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인가, 북촌인가
강물이 동서로 흐르면 땅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한강은 서울을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었고, 예전의 강남지역은 뽕나무나 채소밭으로 한적한 농경지였을 뿐,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는 강북에 있었다. 옛사람들은 강의 북쪽을 ‘양’이라 하여 사람이 살만한 양명한 곳으로 여겼고, 강의 남쪽은 ‘음’이라 하여 살림지로는 기피했다. 중국의 고대 수도였던 ‘낙양’은 낙수의 북쪽이라는 뜻이고, 조선의 ‘한양’ 역시 한강의 북쪽 도시였다.
한양 도성 안에는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렀고, 청계천의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 불렀다. 강의 북쪽을 우선으로 하는 논리대로, 북촌에는 궁궐과 관청들, 그리고 왕족과 귀족들의 살림집들이 자리 잡았다. 반면 남촌에는 고만고만한 능력을 가진 중산층들의 작은 집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청계천 북쪽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이라는 두 개의 도시 중심이 있었다. 이 두 궁궐 사이의 언덕과 골짜기를 특히 북촌이라 불렀는데, 약간의 관청과 비교적 큰 규모의 제택들이 들어선 곳이었다. 문제는 경복궁의 서쪽 지역이다. 현재는 ‘서촌’이라 부르지만, 조선시대에 서촌이라 불렀던 사례는 발견하기 어렵다. 경복궁의 서쪽이어서 서촌이라면, 동쪽인 북촌은 동촌이라 불러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촌이란 ‘서궐’인 경희궁 일대인 서소문과 신문로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이러한 논법을 따른다면, 북촌이란 ‘북궐’인 경복궁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복궁 동쪽 뿐 아니라 서쪽 인근 지역도 북촌에 해당한다고 보아야한다.
새로운 아름지기 사옥이 위치한 통의동을 흔히들 서촌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북촌의 서쪽, 서북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일대는 동쪽으로 효자로, 서쪽으로 자하문로에 접해있다. 효자로 건너는 경복궁이고, 자하문로 건너는 누상 누하 옥인동 등 작은 동네들의 밀집지역이다. 아름지기 사옥 일대는 흔히 서촌이라 부르는 자하문로 서쪽 동네와는 확연히 차별되는 역사와 땅의 모양을 갖고 있다. 오히려 동쪽의 경복궁과 역사적으로, 형태적으로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경복궁 다음의 명당, 창의궁 터
아름지기 사옥이 자리 잡은 곳은 옛 창의궁 터다. 이 터를 포함하여 총 21,157m2 (7,000여 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 전체가 창의궁 터였다. 창의궁은 조선조 21대 임금인 영조의 잠저였다. 잠저(潛邸)란 임금이 궁궐 밖에서 살던 개인집을 말한다. 궁궐에서 세자로 태어나 임금에 즉위하는 경우, 평생을 궁궐에서 살기 때문에 잠저가 있을 수 없지만, 세자의 신분이 아니었던 중종이나 인조, 영조, 철종, 고종 등은 궐 밖에 잠저가 있었다. 이들을 잠룡(潛龍)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은 집 이름이었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은 3명의 배다른 아들을 두었다. 첫째는 훗날 경종이 된 세자로 유명한 희빈 장씨의 소생이었고, 둘째는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으로 바로 영조였으며, 셋째는 명빈 박씨의 아들인 연령군이었다. 세자가 아닌 왕자는 장성하여 결혼하게 되면 궁을 떠나 분가해야했는데, 이러한 왕자나 공주들의 개인 집을 궁집[宮家]으로 불렀다. 숙종은 두 아들의 궁집으로 연잉군을 위해 경복궁 서쪽에 창의궁을, 연령군을 위해 경복궁 동쪽에 안동별궁을 마련해 주었다. 안동별궁 터에는 현재 풍문여고가 자리잡고 있다.
숙종의 아들 사랑은 유난했다. 비록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에 불타 아직 폐허로 남았지만, 북악 아래 장안 최고의 명당임에는 틀림없었고, 그 좌우에 아들들의 궁집을 지어 왕가의 안위를 꾀했던 것이다. 세자인 경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했기에, 유사시에 동생들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할 대비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령군은 21세의 젊은 나이로 숙종보다 1년 앞서 급서해버렸고,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도 즉위 4년 만에 아들 없이 급서해, 결국 숙종의 예상대로 동생인 연잉군이 왕위에 올라 52년간 재위한 조선조 최장수 임금 영조가 되었다.
