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학창시절 한번쯤 수학여행을 가신 곳이라 잘 아는 곳이라 생각하시겠지만, 1,300년 전 이들이 완공될 때의 상황은 지금이랑 너무나 달랐습니다. 당시 경주는 178,000여 호의 가구가 사는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거대도시였습니다. 지금의 인구비례로 따지면 거의 1,500만 도시인 셈이지요. 8세기 경, 전 세계를 통틀어 100만 대도시는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사라센제국의 바그다드, 그리고 당나라의 장안 정도였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때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직접 나서서 30여년간 국력을 동원해 지은 국가적 사찰이었습니다. 이런 국가적 사찰을 왜 하필 토함산 기슭 외진 곳에 지었을까요? 지금은 불국사가 경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있지만, 창건 당시 이곳은 확장된 경주의 신시가지였고, 불국사는 그 신시가지 핵심에 위치한 중심 시설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가능합니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 한 세기를 태평성대로 지내면서 풍요로움과 자신감에 충만하여 문화와 예술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특히 경주는 실크로드 동쪽의 최종 종착지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던 국제 도시였습니다. 또한,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국토를 부처의 나라로 가꾸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당나라와 서역에 유학해서 나라 밖의 사정에도 밝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이 갖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석굴사원이었습니다. 바위 절벽을 파고 들어가 넓은 동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모신 석굴사원은 영원히 변치 않는 부처의 집이었고, 불교 선진국이라면 꼭 건설해야 했던 종교적 자랑거리였습니다.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에는 이미 1,000여개의 석굴사원이 있었고, 불교의 전파로인 실크로드를 타고 중앙아시아 각국에는 내놓으라하는 석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중국에도 유명한 돈황석굴을 비롯해 운강석굴, 용문석굴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신라인들 역시 오래 전부터 석굴사원을 건설하려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석굴에 대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장애가 나타났으니, 한국의 암석은 단단한 화강암 계열이어서 석굴을 굴착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드디어 석굴암을 만들었는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석굴이 아니라 석실사원이라 해야 합니다. 석굴 파기를 포기하는 대신, 돌로 집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마치 석굴의 효과를 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방법은 당시 세계에는 없었던 새로운 발명이었습니다.
석굴암은 네모난 전실과 둥근 주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네모난 전실은 사천왕이 있는 곳으로 지상을 뜻하고, 둥근 주실은 천장을 공모양의 돔으로 만들고 천장 꼭대기에 별자리를 조각하여 하늘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앞이 네모나고 뒤가 둥근 석굴의 모습은 고대 한국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닮았습니다. 그 가운데 전 세계의 불상 가운데 가장 황홀한 모습의 석가모니불을 조각해서 앉혔습니다. 모든 벽면에는 나한상과 보살상들을 조각했는데, 마치 금방 벽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사실감으로 충만합니다. 석굴암에 들어가 부처님을 올려다보는 순간, “아, 불교가 생각하는 부처의 세계란 이런 곳이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지식인이자 귀족 건축가였던 김대성은 그가 가진 모든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당시 최첨단의 하이테크 건축을 창조했습니다. 동굴 공간의 가장 큰 문제는 습기였습니다. 차가운 벽면에는 늘 이슬이 맺혀서 물기가 줄줄 흐르고, 그 습기로 인해 이끼가 껴서 벽면의 조각들을 부식하기 때문입니다. 김대성은 절묘한 환기장치를 마련하여 습기를 제거하여 늘 뽀송뽀송한 실내 공간을 유지했습니다. 석실 바깥에 자갈층을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었습니다. 석실 벽면 상부에 보이지 않는 구멍을 뚫어서, 자갈층을 통과한 차가운 공기가 구멍을 통해 실내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실내 공기와 벽면의 온도 차이를 없애면 습기도 맺히지 않아 1,000여 년 간 온전하게 실내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석굴암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석실 바깥을 콘크리트를 부어서 환기구멍을 막아 버렸고, 그 후에 늘 석실 안에는 후덥지근한 습기가 생겨 버렸지요. 현재는 어쩔 수 없이 기계장치를 통해 습기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1,300년 전 김대성의 지혜를 현대인들이 못 따라가는 실정이지요.
이러한 과학적인 성과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예술적 성취입니다. 석굴암의 조각과 건축의 예술성에 못지않게, 불국사도 대단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불국사의 축대와 기단, 계단들은 모두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습니다. 그 형태는 사실 목조건축의 디테일들을 돌로 바꾼 것입니다. 조형예술의 재료는 그 재료의 물성에 맞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석조는 차곡차곡 쌓은 구조가 적합한 것이지요. 그러나 불국사의 돌 구조는 마치 나무로 만든 것 같은 모습들입니다. 자칫하면 유치해질 수 있는 형태를 너무나 우아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고도로 성숙한 예술적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대가의 솜씨입니다.
불국사 마당에 서 있는 두 개의 석탑 -석가탑과 다보탑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두 탑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석가탑이 남성적이고 웅장하고 전형적인 석탑이라면, 다보탑은 여성적이고 섬세하고 독창적입니다. 석굴암에 김대성이라는 탁월한 건축가가 있었다면, 불국사에 는 아비지라는 뛰어난 장인이 있었습니다. 석가탑은 바로 그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한 마당에 이처럼 대조적인 두 개의 탑을 둔다는 것은 높은 경지의 예술적 감각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마치 고도의 패션 감각이 없다면 아래위 싱글을 입는 것이 무난하지, 어설픈 콤비 의상은 유치해 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세계적인 초일류가 되는 길을 제시합니다. 당대의 과학적 성과를 집대성해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 그리고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독창적인 창조물을 만드는 것. 이 길은 예술과 문화의 세계 뿐 아니라, 학문이나 기업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의 진리일 것입니다. 이 시기에 신라의 예술품은 세계적인 명품이 되었고, 당나라 장안에서는 신라산 공예품을 갖는게 큰 유행이었습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그 최초 한류의 강력한 증거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