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청으로 건물의 격을 정한다.
전통적인 건축물을 부르는 명칭은 여러 가지다. 지붕의 모양에 따라서 팔작집, 맞배집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지붕 재료에 따라 초가집, 기와집으로, 또는 방의 배열방법에 따라 훝집이나 겹집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가운데 건물에 색칠이 됐는가 여부에 따라 단청집과 백골집으로 나누어 부르는 명칭도 있다.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 기준이 되는 요소는 무척 중요한 것임에 분명하다. 한국건축의 외관은 지붕의 모양과 재료에 따라 정해지며, 집의 규모와 구조방식을 정하는데 방들의 배열관계는 무척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마찬가지로 단청을 칠한 집과 그렇지 않고 나무 골조를 그대로 노출시킨 백골집과는 천지 차이가 있다. 단청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건물에 색칠을 하는 행위이지만, 좁게는 엄격한 격식과 기법에 따라 기하학적 채색을 하는 까다로운 법식이었다. 현대건축에서는 건물에 어떤 색칠을 했느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고전건축, 특히 한중일 세나라의 중국계 목조건축에서는 단청 여부가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유는 두가지다. 단청은 건축물의 기능과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이며, 단청에 드는 비용이 공사비의 절반 정도가 될 정도로 중요한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똑같은 규모라면, 단청집은 백골집에 비해 공사비가 두배 가깝기 때문에 단청을 한다는 것은 건물에 대단한 격식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건물을 호화롭게 단장하는 사치에 가까운 일이었다. 예를 들어 사찰 같은 곳은 건물을 짓는 중창불사(重創佛事) 못지않게, 건물에 단청을 입히는 진채(眞彩)불사나 개금(改金)불사를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시주받아야만 가능했다. 때문에,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는 일반집에 단청을 칠하는 것을 절대 금지했었다. 사회에 사치풍조가 만연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엄격한 신분사회의 계급적 틀을 유지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더 강한 금지 조치였다.
2. 단청은 왜 하나?
단청의 안료는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고 대개 중국의 수입품에 의존했기 때문에 고가일 수밖에 없었고, 단청을 칠하는 기술은 고도로 훈련된 단청사나 화공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인건비도 무척 높았다. 왜 이처럼 어렵고 비싼 단청을 한사코 건물에 입혀야만 했을까? 특히 조선시대의 불교사찰들은 유교 지배층으로부터 철저히 억압받고, 시주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없이 단청이 되어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경제적인 답에서 구하기는 불가능하다.
우선, 우리나라의 건축물이 대개 목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자. 목재는 건축 재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생명체는 죽어서도 생물의 유기체적 성질을 가진다. 예를 들어 햇빛을 받으면 뒤틀리거나 줄어든다는 것, 비를 맞으면 썩는다는 성질, 무엇보다도 벌레가 먹는다는 것이다. 돌이나 흙과 같은 무생물 재료에는 없는 성질이다. 따라서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여, 건물의 수명을 오래 지속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단청이란 목재 표면에 한 거풀을 입히는 것이므로, 해와 비로부터 목재를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다. 또한, 단청의 주 재료인 진사에는 수은이 다량 함유되어 있고, 수은은 좀벌레들을 죽이는 강력한 살충작용이 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이유는 단청을 칠함으로써, 건물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려는 신앙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단청 재료는 진채라 하여 광물성 재료였고, 원래의 진채는 나무의 섬유질 속으로 스며드는 성질이 있다. 한번 단청을 칠하면 적어도 이백년은 지워지지 않으며, 오히려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색채감이 부드러워진다. 현대건축에는 주로 화학 안료들이 쓰이는데, 처음 칠할 때는 선명하지만 몇 년 안가서 퇴색하여 3-4년에 한번씩 다시 칠해야하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단청집은 세월이 갈수록 원숙해지는 미인과도 같이 곱게 나이를 먹어간다. 이러한 물리적 성질을 떠나서도, 단청집은 쉽게 부수거나 옮길 수 없는 일종의 자격을 획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단청의 주조색인 붉은 색은 예로부터 귀신을 쫒는 벽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화마나 폭뢰등 온갖 자연의 재해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려는 심리적 효과도 다분했다.
