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6.03.19.
출처
건축과 환경
분류
건축비평

유석연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남양사옥과 다음미디어센터의 건축주는 공교롭게도 한국의 대표적인 BT(생명공학)과 IT(정보산업)의 선두주자로서 새로운 기업문화를 열어가는 집단이다. 전통적인 굴뚝산업은 거대한 공장으로,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금융기업은 초고층 사옥으로 대표되는 건축적 이미지를 가졌다면, 새로운 첨단기업이 가지고 있는 건축적 이데아 역시 새로울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자연 혹은 도시환경에 부드럽게 대응하면서 지형의 생김새를 잘 이용하고, 자연의 에너지를 순환시켜 화석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고, 녹색 자연과 생태를 존중하는 환경친화적 건축을 추구하며, 디지털 환경에 맞추어 건축을 소프트웨어화 시키려는 노력들에 건축가 뿐 아니라 기업의 리더들도 쉽게 동의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환경적 노력들은 후기 자본주의의 반성과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기도 해서, 첨단기업 뿐 아니라 이 시대 모든 건축이 마땅히 갖추어야할 기본적 미덕이기 때문에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다.
물론 유석연의 두 작품도 당연히 친자연적이며 친환경적이다. 남양사옥은 시끄러운 고가 철도와 잡다한 공장들 사이에 놓여진 위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외부적으로는 도시에 연관되지만, 내부적으로 독립된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다음미디어센터는 완만한 해안경사의 제주도식 지형에 순응하면서 대중적 공간과 기업공간을 병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 작품의 진정한 가치와 목표는 여기에 있지 않다.
생명공학이나 정보산업의 핵심은 인간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모토로 한 근대적 휴머니즘의 인간이 아니라, 창조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다. 모든 기업 활동의 이윤과 가치가 직원들의 능력의 우수함과 창조적 역량에 달려있기 때문에, 첨단 기업의 직원은 더 이상 노동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가장 소중히 다루어야할 자산이고, 시설이며, 원료이기도 하다. 공장이나 사옥은 없어도 이들 기업은 경영되지만, 창조적 인력이 없으면 기업은 곧 도산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추구하는 인간중심적 건축이란, 불특정 다수의 대중적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소수의 선택된 엘리트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재충전과 재활용의 공간이다. 때문에 사무공간보다는 곳곳에 뚫려있는 휴식공간과 넓은 복도들이 중요하며, 자연에 면하는 옥상정원과 건물군 사이의 틈새공간이 중요하게 된다. 단지 직원들의 휴식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공간에서 스치는 동료들의 만남과 잡담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창출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적인 건축공간이란 ‘만남’과 ‘소통’의 공간이다. 바람과 소리, 햇살과 신선한 공기를 만나 자연의 기운과 소통하기도 하고, 소음과 인파, 잡다한 도시의 풍경을 만나 사회의 복잡함과 소통하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 방향으로 얽혀있는 통로와 계단, 로비에서 만나고 벌어지게 되는 비공식적 회의들이다. 동료들 사이의 유대감이라는 근대적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지식의 주체들이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지식의 시너지 효과는 기업은 물론 직원들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기능이다.
남양사옥 3~5층 복도를 관통하는 아트리움은 이런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고가전철의 소음을 차단하는 이중벽의 효과도 있지만, 같은 층 사이의 교류는 물론, 다른 층간의 수직적 공간 교류가 가능해졌다. 다음미디어센터에서는 수평적으로 전개되는 교류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개방된 자료실과 집회실을 두개의 중심으로 삼아 사방으로, 그리고 아래위로 통로들이 얽혀있다. 또, 거의 모든 통로들은 지름길이 아니라 에돌아 길게 늘어져 있다. 단순화 규격화 효율화라는 근대적 정신과 배치되는 복합, 개성, 여유 등이 새로운 가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가치들은 곧 인간의 속성이다. 근대 시민 사회의 집단적이고 부품적인 인간이 아니라, 첨단 사회의 인간이란 개별화되고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이다. 건축도 마찬가지로 근대건축이 전체적인 조화와 총체적 프로그램을 우선으로 삼았다면, 새로운 환경의 건축은 부분들의 개별성과 그들의 집합적 프로그램이 중요하다.
유석연은 부분공간들의 품격과 독자성을 인정하고, 독립시킨다. 남양사옥에서 상담원들을 위한 로비 카페와 다목적 홀의 볼륨을 강조함으로써 사무동 사이의 외부공간들을 확보했다. 다음미디어센터의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로비 갤러리를 삼각형 매스의 별도 건물로 완결함으로써 기밀을 요하는 사무동과 자연스러운 분절을 이루었다. 강서구청 별관의 하층부에는 재료도 형태도 기능도 상이한 어린이집을 마치 독립건물같이 점유시켜서 상층부의 사무공간과 분리했다. 이 주요한 독자적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과 분리되면서 관계를 맺어, 사이 마당이나 옥상정원이라는 예기치 않은 공간들을 덤으로 얻게 된다.

지식중심 사회에서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게 평가된다. 소품종 다량생산의 시대의 생산품이란 시장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단순품이지만, 창작의 과정이란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 분석하고, 독특한 방법론을 정립하고, 창작의 기준에 따라 대안을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과정상의 방법론만 정당하다면, 결과물의 성공 확률은 대단히 높게 된다. 유석연은 결과보다는 프로세스에 흥미을 느끼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이입하는데 투자하는 건축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다음의 프로젝트를 위해 다음의 여러 포탈사이트들을 항해하고, 남양사옥을 위해 전 세계에 산재하는 남양알로에 농장들을 견학하기도 했다. 인터넷 정보산업체인 다음의 기업 내용을 분석하다가 급기야 <미디어 안>이라는 디지털 작품을 제작하여 갤러리에 전시하게 되었다.
설계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분야를 학습하고, 많은 건축주와 관계자들을 만나 대화하고 설득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었는지 모두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결과물에 비해 너무 길고 과도한 프로세스를 겪었는지도 알 수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건축가의 자산은 결과물이 아니라 프로세스라는 점이다. 결과물은 엄밀히 말하면 건축주의 것이요, 사회의 공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로세스는 건축가 개인에게 깊숙이 체화된 비밀스러운 영역이며, 앞으로 오랜 기간 건축 작업을 할 유석연의 소중한 자산이다.
‘신진’ 또는 ‘소장’ 건축가라 할 유석연의 데뷔 작품들이 남양과 다음, 그리고 소규모 공공 프로젝트인 강서구청 별관이라는 우연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이들 프로젝트가 요구하는 인간 중심적, 과정 중심적 태도는 유석연이 건축가로서 성장과정을 통해 습득하고 체화해 온 건축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고와 자세를 견지한다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건축적 이상을 하나 둘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