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8.11.27.
출처
산업디자인
분류
건축비평

방글라데시는 2차 대전 후 종교적인 문제로 갑자기 동파키스탄이 되었고, 동-서파키스탄 전쟁 끝에 독립된 국가가 되어버린, 거대한 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급조된 나라다. 인구 천만 정도에 불과하던 벵골만 지역에 인도 대륙 전역의 이슬람교도 1억 이상이 이주하여 갑자기 나라를 이루니, 여러 가지 어두운 세계기록이 작성될 수밖에 없었다. 일인당 국민소득 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땅은 좁고 인구가 많아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기록 중인 나라, 국토의 1/4이 강과 개천으로 덮여서 매년 홍수가 나서 수백만의 이재민이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나라. 무엇 하나 밝고 희망적인 통계는 없다. 만성적인 빈곤에서 헤어날 것 같지 않은 이 나라는 유구한 역사도, 전통도 없고 따라서 고유한 문화와 관광자원도 없다.
인도의 뉴델리에서 서너시간의 연착을 인내한 끝에 드디어 이 절망적인 나라의 수도 다카에 도착했다. 다카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회의사당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집의 건축가는 바로 미국의 루이스 칸이다. 그는 흔히 현대건축의 도인으로 불리운다. 74세의 긴 건축인생 동안 30여개 안팎의 작품을 남겼으니 그다지 많은 수자가 아니지만, 그의 한작품 한작품은 건축가로서의 깊은 정신세계의 표현이며,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를 수없이 질문하고 있다. 칸은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일종의 변방인이었다. 50세까지의 그의 작품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할 정도로 평범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의 긴 수련기간이었고, 내면의 통찰과 건축에 대한 깊은 철학을 다듬고 준비했던 시기다.
칸이 다카의 국회의사당 프로젝트를 의뢰받은 것은 1963년, 예순두살의 나이였다. 여러 차례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최빈국 방글라데시 (당시는 동파키스탄)의 경제적 기술적 여건에 맞추어 공간과 기법을 바꾸기 여러 차례 끝에 완공을 본 것은 1974년이었다. 국회의사당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국회의원 사무동과 직원 숙소들이 마치 기러기떼 같이 V자형으로 포진하고 있는 커다란 컴플렉스이다. 2-3층의 붉은 벽돌집들에 둘러 싸여있는 의사당건물은 백색의 콘크리트 건물이며, 정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극히 기하학적인 구성이다. 이 건물군은 마치 거대한 수렁 속에 핀 한송이 연꽃같이, 빈곤과 불신에 허덕이는 다카라는 도시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보인다.
의사당 건물의 전면 광장은 누추해 보이는 그러나 희망에 가득찬 시민들의 놀이터요 집회장소로 개방되어 있다. 자동차만이 접근할 수 있고, 경찰로 가득한 여의도 국회광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면 깊은 철학과 신성함으로 가득찬 공간에 놀라고 감탄하게 된다. 무표정한 콘크리트 벽면들과 그 면에 뚫린 정삼각형 원형의 공허함만으로 이루어진, 어찌보면 단순하고 대칭적인 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4층 높이의 높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자연의 빛이 겹겹이 둘러싼 벽면들 사이로 투과되고 굴절되어 공간의 형상을 밝힘으로써, 내부는 신비스러우면서도 인간적인 포근함으로 감싸지게 된다.
칸이 여기서 추구하려고 했던 본질은 침묵과 빛(silence and light)이었다. 존재하려는 열망을 가진 침묵과, 모든 존재의 제공자인 빛이 만나는 경계에 있는 본질과 기원에 대한 갈망이었다. 다카의 국회의사당 공간은 수천년 동안 수많은 건축물들이 추구해왔던 본질적 공간, 원형적 공간을 성공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침묵과 빛. 침묵은 아주 조용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은 빛이 없는 (lightness), 어두움이 없는(darkness) 것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이 어휘들은 모두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왜 만들었을까요? 빛이 없는 것, 어두움이 없는 것. 존재하려는 열망, 표현하려는 열망. 만약 먼 과거로 되돌아가 빛과 침묵이 함께 있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있으며,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만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침묵과 빛은 순환하는 영혼입니다.”
이 위대한 공간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의사당의 내부공간으로 사진으로 담을 수 없었다. 그 신비한 공간이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보면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담담한 벽면만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눈을 들어보면 칸의 공간은 여전히 나를 압도하고 있다. 화려한 형태는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도, 위대한 공간은 사진과는 다른 것이라는 교훈을 깨달은 것도 여기에서였다.
50세까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예순과 일흔을 넘 죽을 때까지 세계적인 존경과 근원적인 건축을 실현할 수 있었던 칸. 그는 인도의 아메다바드에서 경영연구소를 설계하고 감독하다가 귀국하는 길에 필라델피아 역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일흔넷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떠난 지 25년이 지났지만, 칸에 대한 추모와 그의 건축 철학과 사상에 대한 탐구는 더욱 증폭되고 있다. 혼란과 일상성의 질곡에 빠져버린 현대건축에 끊임없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구원될 수 있는 일말의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홍콩으로 출국하는 비행기에는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 방글라데시 내국인으로 보이는 6명 정도밖에 다른 승객은 없었다. 홍콩 공항에서는 이 비행기 승객에 대한 까다로운 심문과 소란이 있어 30분을 대기해야했다. 그러나 우리 차례가 되자 아무 질문없이 통관되었다. 상황이 궁금해서 물어보니, 다카에서 홍콩으로 오는 방글라데시인 대부분은 밀수나 범죄조직에 관련이 있어서 엄격한 검사와 절차를 거친다는 답변이었다. 방글라데시는 끝까지 가난하고 불행했다.
그런데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칸에 대한 자료를 뒤적이다 놀라운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남루한 차림의 방글라데시인들을 모아 놓고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칸의 사진이었다. 칸과 청중 사이에는 철근과 시멘트 포대, 콘크리트 믹서와 운반차 등 기초적 장비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다카의 국회의사당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현대적 콘크리트 공사에는 거의 경험이 없었던 공사장의 인부들을 모아 시멘트와 철근 다루는 법에서부터 차근차근 공사법을 설명하는 사진이었다. 후진국 방글라데시에 대한 칸의 애정과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칸의 철학과 건축세계는 결국의 그의 넓은 도량과 인간과 건축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