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자가 수학한 1991-92년까지의 체제와 현황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이 학교는 현실의 변화에 대단히 민감히 반응하며 건축적 변화를 선도하는 경향이 짙으므로, 불과 몇년 후인 현재의 내용은 대폭 바뀌고 있는 중이다.
1. 학교의 개요
흔히 런던의 AA스쿨로 소개되는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건축협회 부설 건축학교 (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 of Architecture)이다. 건축협회는 1847년 발족하였고, 당시 유럽사회는 정치적으로 전제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경제적으로는 본격적인 산업자본주의로 재편되는 혼란기였다. 특히 건축계는 르네상스 이후 3세기를 지배해 온 팔라디오와 고전주의 양식에서 벗어나려는, 이른바 근대건축적 맹아기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런던의 건축가들은 “진보와 자유”를 지향하는 건축협회를 결성하여, 강연 전시 출판을 통해 진보적인 건축운동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초기에는 학교라기 보다는 운동단체의 성격이 농후하였고, 특별 강연회 등의 비정규 프로그램으로 교육적 효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이러한 순수 민간의 비정규성, 비제도성의 전통은 아직까지도 이어져서, 80년대 초 런던의 모든 대학을 통폐합하여 거대 런던대학으로 재조직하는 대학 개편의 와중에서도 그 독자성을 지켜왔다. 그 반대 급부로 빈약한 재정과 높은 수업료, 이에 따른 내국인 학생수의 감소 등을 대가로 치루고 있지만.
잘 알려진대로 이 학교는 건축설계를 중심으로 하는 디자인 스쿨이다. 정규 학제를 거부하기 때문에, 학사학위를 수여하지 못하고 디프로마 과정만을 개설할 수 있는 불리한 여건에 있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현재 디자인 학교는 5년제로 운영하며, 1학년에 3개 스튜디오, 중간학년에 7개 스튜디오, 졸업학년에 11개 스튜디오를 열어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다. 타 대학의 학부에 해당하는 디자인 디프로마 과정은 철저하게 설계 프로젝트 수행을 위주로 한다. 설계에만 학점이 부과되며, 여타의 강의과목은 일체의 과제나 부담없이 자유로운 청강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디자인 과정에는 이론과 역사적 지식을 위한 아래의 보조과목들을 개설하고 있다.
근대건축개론사물 보기팔라디오와 팔라디오주의
미국 현대미술건축의 본질건축적 이념에 대하여
파울 끌레건축과 미술관현대 프랑스의 공공주거
이 가운데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과목으로는 <근대건축 개론>, <사물 보기>, <미국현대미술> 등이다. 캠브리지 대학 교수를 겸하고 있는 니콜라스 부록이 담당하는 <근대건축 개론>은 1752년 로지에 부터 1935년 기디온과 펩스너의 근대건축론 까지 20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강의는 슬라이드를 이용한 매우 집약적인 내용들이며 단기간에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의장론에 해당할 <사물 보기>는 “전망”부터 “공허”까지 25개의 매주 다른 주제별로 연속강좌를 시행한다. <미국현대미술>은 “미술과 재현”, “미;술과 죽음” 등 현대작가들의 중심테마를 강의한다.
AA 스쿨의 특이한 강좌로는 일반에게도 공개되는 야간강좌가 있다. 저녁시간에 특별 강연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강좌에는 “단편들”, “뻬리뻬뤽의 뒤안”, “위험과 위반”, “정교함”, “감각적 공간의 대상화” 등 매우 추상적인, 그러나 매우 실재적인 주제의 강연들이 행해진다.
2. 대학원의 역사이론 과정 ; 학생과 선생
AA스쿨의 대학원은 환경에너지 과정, 역사이론 과정, 주거문제 과정의 3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실무와 설계를 중시하던 AA 스쿨에 대학원의 이론과정이 개설된 것은 1974년이다.