무엇보다도 단청집은 화려하며 눈에 잘 띄이는 시각적 효과를 거둔다. 낯선 미인을 처음 만나면,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그가 입은 옷의 색깔이라 한다. 그 다음은 옷의 모양과 전체적인 신체의 비례, 그리고 가장 나중에 인식되는 것이 이목구비라는 실험 결과도 있다. 건물에 일정한 격을 부여하려면 색칠을 하는 것이 동서를 막론하고 고전시대에 행했던 의식이었다. 한국의 단청은 주로 목조로 된 기둥이나 대들보, 서까래 등에만 칠한다. 따라서 건물의 구조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시각적 효과가 있다. 높은 기둥은 더욱 높게 보이며, 지붕의 서까래들은 통일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된다. 매우 고급스러운 건물의 치장법이요, 품격높은 건축적 기법이었다.
3. 자연을 재현하는 색깔들
한국건축의 단청에는 두가지 바탕색이 있다. 기둥에는 주로 석간주(石間朱)라는 붉은 색을 칠하고, 그 위에 얹히는 보와 서까래에는 뇌록(磊綠)이라는 청록색을 바탕색으로 칠한다. 중국이나 일본의 단청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 바로 이 두가지 바탕색이다. 중국건축은 종종 기둥을 청색으로, 서까래를 적색을 칠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 건축은 기둥과 지붕의 구별없이 건물 전체를 주황색 계통으로 바탕을 칠하기도 한다. 반면, 한국 건물들은 대개 붉은 기둥에 푸른 지붕틀이 얹혀진다.
한국의 산야에 가장 흔하게 자라나는 것은 소나무다. 놀랍게도, 석간주와 뇌록은 소나무의 색상과 일치한다. 건물의 기둥은 소나무 줄기와 같은 석간주이며, 건물의 지붕틀은 소나무 잎과 같은 뇌록이다. 색채로만 본다면, 건물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한 무리의 소나무 숲이다. 한국건축의 특징이 자연을 닮은 것이라지만, 어찌 이처럼 단청까지도 자연의 원리를 재현했을까? 처마밑 서까래에 칠해진 뇌록색은 보는 위치에 따라, 날씨의 변화에 따라, 햇빛의 각도에 따라 다양한 인상이 나타난다. 때로는 바위 틈에 긴 푸르스름한 이끼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슴푸레한 녹음 향기가 진동하는 숲 속이기도 하다.
단청에 쓰여지는 색은 파랑 빨강 노랑의 삼원색과 검정과 하양의 두 무채색이다. 청적황흑백(靑赤黃黑白)이라는 5색은 동아시아의 기본 색채였고, 음양오행설을 상징하는 우주적 색채였다. 예를 들어 서양의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의 7색이지만, 한국의 것은 영롱한 5색무지개였다. 그러나 5색은 단순히 5가지 색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유채색의 3원색과 무채색인 흑백은 모든 색을 의미한다. 설악산 계곡에서 샘솟는 오색약수는 물에서 모든 색깔의 빛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5색을 기조하는 단청의 색채에는 실제로 모든 종류의 색채가 등장하게 된다.
4. 단청의 등급과 단계
석간주와 뇌록의 바탕색을 칠하는 것만으로 끝을 내는 단청 기법이 있다. ‘가칠단청’이라 부르는 이 기법은 가장 간단한 단청에 속하며, 강당이나 창고 등 비교적 일상적인 건물에 흔히 쓰인다.
그러나 보통 가칠단청이란 단청 작업 가운데 첫 단계인 초벌칠에 불과하다. 그 다음은 바탕색 위에 여러 가지 기하학적 문양들의 윤곽선을 흑선이나 백선으로 긋게된다. 단청의 복잡하고 정교한 문양들은 일단 종이에 작도한 다음, 문양의 윤곽선을 따라 촘촘한 바늘구멍을 낸 뒤, 건물의 부재 위에 밀착시키고, 바늘구멍들 속으로 먹물 분말을 토닥거린 뒤 종이 본을 제거한다. 그러면 건물 목재에는 희미한 문양들의 먹선이 남게되고, 그 위에 선을 긋는 작업을 하며, 이를 ‘긋기단청’이라 한다. 이 단계에서 그어진 문양의 선들은 대부분 기둥, 보, 서까래 등 부재의 끝머리에 그려진다.
