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개성에서 새 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시급하게 새 왕도로 수도를 옮길 것을 명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서울, 한양이 수도로 결정되었지만, 즉시 천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조가 옮겨갈만한 기반시설을 우선 마련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왕도가 되려면, 성곽과 궁궐, 그리고 종묘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종묘의 건설이 가장 시급했습니다. 1395년, 종묘를 완성하자마자 태조는 한양 천도를 단행했는데, 아직 궁궐인 경복궁이 공사 중인 시점이었습니다. 도대체 종묘가 무엇이기에 왕의 거처인 궁궐보다도 먼저 지은 것일까요? 왜 종묘가 왕도의 제일 조건이 된 것일까요?
종묘는 역대 임금들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적인 사당입니다. 유교를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은 무엇보다 왕조의 정통성을 입증할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연 최초의 임금입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르면, 왕이 될 수 있는 제일의 조건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태조는 태생적 명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4대조까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목조 -익조 -도조 -환조라는 왕계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을 종묘에 봉안함으로써, 태조는 원래부터 있었던 이씨 왕조의 정통적인 후계자임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입니다. 종묘는 조선 왕조가 “뿌리 깊은 나무”이자 “샘이 깊은 물”임을 입증하는 매우 강력한 건축적 증거입니다.
3,000년 전, 중국 주나라 때 예법을 기록한 <주례>에는 왕도가 되려면 궁궐의 좌측에 종묘를, 우측에 사직을 설치해야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도 그 예법에 맞추어 경복궁의 좌측인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건설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조선 왕조는 유교적으로 손색이 없는 문명 국가가 된 것입니다.
종묘는 처음에 7칸으로 건설했습니다. 태조의 4대조의 신위를 한 칸씩 봉안하고도 3칸이 남았지요. 그러나 4대 임금인 세종은 자신이 들어갈 공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유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례는 제사이고, 그만큼 제사에 대한 예법도 까다롭습니다. 세종 때에 격렬한 논쟁들이 벌어집니다. 오래된 선왕들의 신위를 옮기고 공간을 비우자는 주장부터, 건물을 늘리자는 주장까지 갖가지 논쟁에 휩싸입니다. 결국 새로운 사당을 옆에 짓고, 추존왕들의 신위를 옮기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6칸으로 새로 지은 사당을 영녕전이라 부르고, 기존 사당은 정전이라 부릅니다. 이처럼 두 개의 사당을 가진 종묘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조선식 예법을 실현한 것이지요.
왕조가 계속되면서, 종묘에 대한 고민 역시 계속되었습니다. 늘어나는 왕들의 신위에 맞추어 종묘의 건물도 늘어나야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종묘 정전은 7칸에서 11칸으로, 다시 15칸을 거쳐 19칸으로 늘어났습니다. 영녕전은 6칸에서 12칸, 16칸으로 늘었습니다. 자라나는 건물, 늘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형태 – 이것이 종묘의 묘한 매력입니다.
현재 정전의 태실은 19칸, 영녕전은 16칸으로 총 35칸의 태실이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조선조에 재위한 임금은 27명이고, 그나마 연산군과 광해군은 정식 왕이 아니라 해서 종묘에서 빠져 25명입니다. 나머지 10칸에는 창건 때 모신 태조의 4대조, 그리고 사도세자나 효명세자와 같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들을 왕으로 추존하여 모시고 있습니다.
정전은 영녕전보다 위계가 높은 사당입니다. 정전에는 주로 재위 기간이 길어서 업적이 뚜렷한 임금들이 남았고, 영녕전에는 추존 임금이나 재위 기간이 단명했던 임금들을 모셨습니다. 건물 역시 차이가 납니다. 정전은 19칸의 태실들이 하나의 지붕 아래 건설되어 매우 육중한 느낌이지만, 영녕전은 가운데 4칸의 지붕이 높고 좌우로 6칸씩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좀 더 친근한 느낌입니다. 건축적으로 말한다면, 정전은 기념비적인 스케일을 가지고 있고, 영녕전은 인간적인 스케일의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건물이 늘어난 방향도 다릅니다. 정전은 서쪽 7칸으로 시작해서 동쪽으로 계속 늘어났지만, 영녕전은 중앙의 6칸에서 좌우로 늘어난 것입니다. 얼핏 보면 비슷한 두 건물이지만, 미묘한 격식의 차이를 두어 두 건물의 위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건물을 떠받들고 있는 기단과 계단 등, 석재의 모습도 다릅니다. 정전의 석재는 거칠게 다듬었고, 불규칙하게 마당을 깔았지만, 영녕전의 것들은 좀 더 섬세하게 다듬고 규칙적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위계가 높은 것일수록 섬세하고 장식하고 가공할 것 같은데, 종묘는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축적으로 비유하자면, 정전이 과묵하고 무표정한 건물이라면, 영녕전은 말과 표정이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침묵이 웅변보다 강하다는 유교적 덕목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평가합니다.
종묘의 정문을 들어서면 건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앞으로 길게 뻗어난 특별한 길만 보일 뿐입니다. 하나의 길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3개의 길이 합쳐진 것입니다. 가운데 길은 신도라 하여, 제사 때 조상신을 상징하는 향로가 지나는 길입니다. 좌우에 난 길은 어도라 하여 왕과 세자가 밟는 길입니다. 신도와 어도는 합쳐지기도 하고, 나눠져서 다른 대문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또 이 길들은 가다가 네모난 판을 만나기도 합니다. 길을 따라 가다가 네모난 판을 만나면 정지해서 일정한 의례를 행해야 합니다. 종묘의 신도와 어도를 따라가면, 제사의 순서를 알 수가 있고, 의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종묘의 건물들은 숨어있고, 모든 것은 어도와 신도의 지시에 의해 진행됩니다. 그래서 종묘를 ‘길의 건축’이라고 하고, 직설적인 건물을 감추고 있는 은유의 건축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신도와 어도는 휘어지고 꺽이고 돌아갑니다.
빠른 길은 길이 아닙니다. 적어도 조상에 대한 숭고한 제사를 지내는 종묘에서는 돌아갈수록, 느릴수록 좋은 길입니다. 마치 침묵하는 정전이 웅변하는 영녕전보다 위계가 높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외국의 학자와 건축가들은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칭송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서양 문화의 원천이듯이, 종묘는 동양 정신의 결정체라는 칭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