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섬이다.
-이 섬은 서쪽으로 황해를, 동쪽으로 강화해협을, 북쪽으로 한강과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에 면하고 있다.
-황해 너머에는 중국이, 임진강 북쪽에는 고려시대 (10C~14C) 수도였던 개성이, 한강에는 조선시대 (15C~19C) 수도였던 한양 (지금의 서울)이 자리 잡았다.
1. 고인돌의 쇼룸
이러한 강화도의 지정학적 성격은 곧 강화도의 역사가 된다. 인류는 서에서 동으로 이동해왔고, 문명 역시 동진해 왔다. 동아시아의 지중해 -황해를 힘들지 않게 건넌 사람들은 그들이 가져온 문명을 한반도의 중심부에 전하려 했고, 그들이 바다 건너 처음 만난 땅인 강화도에 그 문명의 시작들을 심어 놓았다.
청동기 시대 인류가 남긴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은 전 세계에 40,000여기가 분포한다고 보고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반도에 남아있는 고인돌은 전 세계의 절반인 20,000기 정도가 되고, 강화도에도 120여기의 고인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졌다. 낮은 몸통 돌 위에 두툼한 머리 돌을 얹은 ‘바둑판식 고인돌’은 한반도의 남쪽에 많이 분포해서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4개의 높은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얇은 머리돌을 얹은 ‘탁자식 고인돌’은 북쪽 지방에 많이 분포해서 ‘북방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개성과 서울이 있는 중부 지방에는 남방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지만, 강화도는 특이하게도 북방식 고인돌이 많이 남아있다. 물론 남방식 고인돌도 섞여있다.
강화도는 황해안을 따라 내려온 북방식 문화의 남한계선이고, 반대로 올라온 남방식 문화의 북한계선이다. 한반도가 ‘고인돌 왕국’이라면, 강화도는 ‘고인돌 쇼룸’이라 할 수 있다. 선사시대부터 여러 줄기의 문명들이 교차하고 혼합하여 이 섬의 문화를 만들어왔다.
2. 외침이 민족을 단결시켰다
1237년 7월 7일, 장마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었다. 당시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 몽골의 침략을 피해 고려 정부는 그 장대비를 뚫고 개성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새로운 수도로 선정된 강화는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었고,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공격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반면에 고려 정부에게는 개경과 가깝고 지방과의 연결 혹은 배를 이용한 세금의 수납 등 매우 편리한 곳이었다.
이 지리적 이점을 등에 업고 고려는 세계제국 몽골과 무모한, 그러나 끈질긴 싸움을 벌였다. 비록 강화도를 제외한 모든 국토는 잔인하고 강력한 몽골군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했지만, 39년 동안 강화도의 정부는 줄기찬 항쟁을 벌여 몽골을 지치게 만들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일대 위기의 전쟁 속에서도 방대한 불경들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을 제작하여 세계적인 유산을 남겼고, 최고 품질의 고려청자를 생산하는 등 일대 문예부흥기를 구가했다. 그때의 흔적은 고려궁 터와 선원사 터로 남아있다. 고려궁터는 현재 강화읍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강화유수부를 설치하여 강화읍의 행정을 총괄했으며, 왕실 도서보관소인 외규장각을 두었다.
고려 정부는 ‘팔만대장경’을 제작하여 불교의 힘으로 몽골의 침략을 극복하려 하였고, 그 제작소인 선원사는 고려 정부의 종교적 거점이었다. 1290년 고려 정부가 또 다시 강화로 옮겨왔을 때 2년 동안 왕궁 역할도 했던, 왕궁과 버금가는 규모와 품격을 자랑했던 절이다. 기록에 의하면 13세기에는 이곳이 바닷가였고 대장경판의 원목 산지인 거제도에서 목재를 싣고 선원사 앞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길이 250m, 폭 170m 규모의 계단식 터만 남아 있다.