긋기단청 만으로 작업을 끝내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일단 문양의 윤곽선을 그었으면, 그 안에 색칠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긋기 단계의 문양들은 파도 문양이 여러 겹으로 겹쳐진 모양으로 그어진다. 이 파도모양의 문양들을 ‘휘’라고 부르는데, 그 겹칩의 정도에 따라 2휘부터 7휘까지 여러 겹으로 그려지고, 각 휘 안에는 서로 다른 색깔의 색채들이 칠해지는데, 그 가운데서도 유사한 색깔들이 명도나 채도만을 다르게 하면서 칠해지는 것을 ‘빛’이라 부른다. ‘휘’와 ‘빛’을 칠하면 일단 화려한 색상들의 단청이 완성되는데, 이를 ‘모로단청’이라 칭한다. 모로단청만 하더라도 건물은 일단 화려한 외양을 갖게되고, 대단한 격식을 갖추게 된다.
모로단청은 주로 부재의 끝머리에 집중되기 때문에 기둥이나 보의 중간에 별도의 그림 (별지화 別支畵)를 그리고, 모로단청의 휘와 빛 사이에 화려한 금선을 삽입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금(錦)단청’이라 부르는데, 여느 건축에는 나타나지 않고 주로 불교 사찰의 대웅전등 중요한 법당에 장식된다. 검약과 절제를 사회적 가치로 삼은 조선시대의 경우, 아무리 왕궁이라 하지만 금단청까지 하는 경우는 그다지 흔치 않았다. 단청의 단계로 본다면, 금단청이야 말로 가장 화려하고 최종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가칠단청부터 금단청까지의 단계는 단청의 고급 정도를 나타내는 등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단청의 여러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느 한 건물이 가칠단청을 했다고 해서 영원히 그 건물이 가칠단청의 등급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건물에 의미가 부여되고 경제력이 생기면 더 높은 등급의 단청을 칠할 수 있다. 등급을 정하더라도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남겨져 있는 셈이다.
기타 특수한 단청으로는 고분단청, 칠보단청, 금은박단청, 옻칠 등을 들 수 있다. 이 기법들이 건축물에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장이나 함과 같은 가구 공예품에 사용되었다. 고분(高紛)단청이란 안료의 살을 두껍게 하여 표면이 두드러지게 한 단청이며, 칠보(七寶)단청은 회화용의 문양과 안료를 쓴 특수단청이고, 금은박(金銀箔)단청은 금박이나 은박을 2-3회 입힌, 최고로 비싸고 화려한 단청기법이다.
5. 현대 색채론적 의미
단청에 사용된 기법들은 현대 미술, 특히 색채론에서 거론하는 이론들과 부합되는 측면이 많다. 이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단청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감흥할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었음에 분명하고, 그 감흥은 현대라고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보색대비(補色對比) 효과를 들 수 있다. 보색이란 색상표 상에서 서로 반대가 되는 색, 예컨데 한국 단청의 바탕색인 석간주와 뇌록의 경우다. 보색을 나란히 칠하면 서로 다른 색을 자극하여 최고로 선명한 색깔을 유지하는 효과를 거둔다. 인간의 눈은 생리적으로 스스로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색의 보색을 필요로 하는 ‘잔상효과’ 및 ‘동시성의 효과’를 일으킨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붉은 색의 주변에 보색인 청록색이 없으면, 눈은 자발적으로 청록색을 연상하기 때문에 붉은 색은 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주변에 청록색이 있다면, 붉은 색은 더욱 붉게 보이고, 청록색은 더욱 청록으로 보인다. 단청에 쓰이는 색채들은 주로 보색대비를 위주로 구성되었다.
