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0.09.01.
출처
이상건축
분류
건축론

건축잡지는 물론 한국 잡지사상 <이상건축>만큼 독특한 역정을 걸어온 잡지도 없을 듯 싶다.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창간되어 역량을 쌓았고, 지역지가 아닌 주요 전국지로서 위상을 구축해왔고, 상업성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 오면서도 건축이론 분야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강화해 오고 있다.
어언 창간 7주년이다. 금년 몇 개월간 편집에 관여하면서, 그간 형성해온 이상건축의 전통을 유지한다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임을 절감하고 있다. 추상적 주제를 현실적 기사와 원고로 바꾸는 기획부터, 필진의 인선, 청탁, 의견조정, 독촉과 편집까지 이처럼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일을 해야 잡지가 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수많은 작품들, 특정 건축가 소개, 또는 해외건축 소개 등 쉽고 빠르고 편안 길도 많은데, 현란한 볼거리도 없고 어렵다는 평을 감수하면서 이 길을 가야 하나?
그러나 몇 번을 반문해도 이상건축이 추구하는 길은 포기할 수 없는 건축 본연의 길이라 생각한다. 흔히 건축은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말도 아니다. 건축은, 의미있는 건축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결과이며, 건축가의 세계관과 개념에 의해 좌우된다. 그 일련의 선택적 과정에는 인문학적 지식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매 순간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건축은 예술이요 기술인 동시에 또 하나의 인문학이기도 하다. 이상건축이 건축의 이론화라는 방향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본질적 이유이다.

창간 7주년 기념인 이번 호와 다음 호는 건축계 바깥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건축과 도시환경에 대한 담론들을 소개한다. 건축이 인간의 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한, 건축은 인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건축의 생산 혹은 창작행위가 건축가라는 지식인의 정신적 결과라고 한다면, 더더욱 인문학적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비단 건축이 건축가와 건축주라는 개인들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건축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며 공공적인 재화이다. 어차피 대지에 뿌리내려야만 하는 것이 건축의 운명이며, 대지의 일시적 소유주가 누구인가와는 관계없이 도시라는 사회적 복합체의 일부를 형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건축계가 주위의 인문학이나 사회학적 성과를 체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통로도 없거니와, 개척하려는 진지한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관심있는 개인의 탐구와 독서에만 의존할 뿐인데, 자칫하면 유행적 경향이나 주변적 잡학에 사로잡힐 위험도 크다. 또는 자신이 우연히 접한 특정 인문학 분야만이 지고지선이라는 아집에 쌓일 수도 있다.
우리 건축계가 안고있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의사소통의 단절이다. 건축계 내부의 의사소통도 문제지만, 타 예술계나 기술계와의 소통은 더욱 단절되어 있으며,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는 아예 관계조차 맺지 못하고 있다. 건축과가 공과대학에 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 건축사협회가 건설교통부에 있어야 하느냐 문화관광부에 있어야 하느냐로 논란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세계 건축은 하나의 인문학적 전통으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야기다.
이번 기획을 진행하면서 적지 않은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우선 적절한 필진을 초청하기가 어려웠다. 이상건축의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쉽고 정확한 원고를 주실 분들을 찾기가 무척 버거웠다. 그만큼 건축 외부와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정보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또는, 원고 청탁을 받은 몇 분의 경우지만, 건축분야에 기고한다는 사실을 너무 무겁거나, 반대로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성사가 안된 경우도 있었다. 전혀 모르는 건축계 어떻게 원고를 싣겠는가는 반응과, 아니면 그까짓 건축에서 무슨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는가 하는 오해였다. 어쨌든 건축과 외부 사이의 한국적 단절은 심각했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아픈 것은 인문학 분야의 전반적 침체와 위기였다. 이미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여러 차례 들어왔지만, 청탁 과정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은 전공자가 감소하고, 그나마 순수 학문을 포기하며, 대학의 학과는 폐쇄 일보직전이다. 인간성의 근원을 생각하고,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본연의 역할에 앞서서, 소속된 학문 분야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학계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을 것인가에 더욱 많은 신경을 써야하는 형편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건축의 위기요 사회의 위기다. 건축이 인문학에 더 많은 관심으로 가지고 도움을 받아야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학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