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15.01.25.
출처
이종호연구집
분류
서평

회의와 같이 공식적인 대화를 나눌 때면, 그는 늘 메고 다니는 검정 백팩 속에서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몇 차례 화면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 초기 메뉴에는 적어도 3가지 프로젝트가 진행 중에 있었다. 하나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발표 단계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창 연구 중에 있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이제 막 시작 단계의 프로젝트였다. 동시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성격도 다양했다. 이순신 기념관과 같은 건축물 설계 작품도 있었고, 경기도 전역을 다루는 국토 차원의 계획이 있는가 하면, DMZ 전시회와 같은 미술 영역의 작업도 있었다. 생전에 고 이종호 교수가 보여주었던 그 거대한 업적의 편린들이다.
그가 어떤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간간히 뜬금없이 던지는 질문들, 깨달음의 기쁨에 들떠 전해주는 새로운 이론과 정보들로 비추어, 나를 비롯한 대개의 건축가나 학자들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넓이와 깊이의 세계를 구축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언젠가 그의 연구와 창작의 세계에 들어가 그가 깨닫고 이룩한 결과들만 섭렵해도, 꽤 그럴싸한 지식과 견해를 거저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불시에 떠나고 말아 내 얄팍한 희망은 쓰라린 안타까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고 이종호 교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도시건축연구소를 기반으로 정말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늘 새로운 프로젝트를 접할 때마다 누구와 함께 할까를 먼저 생각했는데, 그 결과 비단 건축이나 도시 분야 뿐 아니라, 지리학, 사회학, 경제학, 인문학, 지역운동 등 다양한 전문가들과 공동 연구의 성과를 남겼다. 이 책은 그 많은 업적의 중요한 부분들을, 같이 참여했던 각계의 고수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이며 헌사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공간사 시절부터, 건축가 이종호는 일찍이 건축계가 인정하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스튜디오 메타를 설립하고 발표한 초기의 작품들로 30대 초반의 이종호는 이미 한국의 대표 건축가 반열에 들기 시작했고, 40대에는 서울건축학교의 주축으로 건축계의 리더가 되었다. 너무 일찍부터 건축계의 조명을 받은 탓일까, 아니면 건축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일까. 한예종 건축과 교수가 되고 도시건축연구소를 설립한 이후에는 건축보다는 마을과 도시와 국토에 천착했다. 이 책에 소개된 연구들은 모든 것에 대한 계획가로서 50대의 이종호가 생의 마지막까지 연구하고 제안했던 알맹이들이다.
그의 관심은 이 땅에 방치된 모든 지역의 잠재력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관심은 초기 작품인 강원도 홍천의 작은 교회들이나, 대표작인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부터 나타났다. 단지 점과 같은 건축적 해결을 넘어, 지역으로 그 범위를 넓힌 것에 지나지 않다. 평창, 대구, 나주, 순천, 광주, 한강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까지 그의 지역적 관심은 거칠 것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내부로 파고들어 을지로, 용산 등 문제지역을 연구하고, 더 들어가 세운상가의 재생 연구를 못 다한 채 생을 마감했다.
그의 연구들은 철저하게 공공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것들이다. 프로젝트의 발주자들은 지자체로 대표되는 관官이었으나, 대개의 관 발주 프로젝트들의 발주처의 의도를 전문적으로 포장해주는 것과는 달랐다. 그에게 중요한 대상은 시장이나 군수가 아니었고, 그 지역의 주민과 문화였다. 때문에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가장 적절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공동 연구를 행하면서,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합리적인 비전들을 무기로 시장과 군수를 설득하고 실무자들을 감동시켰다. 그와 같이 일한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관청의 공무원들도 그의 성실함과 탁월함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숱한 어용학자나 관변업자들보다 훨씬 많은 프로젝트를 부탁받았던 비결이다.
그는 일생을 뛰어난 건축가로서, 진지한 인문인으로서, 그리고 성실한 교육자로서 살았다. 그의 이러한 성품들은 곧 연구 결과들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그 지역과 대상을 역사, 지리, 경제, 사회적으로 분석했으며, 대상의 잠재력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비전을 제시했다. 그의 대안들은 건축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들이며, 사회적으로 달성 가능한 해법들이었다. 방향과 개념만 지시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간으로, 계량적인 물량까지 제시했다. 여기의 모든 연구 결과는 냉철한 두뇌과 따뜻한 마음, 감수성이 풍부한 손까지 두루 갖춘 고 이종호 교수가 우리 사회에 남긴 소중한 선물 보따리다.
그는 2014년 2월 21일, 우리 곁을 떠났다. 아울러 다시는 이러한 넓이와 깊이를 가진 연구를 기대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이종호의 순수한 성품과 뛰어난 능력과 공동체적 열정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법적 실재가 외면했던 그의 순수와 열정을 이 책에서 다시 확인한다. 그의 육신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이종호라는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으리라.

2015년 2월 21일

김봉렬 (친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