특히 1979년에 개설된 역사이론과정은 당시 영국건축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팀텐을 주도하던 영국의 건축계는 70년대 팀텐의 몰락의 원인을 “이론의 부재”에서 찾았고, 영국건축의 회생을 위하여 “실천적 이론가”를 양성할 교육과정을 원하게 되었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건축저술과 비평의 수준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는 실천적인 설립목적을 내세웠고, “건축은 자체의 전통과 사회의 문화적 맥락과 더욱 광범위한 교류를 가져야한다”고 방향을 세웠다. 따라서 사회 사상과 철학을 근본적인 건축의 동인으로 취급하고, 제 인문학적 바탕을 강조하게 되었다. 개설 당시부터 1992년까지 대학원장으로 재직해 온 란도(Royston Landau) 역시 순수 역사가가 아니라, 설계 실무와 현대 건축비평에 다양한 경험을 가진 실천가였다. 그는 비록 독창적인 이론가는 아니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하고, 교육의 방향을 잡아가는 유능한 조직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앞서 말한대로 이 학교는 정규 대학이 아니므로 자체 학위를 수여할 수 없다. 따라서 MPhil.이나 PhD.의 학위는 <국가 학위 수여위원회>의 인가를 받아 운영한다. 또한 국가의 재정보조가 일절없이 순수하게 등록금 만으로 운영되는 학교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준의 등록금을 받고 있다.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영국학생들은 감히 지원할 엄두를 못내고, 학위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아시아권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없다. 또한 아직은 AA 스쿨 내에서도 디자인 디프로마 과정의 명성에 밀려,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 캐나다 학생들에게는 명성이 높아서 학생구성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매년 역사이론 과정의 입학생이 10-20명에 이르고 있지만, 14명이 수학한 91년의 경우만 하더라도 영국학생은 전무하고 필자를 제외한 전원이 EC와 미주인들이었다. 학생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하고 4-5년의 건축 실무 혹은 연구의 경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당시 33세였던 필자가 중간 정도의 나이였다. 학생 뿐 아니라 주요 교수진도 란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국 이외의 유럽인들이어서 매우 국제적인 분위기였다.
상근하는 전임 교수진은 책임자인 란도와 반디니 (Micha Bandini)와 조교격인 코로리자 (Gordana Korolija) 3인 뿐이다. 비상근 전임교수로 허스트 (Paul Q Hirst)와 리챠드슨(Margaret Richardson) 그리고 <근대건축 개론>의 부록 정도이다. 반디니는 로마 출신으로 타이폴로지를 전공하였고, 로씨와 타푸리의 열렬한 옹호자이다. 그녀는 역사와 이론을 건축 실무와 동일한 차원에서 건축역사와 이론을 구축할 방법론의 창출을 강조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 출신인 코로리자는 알베르티와 팔라디오의 전문가이다. AA의 졸업생인 그녀는 학생들의 조교로서 또 성실한 교육자로서 인기가 높다. 허스트는 버벡대학의 경제학부장을 겸임하고 있는 사회철학자로서 역사이론 과정의 철학 부분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푸코와 데리다의 전문가로 디컨스트럭션 건축의 이론 조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리챠드슨은 죤 스완 박물관의 큐레이터로서 건축 드로잉 분석과 년대기적 건축사의 전문가이다.
강의와 세미나는 매주 주제에 맞추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진행하기 때문에, 한학기에 만나는 강사진은 줄잡아 30여명에 이른다. 그들은 알리슨 스미슨이나 세드릭 프라이스와 같은 유명 건축가, 제임스 엑커만 등의 역사이론가들을 위시하여, 거리의 철학자나 무명의 최근 학위자들까지 광범위한 계층으로 구성된다. 특히 기억에 남는 강사로는 레이너 밴험의 부인인 메리이다. 현대건축 드로잉의 수장가로도 유명한 그녀가 담당한 강좌는 “60년대 영국건축”이었는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자한 할머니와 같이, 당시의 건축계 상황과 인물들의 역사를 담담하게 풀어나갔다.
