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2.09.10.
출처
미확인
분류
건축문화유산

802년 순응대사가 가야산 골짜기에 화엄 가르침의 전당을 세운지 1200년 동안, 해인사의 건축은 몇차례의 전기를 겪어왔다. 신라 때에는 신라왕실의 북궁으로 활용될 정도로 왕실사찰로서 최고의 격을 갖추었고, 나말려초의 격변기에 화엄종 북악파의 본산으로 새 국가 건설에 일조를 하기도 했다. 1399년 고려 팔만대장경을 봉안하면서부터 법보종찰의 면모를 갖후었고, 1세기 후인 1488년에는 대중창기를 맞이했다. 이때 장경판전이 완성되고 대적광전과 불이문, 그리고 26동의 승방들이 건설되었다. 그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국보 중의 국보인 장경판전 일곽 4동이다.
다른 전각들은 19세기 초, 큰불로 소실되어 1817년에야 대적광전과 구광루를 중건했다. 아마도 이때는 재정이 미약하고 시일이 촉박하여, 원래 2층 건물이었던 대적광전을 단층으로 중건할 수밖에 없었다. 해인가람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던 것은 1892년 국운이 쇠해가던 서글픈 시절에, 명성황후 민비의 후원으로 홍경전 (현 경학원) 일곽이 확장된 때다. 민씨가문 일족 뿐 아니라, 국운의 흥성을 기원하는 일종의 원당이 섬으로써 가람은 더욱 다양한 영역들을 확보하게 된다.
20세기 말미에 벌어진 일대 중창 불사는 해인사 건축의 새로운 장을 연 사건들이었다. 낡은 구광루를 헐고 새로운 우람한 구광루로 대체하고, 승방들을 넓히고, 짜리몽땅했던 대적광전의 지붕을 보기 좋게 고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입적하신 성철스님의 사리탑(부도)를 현대적인 모습으로 건설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홍류동 어귀에는 철골조의 성보박불관을 열어서 미래지향적인 건축적 의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가람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이 한때는 융성하고 어떨 때는 쇠락하는, 그래서 항상 변화하는 건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체가 세월을 거듭하며 진화를 하지만 암과 같은 돌연변이 병에 걸리기도 하듯이, 당대에는 큰 발전이라고 생각하여 이뤄낸 건축적 변화가 긴 역사의 틀에 넣어본다면 진화의 방향을 거꾸로 거스르는 거대한 잘못일수도 있다. 또한 세월에 따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그런 불변의 가치를 생명체에서는 유전이라 하고, 건축에서는 전통이라 부른다.
일주문에서 봉황문까지 전개되는 진입로는 대단히 감동적이다. 두 문 사이를 잇는 좁고 긴 길은 곧게 뻗어있고, 길의 바닥은 위로 갈수록 말려있다. 마치 곱게 말아 놓은 양탄자 뭉치를 길게 펼치면 평평하게 펼쳐지다가 끝에 가면 말려 올라가는 모습과도 같다. 길 양옆에는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곧고 큰 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서 자연적인 벽을 이루고, 이 높고 긴 벽들은 진입로를 실제 이상으로 더욱 깊게 느끼게 한다. 자칫하면 깊은 길이 때문에 이 길을 가기를 두려워하기 쉽지만, 끝이 말려 올라간 길은 어서 빨리 올라오라는 환영의 메시지를 전한다. 마치 힘든 구도의 길에 자발적으로 입문하는 수행승과도 같은 길이다.
봉황문을 들어서면 나타나는 입체적인 구도도 잃어서는 안될 명장면이다. 오른쪽에 치우쳐서 아담한 국사단 건물이 서있고, 왼쪽으로는 위의 해탈문으로 향하는 계단이 뻗어있다. 국사단은 가람의 토지신을 모신 건물이어서 불국토의 안으로 들어갈 수도, 밖에 있을 수도 없는 애매한 신분이다. 봉황문 안은 가람의 내부이지만, 해탈문 바깥은 외부이기도 하다. 이 공간적 경계에 국사단을 세운 탁월한 교리적 해석도 일품이지만, 그 수평과 수직의 조화, 정과 동의 혼융은 뛰어난 건축적 안목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장경판전들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마당이 없다면 가치가 반감될 것이다. 기다란 두 건물들이 앞뒤로 나란히 놓이고 그 사이에는 폭이 넓고 깊이가 얕은 생소한 마당이 생긴다. 이 이상한 비례의 마당 모습은 전국에서 단 하나 뿐이며, 경판전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무형의 송풍기가 된다. 그 모습도 유일하지만, 그 기능도 대단하다. 1970년대 대장경판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경판전과 똑같은 건물을 가람의 동쪽에 지었지만 실패한 적이 있다. 그 실패의 이유는 건물만 지었지 마당을 만들지 못했던 데에도 있다.
장경판전의 축대 위에서 내려다 보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생긴 전각들이 각각 존재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들의 바다가 나타난다. 마치 개별상들이 모여 총상을 이루는 화엄의 원리를 건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대적광전이나 나한전이, 승방 한동이 소중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전체상이 더욱 소중한 해인 가람의 본질이다.
본 절 안 건물들이 치밀한 조화의 관계망을 이루는 것 같이, 가야산 일대에 펼쳐져 있는 암자들 역시 거대한 인드라의 그물과도 같다. 비록 하나하나는 독립된 암자요 건물인 것 같지만, 본 절에서 뻗어나간 보이지 않는 뿌리의 끝에서 피어난 꽃들과도 같다. 그 하나하나의 꽃도 중요하지만, 가야산이라는 거대한 꽃다발이 더욱 감동을 준다. 건물에서 가람으로, 본 절에서 전체 암자로. 알면 알수록 신비해지는 것이 해인 가람건축의 매력이다.
이상이 꼭 지켜야할 5가지 건축의 가치라고 한다면, 꼭 고쳐야할 부분도 있다. 구광루 일대를 중건하면서 진입동선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는 구광루 밑을 지나 대적광전 마당에 오르는 이른바 ‘누하진입’의 극적인 과정을 즐길 수 있었는데, 새 구광루는 아래를 다 막아버려서 옆에 마련된 공식적인 계단을 돌아 오르게 되어있다. 바뀐 진입동선의 권위적인 엄격함도 싫지만, 무엇보다도 대적광전 마당의 구조와 맞지 않는 불구가 된 점이 큰 문제다. 마당에는 아직도 한쪽에 치우친 바닥 돌길이 나있고, 석탑도 정중앙이 아니라 조금 동쪽으로 치우쳐 서있다. 모두가 이전의 누하진입 동선에 맞추어진 구성이었다.
경학원 앞에는 사대부가의 행랑과 같은 건물이 있었고 그 가운데 수월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 순박한 건물들은 철거되고 우람한 승방과 담으로 대체되었다. 건물은 살려졌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가람 일부분의 조화가 사라져버렸다. 모두가 80년대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중창불사 과정에서 빚어진 오해와 퇴행이다.
꼭 옛날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건축이다. 누하진입의 구광루나 민간건물과 같은 수월문에도 꼭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건축을 사라지게 한 것은 인연을 부정한 것이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지 않은가? 그 원인을 언젠가는 되살려야 한다. 이 건축적 연기법이야말로 1200년 해인가람의 건축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