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6.10.03.
출처
공간
분류
건축비평

1. 수상작을 결정하기까지

<공간25년상>이 제정된 지 만4년, 세 번째 수상작으로 <자유쎈터>를 추천했다. 첫 번째 수상작은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 두 번째는 이희태의 <절두산순교기념관>, 그리고 세 번째는 김수근의 작품이다. 한국 현대건축사의 초미를 장식하는 대표적 작가 3인의 작품이 모두 수상된 셈이다. 이 상의 제정취지는 준공된 지 25년이 지난 건축물로서, 원작 자체가 건축적 가치와 완성도가 높은 대상 중에서 현재에도 보존과 이용상태가 양호한 건축, 다시 말해서 건축의 생명이 입증된 문화재급의 현대건축을 제정해 보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상의 수상대상은 건축가가 아니라 철저하게 건축물을 대상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회에 걸친 수상작이 대표건축가 3인의 것으로 결정된 것은 어쩔 수 없는 30년전의 건축적 상황을 되새김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세 번째 수상작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다. 수상 후보작으로 고르면서 될 수 있으면 김중업 김수근 이희태 등 너무나 잘 알려진 건축가의, 잘 알려진 건축물은 피해보려 애를 썼다. 가급적 현대건축사를 새로 쓸 수 있을 만큼, 새롭게 재조명될 건축물을 발견하려고 몇번씩이나 샅샅이 목록을 뒤져보았다. 특히 김수근의 작품은 최후의 가능성으로 미뤄 놓았었다. 우선 시상의 주최가 김수근의 후계자들이어서 자가발전의 인상을 피하고 싶었고, 또한 김수근의 신화화에 일조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김수근의 자유쎈터로 낙착되고 말았다. 잊혀진 건축에 대한 재조명은 커녕, 극히 진부한 수상행사가 되지않을까 우려마저 된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별로 고민할 것도 없는 매우 상식적인 수상작들로 비칠 것이다. 그래도 갈등의 한가지 증거가 된다면, 준공된지 32년 만에 – 25년이라는 시상기점보다도 8년이나 초과한 후에야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될 수 있으면 정확히 준공 25년이 되는 건물, 다시 말해서 25년 전의 ‘올해의 건축’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이전의 건축물로 소급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개 짐작하듯이 이 상의 제정 취지에 걸맞는 작품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전혀 후보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1년도 이전에 완공된 건축물들 80여점을 검 토한 결과 1차적으로 6점의 작품을 후보로 올렸다.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김정수 1968), 조씨 주택 (조성렬 1968), 육군군종쎈터 (김석재 1969), 세종대왕 기념관 (송민구 1970), 국립공주박물관 (이희태 1971), 그리고 자유쎈터 (김수근 1964). 6점의 작품 모두가 나름대로 한국 현대건축사에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들이지만, 수상작으로 결정하기에는 또한 작지 않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은 프리캐스트 콘크리트의 미학을 외관형태에 이용한 본격적인 건축으로 기록할 만하다. 시종 일관되게 모더니즘 건축의 기술적 성과를 수용하려 했던 김정수 선생의 역작으로, 뾰족 아취를 모티브로 한 단위 부재의 디자인도 특유의 정교한 반복미를 보여준다. 이런 계열에서 김정수의 기념비적 작품은 역시 명동의 성모병원이지만, 현재 카톨릭회관으로 기능이 완전히 바뀌었고, 그나마 철거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했다. 반면 연대학생회관은 외관의 기술적 업적만이 부각되어 보류되었다. 공공부문과 대기업의 건축투자가 활발하지 못했던 70년대까지, 단독주택은 건축가들이 자신의 역량을 보일 수 있는 중요한 장르였다. 그 가운데서도 예의 조씨주택은 강한 개성과 내부공간의 구성으로 강한 개성을 보였지만, 공공건축을 대상으로 학습적 효과도 거둔다는 25년상의 취지와 어긋나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강렬한 표현적 형태로 구성된 육군군종쎈터 역시 육군본부 구내라는 접근 불가능한 위치 때문에 후보에서 제외할 수 밖에 없었다. 세종대왕기념관은 내부공간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형태적인 부조화 때문에, 공주박물관은 반대로 역시 내외부의 일관성이 모호하여 제외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자유쎈터 역시, 지나친 형태적 작위성과 비효율적인 공간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냉전 이데올로기와 군사독재정권의 상징적 건축이라는 부정적 측면 때문에 선뜻 수상작으로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가지는 현대건축사상 여러 가지 의의 때문에 최종 수상적으로 결정했다.

