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1.06.27.
출처
월간 에세이
분류
기타

남원에 있는 홈실마을을 처음 가 본 때는 학위 논문으로 매우 분주한 대학원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18,9세기 부농층의 주택 형식에 관심을 가졌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전국 여러 곳의 기와집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이 마을까지 하루 4번 밖에 차가 없는 궁벽한 시절이었다. 버스를 제시간에 얻어 타기 위해서는 치밀한 시간계획을 세워야 했으며, 도중에 일이라도 생기면 하루를 공치기 때문에 늘 마음을 졸였다. 다행스럽게도 홈실마을은 예상 밖으로 대단한 곳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내 학문적 야망을 채워줄 만큼 그럴듯한 기와집들이 대여섯 집이나 보였고, 가장 중요해 보이는 집을 마지막으로 조사하게 되었다.
그 집은 여섯 채나 되는 건물들로 이루어진 ‘고래등같은’ 한옥이었지만, 사는 이는 일흔에 가까운 할머니 단 한 분이었다. 대충 집 조사가 끝난 뒤에는 유일한 거주자인 할머니를 붙잡고 집의 내력부터 쓰임새까지 세세한 질문으로 답변을 얻어내야 했다. 자연스레 가족 이야기도 나왔고, 왜 혼자 사시냐는 질문도 던지게 되었다.
원래 유복한 친정에서 자라나 남원골 큰 부자집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올 때까진 좋았다. 해방전후의 격변기에 대지주 장손인 남편은 대처로 나가 사업과 바람으로 수많은 재산을 탕진하느라 일년에 보름 정도 집에 돌아왔으며, 야금야금 빼먹던 고향 재산이 집 하나를 남기고 다 없어지던 20여 년 전부터 아예 소식도 끊겨 버렸다. 늦게 생긴 아들 둘 역시 겉멋이 들어 도회로 나가 버렸고, 잊을만하면 가끔 들르는 정도란다. 담담하게 말씀했지만, 마치 우리 근대사를 무대로 쓰여진 여러 소설의 내용을 듣는 듯했다. 소설 ‘토지’의 서희 아씨같이 독한 면은 없지만, 다 쓰러져버린 시댁 가문의 형해(形骸)를 부여잡고 일생을 견뎌온 우아한 자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빨려들다 보니 돌아갈 막차 시간이 10분 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급히 인사를 드리고 떠나려는 참이었다. 할머니는 예고 없는 인사에 매우 당황했고, 오랜만에 손자 뻘 젊은이를 만나 반가웠던 순간이 끝남을 슬퍼했으며, 무언가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결의를 다졌다. 불과 1분, 짧은 사이에 읽혀진 할머니의 표정 변화였다. 급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할머니의 손에는 신문지 뭉치가 들려있었다. 잘 익은 홍시하고 삶은 고구마를 싸두었으니 가다가 출출할 때 먹으라신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시골 인심이어서 고맙게 받아 나오는 참이었다. 할머니는 기어코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왔고, 차에 오르는 내 손에 무언가 작은 쪽지를 쥐어주었다. 사양할 시간도 없었다. 차가 떠난 후 손을 펴보니 세 번을 접어 1/8 크기로 접혀진 천원짜리 지폐 세 장이었다. 아마도 간혹 돈이 생기면 곱게 접어서 벽장 깊숙이 감추어두신 모양이다. 그 귀한 돈을 낯 선 젊은이에게 주신 것이다. 당시 3천원이면 남원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비였다.
아직도 그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할머니는 마치 한옥과도 같았다. 영화로왔던 과거를 간직한 채, 세상의 야박한 변화를 애써 외면하며 고고함을 지켜온 일생. 가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아낌없이 많은 깨달음과 감동을 전해주는 풍요로움. 그 후로 지금까지 한옥 연구를 업으로 삼게된 힘들 가운데, 애틋함과 안타까움은 아마도 그 할머니의 유산일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