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5.10.01.
출처
국제교류재단 세미나
분류
건축역사

한국적 사유의 전개와 건축의 변화

건축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대지 위에 재현한 구조물이다. 건축의 전통이란 재료와 기술의 한계 속에서 그러한 생각들을 집단적으로 모으고 굳혀서, 오랜 시간 세대를 더해가며 인습적으로 전승한 것이다. 이러한 집단적 사유들을 건축적 사상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단일 영토를 가진 단일 민족의 나라이기 때문에, 흔히 건축도 사상도 단일할 것이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한국 사상의 전개 과정은 끊임없이 여러 갈래의 사상들이 유입되고 토착화하는 복잡하고 중첩적인 역사였다.
한민족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토착 신앙에서 출발하여, 샤머니즘과 도교와 결합하고, 불교를 수입하여 거의 민족 종교화 시켰으며, 유교와 성리학을 수입하여 사회 제도와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다.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의 종교와 근대적 사상을 수입하여 근대화와 국제화의 길을 달리기도 했다.
구석기 시대 한반도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은 70만 년 전부터 발견되고, 신석기 시대는 BC 10,000년부터, 청동기 시대는 BC 4,000부터 시작했다고 추정한다. 구석기 시대의 주술적인 원시 신앙에서 시작하여, 고조선이 형성되던 청동기 시대에는 이미 일정한 고대 신앙의 체계를 이루었다. 하늘과 산을 비롯한 여러 자연물을 숭상하는 애니미즘, 동식물을 종족의 수호신으로 믿는 토테미즘, 사후 세계를 믿는 영혼 숭배, 그리고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샤머니즘 등이 그 내용이었다. 이러한 토착 신앙을 풍류도(風流道), 신교(神敎), 무교(巫敎)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후 역사시대를 지나면서 토착 신앙은 도교나 불교, 유교 등 외래 종교와 결합하면서 한국 문화의 저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산악과 계곡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은 산악을 하늘로 통하는 우주목으로 신앙했고, 산신으로 의인화된 산악 숭배 사상을 낳았다. 산악 숭배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존중하고, 건축을 자연과 일체화하려는 중요한 전통을 낳았다. 전통적인 마을 입구에 세워진 당집들은 이러한 자연숭배 신앙의 지속적인 전통을 보여준다.
영혼 숭배 사상은 무덤을 죽은 자들의 집이나 신전으로 인식하여 분묘 건축의 발전을 가져왔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 한반도에는 전 세계 고인돌의 1/2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분묘 조성의 전통은 이후 역사시대에도 전승되었다. 신라 수도인 경주의 경우, 수만 기의 무덤들을 도시 한 가운데 조성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역이 혼재된 도시를 만들었다. 또한 동산과 같이 거대한 크기의 왕릉들은 평지에 세워진 건축물과 함께 경주의 독특한 풍경을 형성했다.
샤머니즘은 엑스터시(ecstasy) 상태에 빠진 무당[shaman]을 통해 신적 존재와 소통을 꾀한다. 많은 문화인류학자들은 한국 문화의 중요한 기질인 ‘흥’, ‘자유 분망함’, ‘무기교의 기교’ 등의 근저에는 샤먼적 엑스터시가 깔려있다고 파악한다. 건축의 경우 휘어진 부재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비대칭의 배치를 선호하는 등의 예를 이러한 사상적 전통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불교를 수입한 5세기부터 고려조가 멸망한 14세기까지 1,000년간 한국은 불교국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 불교의 도입이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고등한 철학과 사상을 도입하는 것이었고, 한자 문화와 함께 발달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여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또한 함께 도입된 선진적인 건축술은 국가적 차원의 불교 사원 건설을 통해서 국내 건축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2층, 3층의 대규모 목조 법당 건축기술은 물론이고, 80m 높이에 달하는 황룡사 9층탑과 같이 고층 건축술도 발달했다. 불교 건축은 규모의 거대화와 동시에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술의 발전도 가져왔다. 극락의 세계를 재현하듯, 정교한 조각과 회화 그리고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한 건축은 사찰 뿐 아니라 궁궐이나 관청건축에도 퍼져 한국 건축의 장식적 전통을 형성했다.
초보적인 유교 또는 유학은 삼국시대부터 유입되어 국가의 체제나 사회적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의 건국은 유교적 사상을 사회적 철학과 종교적 신앙으로 승격시킨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 왕조는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사회 체제 뿐 아니라 가치관 전체를 성리학의 규범으로 바꾸어 나갔다. 물질보다 관념을, 표상보다 본질을 강조했던 성리학적 체계는 건축을 규범화시키고 단순하고 절제된 미학을 추구했다.
건축 뿐 아니라 조형예술 전반에서 불교적 문화와 유교적 문화의 상반되는 경향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재현적이고 화려한 고려 불화는 추상적이고 단순한 성리학자들의 문인화로 대체되었다. 오묘한 색채와 정교한 문양으로 유명한 고려청자는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백자로 바뀌었다. 건축, 회화, 공예 등 모든 조형예술은 화려하고 정교한 것에서 소박하고 단순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불교적 예술이 유교적 예술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건축과 예술의 양상이었다.