2. <자유쎈터>의 이데올로기

5.16 군사쿠테타의 주역들은 정권의 정통성을 반공이데올로기의 정립에서 찾았다. 냉전 구도로 세계가 양극화되었던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정권 유지와 재집권을 위한 비장의 무기를 손에 쥔 셈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히 바뀐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할 때, 흔히 국가적인 건축사업을 벌이게 된다. 국가적 상징을 만듦으로써, 국가와 정권을 동일한 존재로 믿게만드려는 의도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의 상징물이 독립기념관이었다면, 5.16 정권의 초기 상징물은 곧 자유쎈터였다.
“아세아 자유국가에 대한 공산주의 침략을 저지분쇄하고 자유 아세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아세아 자유민의 분산적인 반공운동을 규합 통일하여 강력한 국제적 반공운동으로 발전시킬 목적으로 1954년 6월 15일 대한민국 진해에서 창립 제1차대회를 가졌던 아세아반공연맹은 그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 1962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아세아반공연맹 임시총회에서는 아세아반공연맹의 교육연구기관으로 <자유쎈터>를 서울에 설치키로 결의하였다.” (<건축>지, 1964.11.)

자유쎈터는 1962년 11월 착공되어 64년 8월 15일 준공됐다. 국가보조금 1월원과 국민모금 1억5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예산이 투여된 국가적 사업이었다. 국제회의장과 본부 사무국, 숙소 등의 컴플렉스로서 한국전쟁후 최초의 국가기념사업인 동시에, 당시로서는 극히 드문 이른바 국제적인 사업이었다. 1960년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의 당선자로 화려하게 귀국한 김수근은 5.16 세력과 제휴해, 자유쎈터의 건설을 총지휘하는 반공연맹의 건설분과 위원장으로서, 그리고 설계자로서 최상의 조건에서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그때가 약관 33세, 그러나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서 국가 대사를 움직이는 실력자였다. 설계 당시에는 고층부 사무동인 자유회관과 저층부 본부동인 자유쎈터로 두 개의 매스였으나, 반공연맹의 활동이 시들해진 후에 대대적인 기능상의 변화가 있었다. 자유회관은 숙박업소로 기능이 변하여 타워호텔이 되었고, 자유쎈터는 반공연맹 사무국과 여성교육단체와 외국인용 면세품점 등으로 분점되었다. 타워호텔의 부족한 공용시설을 해결하기 위해 해피홀이 추가되었고, 고급 사교클럽인 실버 레스토랑 (후에 사파리클럽과 한국클럽으로 명칭을 바꿈)이 건축되었다. 네 건물 모두 김수근의 작품으로서, 한 장소에 선 연작으로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초기의 기능이 변하지 않고 계속 활용되는 것은 자유쎈터 뿐이다. 처음부터 운영주체와 목적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잦은 변경은 당연한 결과였다. 자유쎈터마저도 기능적 필연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면도를 보면 금새 알 수 있듯이, 건축 면적의 70% 정도가 회랑과 복도, 계단, 로비 등으로 할애되어 있다. 정권이 지시하는 이 건물의 기념비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반공과 자유의 국가적 이념을 건축 형태로 표현해야한다는 주문은 건축가로서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표출된 과장된 곡면지붕과 거대한 열주들, 독립적인 조각적 건축요소들은 작가가 선택한 해결의 수단이었다. 특히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장중한 외관은 정권적 신뢰와 굳건함, 그리고 강력한 권력의 상징으로 동일시 되었을 것이다.
목적을 위해 선택된 조형 어휘와 요소의 문법들은 김수근 고유의 것은 아니었다. 쉽게 지적할 수 있듯이, 그것은 코르뷔제에 연원을 두면서 단게와 요시무라가 일본적으로 수용한 것들이었다. 물론 김수근의 독자적인 건축세계가 만개한 시점을 70년대 이후로 본다면, 극히 초기작에 속하는 자유쎈터가 당시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형태적 어휘의 영향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또 국내 건축계가 국제적 경향에 어두울 수 밖에 없었던 실정을 감안한다면, 국제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긍정적인 역할도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유쎈터의 형태에서 역사적 가치를 찾는다면, 바로 60년대 모더니즘 건축을 수용하는 시점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한국건축의 단면을, 그리고 노출 콘크리트의 부루탈리즘이 풍미하던 세계건축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자유쎈터의 건축적 가치는 기념비적인 형태와 현란한 요소들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지적한 듯이, 그것들은 건축가의 자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정치적 산물인 것이다. ㄴ