둘째, 적색 계통의 따뜻한 색과 청색 계통의 차거운 색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얻어지는 한난대비(寒暖對比) 효과를 거둔다. 적색계의 따뜻한 색은 인체의 혈액순환을 자극하고, 청색계의 차거운 색은 순환을 지체시킨다고 실험결과들이 입증한다. 또한, 적색계는 밝은 고명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청색계는 어두운 저명도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한국건축물의 외부는 주로 적색계이며, 내부공간에는 청색계의 단청이 사용된다. 오랜 세월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어진 지식이겠지만, 조도 조건에 맞는 색상들을 적절히 사용한 지혜도 읽는다.
셋째, 색채의 운율적 조화효과를 얻고 있다. 그 운율효과는 다른 색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색상대비(色相對比)나, 동일한 계통의 색상들을 연속시키는 점층(漸層, gradation) 효과를 얻는다. 모로단청의 ‘휘’는 색상대비의 대표적 기법이고, ‘빛’은 점층효과를 일으킨다.
한국건축의 단청은 현대 색채학 이론으로도 대단히 뛰어나고 과학적인 체계에 따라 규범화된 채색 기법이다. 물론 색채학 이론에 부합한다고 해서 그 예술적 심미적 가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 색채 이론이란 역사상 존재했던 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예들을 대상으로 분석하고 조직화된 귀납적 이론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단청은 세계 건축사상 매우 우수한 전통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셈이 된다.
6. 단청과 현대건축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단청집이 꼭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현대건축에서는 건축 재료의 질감과 원래의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선호한다. 이는 근대사회의 청교도적 윤리와 건물의 경제성을 추구하는 합리주의적 건축관에서 비롯된 평가이다. 따라서 근대건축의 눈으로 본다면, 단청집은 마치 원래의 얼굴을 감출 정도로 짙게 화장한 여인의 퇴폐적인 얼굴일 수도 있고, 서구인의 눈에는 오지의 무당집과 같이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건축물은 구조적으로, 재료적으로 솔직해야한다는 교리는 근대 모더니즘 건축에서만 통용되는 규범이었다. 탈근대의 문턱에 서있는 21세기의 현대건축은 오히려 색채의 사용을 권장하고, 풍부하고 다양한 미적 원리를 탐색하고 있다.
문제는 현대인들의 색채나 장식에 대한 감각이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간판들의 색상을 보자. 대부분 빨강이나 파랑의 원색적 바탕색들이 휩쓸고 있다. 우리의 눈은 피곤해지고, 미적 감각은 퇴락되고 만다. 건물에 색을 칠하면 더욱 한심스러운 현상들이 발생한다. 하는 수 없이 가장 무난한 회색이나 베이지색 정도로 건물 표면을 마감한다. 조금 튀는 색채를 칠하면 대부분 유치한 결과를 빚기 때문이다.
문화재적 건축물을 보수한답시고 칠해지는 현대판 단청들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과거와 같은 광물성을 안료는 비싸고 귀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값싼 수성페인트를 사용한다. 화학 안료는 목재를 보호하기는 커녕, 쉽게 부식시키는 부정적 효과만을 일으킨다. 또한, 몇 년만 지나도 색채가 날라버려서 건물을 추하게 만든다. 또, 6-70년대에는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전국의 문화재나 공공건물들이 크림색으로 칠해졌고, 그 시대를 겪은 일반인들은 그 색채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디자인의 영역 가운데 가장 어렵고 세련된 부분은 바로 색채 디자인이다. 이 분야의 세련성은 곧 그 사회의 문화적 역량과 수준을 측정하는 바로 메터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건축계의 수준은 최저 수준을 맴돈다. 우선 색채 사용을 두려워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색채도 극히 한정되어 있다. 컴퓨터의 발달로 인해 사용할 수 있는 색채는 2만여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있게 쓸 수 있는 색채는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10색이나 될까? 또한 그나마 여러 색들을 배열하고 구성할 수 있을까? 조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는가. 과거의 단청을 그대로 사용하면 안되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단청 속에 스며있는 색채학적 효과, 기능적 상징적 의미들은 이 척박한 현대건축에 또 다른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