불교적 건축 -부분완결적인 다양한 세계

불교 교리는 어느 종교보다 난해하고 광대하다. 고등철학에 가까운 이 교리들은 수천 종의 경전에 기록되어 있지만, 문자를 모르는 대중들에게 경전의 내용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불교는 원시 경전의 내용을 묘사한 본생도부터, 부처의 모습을 재현한 불상들, 그리고 화엄이나 밀교의 세계를 상징화한 만다라까지 수없이 많은 조형물을 창조하여 대중 포교의 방편으로 삼았다. 또한 고층 구조물인 불탑을 비롯한 독특한 건축 형식들을 창조해 신앙의 상징과 대상물로 삼아왔다.
불전이나 법당 건물은 불상을 봉안하는 거대한 포장물이며, 내부 공간은 부처의 세계를 재현한 불국토이다. 그 자체로 입체화된 교리이며 신앙의 대상물인 오브제(object)이다. 대중적 신앙의 오브제로서 건축물은 정교하고 화려하고 거대해야 했고,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장식적이어야 했다.
예를 들어 금산사는 두 개의 주불전을 갖고 있는데, 미륵전은 일어서서 설법하는 거대한 입상을 봉안하기 위해 3층의 수직적인 구조를 채택했고, 대적광전은 10여구의 좌상들을 나란히 배열하기 위해 단층의 수평적인 구조를 갖는다. 하나의 영역 안에 수직과 수평의 상반된 두개의 건물이 대조를 이루며 배치된다. 건축물 자체가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을 상징하며,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식에 대한 욕구는 불교건축의 태생적 본능에 가깝다. 높고 깊은 산속에 위치한 매우 작은 사찰인 성혈사 나한전의 예를 들겠다. 3칸 규모로 작고 초라한 법당이지만, 여기에 부착된 창문들의 장식은 화려하고 정교하며 사실적이다. 모든 창문의 창살을 연꽃, 모란, 그리고 민화풍의 조각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아무리 작더라도 장식을 통해 부처의 세계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한국에 정착된 대승불교에는 3,000에 이르는 부처들이 등장한다. 또한 수없이 많은 보살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각각 자신만의 불국토를 가지며, 우주는 삼천개의 세계로 이루어진 집합체이다. 그러나 각각의 불국토는 자체적으로 완전한 또 하나의 우주이다. 따라서 하나의 불전에는 한명의 부처가 존재하고, 하나의 불전을 에워싼 하나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교리적 원칙이 세워졌다.
고대에는 이 건축적 원칙이 잘 지켜졌다. 불국사에는 4개의 불전이 현존하는데, 각각의 영역은 회랑과 담장에 의해 독립적으로 구획되어 있다. 각 영역은 하나의 독립된 사찰이다. 불국사는 4개의 불국토, 다시 말해서 4개의 사찰이 집합된 대우주를 의미한다.
이러한 건축적 원칙은 불교시대인 고려시대에도 잘 지켜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교시대인 조선시대에 들어와 변화를 보인다. 대중적 지지를 위해서는 모든 부처와 보살의 영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교파의 구분 없이 수많은 불보살을 한 사찰에 모셔야했다. 하나의 사찰 안에 수많은 불전과 법당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의 불전은 하나의 불국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한명의 부처나 보살만을 봉안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사찰은 여러 개의 불전들로 이루어진 축소-통합된 우주를 의미하게 된다. 교리적 원칙은 변함없지만, 건축적 적용의 메카니즘이 변화된 것이다.
“티끌만한 먼지에 우주의 섭리가 담겨져 있다”는 경전의 내용은 곧 “부분이 곧 전체”라는 건축적 원리로 치환된다. 이는 비단 건축적 배치나 불전 조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조형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교리적 세계관이다. 이 원리에 따르자면, 건물 한동 한동이 독립된 완결체이며, 창문 하나, 문고리 하나도 완결된 완성품이어야 한다. 이로서 장식적 욕구, 공예적 기술, 오브제로서의 건축물의 성격 등이 ‘부분완결성’이라는 명제로 통합되게 된다.