*反共을 國是의 제일의로 삼는‘ 냉전적 이데올로기

<건축> 1964.1.

아세아 자유국가에 대한 공산주의 침략을 저지분쇄하고 자유 아세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아세아 자유민의 분산적인 반공운동을 규합 통일하여 강력한 국제적 반공운동으로 발전시킬 목적으로 1954년 6월 15일 대한민국 진해에서 창립 제1차대회를 가졌던 아새아반공연맹은 그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 1962년 5월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아세아반공연맹 임시총회에서는 아세아반공연맹의 교육연구기관으로 <자유쎈터>를 서울에 설치키로 결의하였다.

1962.11. 착공 –64. 8. 15 준공

자유센타 본관 63-64
자유회관 (사무국–> 타워호텔) 62-64

-수도의대 부속병원 (65)
오양빌딩 (62-64)
워커힐 힐탑바 (61)

——————————
정인하, <김수근 건축론>, 미건사, 1996.

64>
아시아 반공국가의 종주국으로 만들려는 의도—> 대규모 국제회의장과 본부, 숙소의 컴플렉스
62년 기금조성 / 국가보조 1억원 + 국민모금 1억5천만원 (박정희의 독립기념관?)

김수근의 개념 1) 국가적 이념의 건축적 표현 – 전후 최초의 국가차원 기념건축
-권위죽의적인 군사문화와 반공으로 대표되는 냉전이념 –>
정권유지와 재집권의 도구 –> 실제 기능보다는 기념비적 성격이 강함
/ 과장된 스케일 / 독립적 요소들 / 과장된 곡면지붕 / 기능적입구와 상징적 입구의 분리 / 중앙의 긴 다리계단 (권위적 모티브)

2) 남산이라는 대지의 해석 <69>
– 타워호텔 – 해피홀 – 자유쎈터 – 실버 레스토랑 (사파리 클럽, 한국 클럽)
– 남산의 경관을 개방하는 건축 / 시선의 중요성
—> 대지가 요구하는 형태
67>3) 공간구성 / 70년대 김수근 공간의 초기적 형태
-국회의사당 현상안의 중요한 개념들이 실현 :
남산을 오르면서 지각되는 시각적 고려들 / 대지의 해석
/ 건물의 기념성 / 공간적 특징
– 양쪽 사무실을 매개시키는 커다란 중심공간 – 운동장 쪽으로 개방
– 입구부의 낮고 길게 나 캐노피 VS. 넓고 높게 트인 중심공간
–대조와 긴장감
– 중심공간을 관조하는 개방된 수직계단 설치 –> 공간의 다양성, 역동성
– 공간적 흐름 : 김수근 공간의 핵심개념

아시아 반공연맹 건설분과위원장
*타워호텔은 단순히 고층을 만들기 위한 발상

자유센타의 의의 1) 60년대 군사정권의 상징물로서 / 냉전 이데올로기의 기록으로서
2) 60년대 모더니즘의 서막 :
수입품, 그러나 일본을 거쳐서 들어온 서구지향의 상징
3) 약관 33세에 국가대사를 칙임짐 : 그리고 이정도의 건축이 최고의 건축으로 부상할 수 있었음 (당대 한국의 역량과 수준)

4) 건축적 가치 – TEAM X적 사고 / 분화된 선의 조형 (자의적 형태?)
(가로들) (교차하는 수평면들) (군집) (유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