도 건조하지 않다.

김 봉 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