1991년 오랫동안 AA를 이끌어 온 알빈 보야르스키가 재정 기여를 청탁하러 갔던 일본에서 급서하고, 92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알란 발포아가 AA의 학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뉴욕 출신의 건축가들과 이론가들을 대거 끌어 들였고, 그 대표적 인물이 킾니스 (Jeffrey Kipness)로 대학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란도와 반디니 들은 오히려 미국의 대학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 소수이던 영국인 교수진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학교의 위치만 런던일 뿐, 학생도 선생도 심지어 행정요원까지도 영국 바깥의 외국인들로 구성되었다.
3. 역사이론 과정의 체제와 학문적 경향
대학원은 대개 1년제 디프로마 과정, 2년제 명예 디프로마 과정, 그리고 석박사 학위과정의 4부류 학생들로 구성된다. 실재로 강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1년제 디프로마 과정이며, 여타의 과정은 영국적 전통인 지도교수와의 개별지도 (tutorial)를 거쳐 논문작성으로 완성된다. 실재로 1년제 과정에서 논문을 제출하고 디프로마를 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개 2-3년 씩으로 기간이 연장되며, 아직 역사이론과정의 석박사 학위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 학교의 성격대로 학위보다는 철저한 훈련이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역사이론 과정의 교육 방침은 실천적 이론가를 훈련하고 배출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각종 이론의 섭렵과 이론적 글쓰기 훈련에 역점을 둔다. 교과과정은 강의와 세미나 워크샾, 개별지도 등으로 구성되며, 그 가운데 <세미나및 워크샾>이 핵심과정이다. 학점이 부여되는 과목은 세미나 뿐으로, 디자인 디프로마 스쿨의 설계에 해당하는 과목이다. 1,2학기의 매주 세미나에서 통과해야 3학기 때 논문 쓸 자격을 얻기 때문에 모든 학생의 필수과목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강의들은 세미나를 위한 보조적 성격이 짙고, 일체의 과제나 의무가 없이 강의와 토론으로 이루어진다.
세미나는 학기당 8-9주제를 정해서, 매주 주어진 텍스트를 읽고 주어진 문제에 대한 에세이를 작성하고 평가 토론한다. 에세이는 전체 학생이 작성하여야 하고, 발표 2일전에 제출하여 전문가의 평가를 받기 때문에, 실재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1주당 5일 뿐이다. 텍스트로 매주 당 1-3권의 원전이 부여되기 때문에 영어권 학생들도 에세이 작성에 3-4일씩 밤샘에 시달린다. 91-93년 3년간 시행된 세미나의 주제와 텍스트는 아래와 같다.
1. 비트류비우스, The Ten Books on Architecture
2. 알베르띠, De Re Aedificatoria
3. 세를리오, The Five Books of Architecture
4. 팔라디오, The Four Books of Architecture
5. 챨머와 과학,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
6. 푸코, The Archaeology of Knowledge, Michael Foucault
7. 데리다, Positions, Deconstruction
8. 료따르, The Postmodern Condition
9. 러스킨,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Artisans and Architects
10. 하워드, Garden Cities of Tomorrow, The Building of Satellite Towns
11. 로스, Spoken into the Void, Adolf Loos
12. 긴즈부르그, Style and Epoch
13. 꼬르뷔제, Towards a New Architecture, City of Tomorrow
14. 팀 텐, Team 10 Primer
15. 비트코버, Architectural Principles in the Age of Humanism
16. 콜린 로우, The Mathematics of Ideal Villa
17. 로씨, The Architecture of the City, Aldo Rossi,
Typology as a Form of Convention
2년제 명예디프로마 과정과 석박사 학위과정의 학생들은 별도의 매주 세미나에 정기적으로 참가하여, 역시 소논문들을 발표하고 평가받는다. 여기서는 주제를 학생 스스로 정하고, 발표를 위하여 여러 차례 지도교수의 개별 지도를 받는다.