제왕의 운명이 집터 때문이라면, 창의궁이야말로 최고의 집터라고 할 수 있다. 영조 생전에 이 잠저는 제왕의 기념비적인 장소로 보존되었고, 영조 사후에는 정조의 형 의소세손의 사당과 정조의 세자였던 문효세자의 사당을 설치해 영조계 왕족의 성소로 받들어졌다.
영조 일가의 도시, 서북촌
숙종이 아들 바보였다면, 영조는 딸 바보였다. 영조는 특히 화유옹주와 화순옹주, 두 딸을 총애했는데, 화유공주가 시집을 가자 창의궁 바로 북쪽에 창성궁을 지어 살게 했다. 창성궁 터는 나중에 진명여고가 되었고 현재는 청와대 경호시설이 들어섰다. 화순옹주는 김한신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다. 현재 통의동 백송 터 바로 옆이 김한신의 월성위궁 터였다고 하니, 창의궁 바로 인근이었다. 사랑하는 두 딸을 자신의 잠저 옆에 시집가서도 머물게 했던 것이다.
영조의 서북촌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조 자신은 최장수 군왕으로 막강한 권력과 지위를 누렸지만, 그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궁중 무수리 출신으로 일생 최대의 콤플렉스였고, 또한 생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즉위 첫 해에 창성궁 북쪽에 생모의 사당인 육상궁을 지었다. 육상궁은 구한말에 서울 시내에 산재한 6개의 사당들을 옮겨와서 현재의 칠궁이 되었다.
영조가 사랑했던 또 한 명의 여인은 영빈 이씨였다. 후궁인 영빈은 사도세자를 비롯한 1남3녀를 낳았고, 영조 생전에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영빈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여, 육상궁을 마주보는 서쪽에 사당을 세웠는데, 나중에 선희궁으로 승격되었고, 현재 서울 농학교 자리이다.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 신분인 생모와 부인, 곧 고부간의 동병상련을 서로 위로하도록, 음택의 위치까지 고려해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경복궁의 서쪽 지역은 창의궁, 창성궁, 월성위궁, 육상궁과 선희궁 등 영조 일족의 음택과 양택으로 가득한 조선 최고의 지역이었다. 그 중에서도 중심부는 현 통의동 35번지 일대인 창의궁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역시 이 최고의 명당을 탐내어, 식민 통치의 핵심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웠다. 이 일대에는 당시 세웠던 동척의 사택들이 아직도 일부 남아있어, 음식점 등으로 쓰이고 있다.
해방 후, 창의궁 터는 108개의 필지로 쪼개져 여러 주택과 건물들이 세워졌고, 그 중 하나의 필지가 남겨져 아름지기 재단에 넘겨져 새 사옥을 짓게 되었다. 아름지기 터는 창의궁 터의 동남쪽 모퉁이에 해당하며, 지하 발굴 과정에서 그 동남 모퉁이로 추정되는 담장 터를 확인하였다. 1층 주차장 바닥에 비스듬하게 표시된 돌 줄은 그 담장의 위치를 흔적으로 남긴 것이다. 발굴된 담장에 쓰였던 원래의 석재들은 지하 선큰 정원에 다시 복원하였다. 유적 옆에 발굴 당시의 유구를 그린 도면과 설명을 곁들여 전시하고 있다.
효자 문화거리의 시작점
아름지기 새 사옥이 건립된 터는 이처럼 특별한 역사를 지닌 땅이다. 희대의 군왕을 배출한 땅이며, 한때 왕궁에 버금가는 로얄티를 가졌던 땅이다.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아름지기 재단의 보금자리로는 더 없이 맞춤인 위치이다. 현재 이 지역은 더욱 의미 깊은 변화를 시작하고 있다. 경복궁의 동쪽, 삼청로에 세워지기 시작한 미술과 문화시설들이 드디어 경복궁을 넘어 서쪽 효자로에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아름지기 사옥 바로 뒤의 대림미술관은 이미 서울의 중요 문화발신지가 되었고, 진화랑이나 갤러리 시몬 등 크고 작은 화랑들이 달이 다르게 오픈하고 있는 이 거리에 드디어 복합 문화공간인 아름지기 사옥이 문을 열었다. 아름지기 사옥은 이 문화거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위치적으로 시작이기도 하지만, 북쪽의 보안여관 일대가 복합문화공간으로 공사를 시작했고, 여러 문화공간들이 계획 중이기에 시기적인 기폭제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왕가의 최고급 문화를 배태했던 지역이었다면, 앞으로는 창조적인 예술과 시민문화를 발신하는 중요한 명소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 사옥 2층에 마련된 마당은 현대에 부활한 창의궁 터이며, 2층의 한옥은 새롭게 세운 창의궁이다. 이 유서 깊은 땅에서 아름지기는 또 다른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