유교적 건축 -질서와 통합의 세계

유교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세계는 상하 위계가 명확한 ‘종법적 질서’의 세계이다. 그러나 종법적 질서란 강압이나 폭력과 같은 야만적 수단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예(禮)’라는 이성적 판단과 ‘제(制)’라는 사회적 규약에 의해 지켜지고 발전하게 된다.
종법적 질서를 위한 예제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원리였고, 건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예컨대 고대 중국에서는 신분별로 대문의 수자를 제한했는데, “황제는 9개의 대문을, 제후는 5개, 공경대부는 3개, 평민은 1개의 대문을 둘 수 있다”고 했다. 또 오래된 예법서인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는 제왕의 도시를 만드는 원칙이 규정되어 있고, 2,500년 후 조선왕조가 수도를 계획할 때에도 이 예법의 근간이 지켜졌다. 성리학적 예제를 따랐던 경복궁의 경우, 중심축이 명확하고 앞뒤 위계가 명료한 건물들을 대칭적으로 배열했다.
조선시대 공립학교였던 향교는 전국에 230여개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들의 건축적 형식은 5가지로 분류될 정도로 규범적이다. 지방의 향교들은 서울에 있는 성균관의 축소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유교적 지식인들은 세계는 표상과 진리의 세계로 이루어진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졌고, 눈에 보이는 표상의 세계는 허위이며, 그 속에 감추어진 진리의 세계야 말로 도달해야할 이상이었다고 믿었다. 건축물이나 예술품 또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을 담아내는 형이상학적 도구로 인식했다.
유학자들은 누각과 정자들을 많이 세우고 소유했다. 이 건축물들은 자체의 완결된 기능을 갖기 보다는 자연 풍경을 담아내기 위한 커다란 그릇이었다. 누각과 정자는 기본적으로 비어있고 외부에 대해 개방된 건축 형식이다. 보길도 정원의 세연정이나 서석지 정원의 정자에 오르면, 자연과 정원의 풍경이 비어있는 정자 안으로 가득히 들어온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어떤 벽면도 없이 툭 터지고 텅 비어 있는 건물이다. 길쭉한 7칸의 누각은 어떤 실용적 기능도 담을 수 없는 쓸모없는 건물로 보이지만, 누각에 올라보면 앞산과 강물의 풍경이 마치 여러 폭의 연속 그림과 같이 펼쳐진다. 누각 자체는 어떤 상징도, 감상의 대상도 될 수 없지만, 자연과 인간 사이를 결합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성리학자들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세상만사를 ‘중요한 것 [본本]과 지엽적인 것 [말末]’로 구분한다. 이 본말론에 의하면 건축의 쓰임새가 ‘본’이고, 건물의 생김새는 ‘말’이다. 장식이나 색채나 현란한 재료 등은 말초적인 것으로, 본질을 흐리는 장애물이다. 유교시대 예술은 형식미보다는 정신미의 측면에서, 외형적 거대함이나 화려함보다는 추상적이고 의미적인 측면에서 발전했다.
소수서원은 성리학적 엘리트들을 배출하기 위해 한국 최초로 설립된 사립대학이다. 이 서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한국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에 대한 제사 행위이다. 그처럼 중요한 제사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전사청(제물을 마련하고 보관하는 곳)은 3칸의 작고 초라한 건물에 불과하다. 아무런 채색도 장식도 없고, 휘어진 부재를 그대로 사용한 무심한 건물이다. 제사를 드리는 정성과 예법이 중요하지, 건물의 생김새에 무슨 가치가 있으랴?
성리학의 이상적 인간은 깨달음을 얻은 인간 곧 ‘군자(君子)’였다. 군자는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군자에 의해 재조직되는 주체적 영역이다. 주인인 인간은 항상 건축물의 내부에 있다. 내부에 있는 군자에게 밖에서 보이는 건물의 외형이나 장식, 색채는 의미가 없다. 오로지 안에서 바깥의 경치를 선택하고 바라보는 구조이다.
도동서원은 북쪽에 있는 산을 앞산으로 선택하여 중심축을 정하고 건축물을 배열했다. 배열된 건물들의 모습이 앞산의 뾰족한 형상을 닮은 것은 물론이며, 중심건물인 강당은 원장이 앉아서 앞을 내다보는 풍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틀이 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은 자연을 주체적 인간이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 중심의 자연으로 조직한다는 적극적인 세계관을 의미한다. 건축이란 옷과 같이 인간을 보호하는 쉘터이며, 자연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성리학적 건축은 종종 장식과 형태가 소거된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갖는데, 그것은 건축이 목표로 하는 미학적 양식이 아니라, 성리학적 인식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여러 갈래의 사상적 물줄기들