1년제 과정의 5-8주에 걸쳐있는 세미나 주제들은 소위 디컨스트럭션 철학을 다루고 있다. 인문계 학생들에게도 어려운 이 주제를 소화하려면, 주어진 텍스트 말고도 여러가지 입문서와 개설서들을 읽고 이해해야하는 부담이 있다. 90년대 초반 역사이론과정의 핵심적 경향은 바로 이부분이라 보여진다. AA스쿨은 렘 쿨하스와 자하 하디드 등 디컨스트럭션 건축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디자인 디프로마 스쿨의 대부분 작품 경향이 디컨스트럭션 등 전위적인 실험작들이며, 대학원의 역사이론과정은 이러한 경향들을 이론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하는 내용에 중점을 두었다. 이른바 “이론과 실천의 상호교환성”은 학교 내부에서도 구현되고 있다.
역사이론과정에는 세미나 외에도 몇개의 핵심과목들이 있다. <건축이론I>은 과학과 지식, 생산과 수용, 상대주의 등의 문화와 건축에 대한 담론들을 강의하며, <건축이론II>는 현대미술의 역사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과, 타푸리와 팀텐의 실천적 이론, 역사의 생산 등 현대건축 이론의 쟁점들을 다룬다.
이 과정의 철학 지향성을 강렬히 선도하고 있는 <주요한 철학들>은 두학기에 걸쳐서 흄과 칸트부터 데리다와 료따르까지 강의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철학사의 순서를 뒤집어 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 등 20세기의 철학을 먼저 강의하고, 헤겔 프로이드 등 19세기는 나중에 강의한다. 이 과정의 현재 지향성을 극명하게 알 수 있는 체제이다.
<역사 속의 건축이론>도 핵심강의 중의 하나이다. 비트류비우스 알베르띠 팔라디오 등 고전적 이론과 죤스 렌 혹스무어 등 영국고전이론, 19세기의 영국 프랑스 독일의 진보이론, 러시아 전위파들, 꼬르뷔제, 바우하우스, 팀텐, 디컨스트럭션의 이론으로 이어진다. 각 강의 주제는 역시 많은 전문학자와 이론가들에 의해 자세하고도 핵심적으로 강의된다.
죤 스완 박물관과 협동으로 운영되는 <건축적 기록들>은 역대 건축가들의 드로잉을 시대별로 분석하는 강의다. 이외에도 파노프스키나 곰브리치와 같은 워벅의 역사가들, 절대주의, 17-19세기 프랑스 건축이론, 기디온의 근대주의적 미학론 등이 특별강연으로 구성된다. 학부과정의 이론강의들과 합친다면 평일 매일 낮과 밤에 강연과 강의가 실시되고 있다.
1993년에 대학원장으로 제프리 킾니스가 부임하여, 역사이론과정의 학문적 경향도 변화를 겪는 중이다. 킾니스는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론 비평가로서 피터 아이젠만 등 디컨스트럭션 계열의 건축가들의 이론적 배경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90년대 초 AA스쿨의 이론적 경향과 맥을 같이하고 있으나, 미카 반디니 등의 타이폴로지와 영국의 전통주의는 배척을 당했다. 더욱이 킾니스는 “디컨스트럭션은 종말을 고했고, 디포메이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다. 그가 말하는 디포메이션의 전말을 알기는 어렵지만, 그 이론의 배경이 프랑스 철학으로부터 정치학과 사회학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A 대학원의 역사이론과정은 학자를 양성하는 곳은 아니다. 이 곳의 목표는 실천적인 비평가, 이론가, 건축가를 훈련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교수진 역시 뛰어난 학자들은 아니고, 교수진에 의해 학풍이 형성되는 곳도 아니다. AA스쿨 전체가 추구하고 있는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건축”을 위하여 그 배경적 이론들을 교육하고 창출하는 곳이다. 따라서 특정한 학맥을 구축하기 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매우 빠른 변화를 겪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