한국의 산사들은 ‘능가산 개암사’와 같이 절 이름 앞에 산 이름을 붙인다. 이 경우의 산은 사찰이 기대고 있는 뒷산이다. 서원도 산 이름을 따른 명칭들이 있다. ‘병산서원’이나 ‘옥산서원’이 그 예인데, 이 때 병산과 옥산은 각기 서원에서 바라보는 앞산의 명칭이다. 명칭 상으로도 불교건축은 뒷산이, 유교건축은 앞산이 중요한 산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불교와 유교의 상반된, 중요한 시각적 속성이 숨어있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건축은 신앙적, 감상적 오브제가 되어야 하며, 일반 신도들은 늘 불전 건물의 정면을 쳐다보게 된다. 건물과 중첩되어 나타나는 뒷산 역시 건축의 배경으로서 매우 중요한 대상물이 된다. 반면,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주체적 인간은 건물 안에 자리 잡게 되고, 그는 늘 내부에서 앞을 바라보게 된다. 그에게는 앞산의 경관이 시야에 들어올 뿐, 자신이 기대고 있는 뒷산은 인식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불교건축은 외부적 경관 (off-site view)으로 인식되며, 유교건축은 외향적 경관 (on-site view)으로 인식된다.
이는 단지 사찰이나 서원같이 종교적 건축에만 적용되는 경관 구조는 아니다. 불교시대인 신라와 고려의 건축은 전반적으로 외부적 경관구조를 따르며, 성리학 시대인 조선의 건축은 많은 부분 외향적 경관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건축물은 외부 형태의 비례나 완결성, 색채와 장식 등이 중요한 건축적 요소가 된다. 반면, 조선시대에 세운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정자와 누각, 그리고 상류층의 살림집들은 앞에 보이는 선택된 경관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축적 기준으로 작용한다.
건축은 흔히 공간적 비움과 형태적 채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어느 건축이든 두 가지 요소는 다 가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불교건축은 채움이, 유교건축은 비움이 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건물들로 둘러싸인 외부공간인 ‘마당’은 조선시대 건축물들의 중요한 공간이다. 건물에서도 채워진 방보다는 비어있는 마루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불교건축과 유교건축은 그 세계관이 달랐다. 경제적 조건과는 무관하게 각기 건축에 대한 정의가 달랐고, 추구해야할 목표가 달랐던 것이다. 다르다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와 유교의 세계관은 어찌 보면 매우 상반되는 것이며, 이 상반된 세계관을 수용하다보니 결과적으로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한국건축의 역사라는 도도한 강의 흐름을 밖에서 본다면, 한국의 건축은 모두 목조 뼈대와 기와지붕을 가진 하나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강물 속에 몸을 적시며 체험적으로 관찰한다면, 토착적인 세계관의 바탕 위에서 불교적 건축과 유교적 건축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한 줄기가 약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두 줄기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부드럽게 섞이기도 하면서 건축의 역사를 구성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