절대 절명의 외침 앞에서 고려인들은 한 조상의 자손으로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적 단결을 통해 몽골군과 대항하게 되었다. 한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는 신앙의 차원으로 승격되어 불교와 함께 민족적 종교로 자리 잡았고, 고려가 임시수도로 삼은 강화도 역시 단군이 다스렸던 곳으로 믿는 성역화 작업을 진행했다. 구체적인 증표가 필요했다. 섬 안에서 가장 높은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을 쌓아 단군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라는 증거를 만들었다. 그 후 여러 차례 고쳐 쌓아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현재 참성단은 두 단으로 이루어져, 아랫단은 둥글고 윗단은 네모난 형태이다.
강화도 남부의 정족산 역시 단군과 관계된 성지가 되었다. 이곳에 산성인 삼랑성을 쌓고, 단군의 세 아들이 원래부터 쌓았던 산성이라 주장했다. 이 산성 안에 고려의 임시 궁궐을 마련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족보와 역사서를 보관하는 사고를 두었다. 수도권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3. 적은 내륙에서 오다
수도 서울은 동서남북에 4개의 요새를 가졌다. 북쪽에는 북한산성, 남쪽에는 수원화성, 동쪽에는 남한산성, 그리고 서쪽에는 강화도라는 요새를 마련했다. 이들은 서울을 방어하는 곳이 아니라, 유사시에 서울을 비우고 정부가 옮겨오는 임시 수도를 대비한 곳이었다.
내륙을 통해 밀고 들어온 몽골 내침의 기억은 이후 강화도의 기본적인 수비 체계 틀이 되었다. 한국의 역대 왕조는 중국의 한족 왕조와 전통적인 유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쪽 황해를 통해 외적이 침입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중국 대륙을 이민족 왕조가 장악한다 하더라도 유목민인 이민족이 바다를 통해 공격해 올 확률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강화도의 방어선은 내륙과 마주한 동쪽 강화해협 쪽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강화 전역에 5진과 7보를 설치했는데, 현재로 치면 대대급에 해당하는 것이 ‘진’, 중대급에 해당하는 것이 ‘보’라는 군사단위로 각각 성곽을 쌓아 방어기지를 구축했다. 각 진과 보에는 3~5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총 53개의 돈대가 있었다. 돈대란 방어용 최소 단위로 대포를 설치한 해안가 진지였다. 이 가운데 34개의 돈대가 좁은 강화해협 쪽에 배치되었다. 외적은 서울쪽 내륙에서 오기 때문이다. 현재 덕진진과 초지진, 광성보 등이 복원 정비되어 19세기 방어시설의 대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19세기 말에 있었던 3번의 외침에서 처절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프랑스군의 침략(1866), 미국 해병대의 침략(1871), 그리고 일본 전함 운요호의 포격 (1875)은 모두 황해 바다를 건너 이루어졌다. 동쪽 해안에 치중했던 강화도의 방어선은 서쪽의 공격에 대해 거의 무방비 상태였고, 섬에 상륙한 외국군은 외규장각과 정족산사고 등을 점령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경’을 비롯한 귀중한 문헌 등을 탈취하였다. 직지심경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동쪽 해안 수비대들도 공격을 당해, 광성보를 수비하던 어재연 장군은 부하 600여명과 함께 전원 전사할 정도였다.
4. 문명은 바다에서 오다
서쪽 바다는 중국 대륙을 향해 열려 있었고, 중국에서 건너오는 최신 문물들은 강화도를 거쳐 내륙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한국의 3대 종교인 불교, 유교, 기독교가 모두 이 바다를 건너 전파되었다.
강화도 전등사에는 중국 송나라 때(1097) 회주 숭명사에서 제작한 범종이 보관되어 있다. 철로 제작된 이 종이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기록은 없지만, 고려시대에도 중국과 강화도 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가 된다.
강화도 북서쪽 교동도에 있는 교동향교는 한국 최초로 성리학을 수입한 성리학 학교로 평가된다. 한국 최초의 성리학자인 안향이 1286년 중국 유학에서 귀국하는 길에 교동도에 도착하여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한다.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은 이후 한국의 국학이 되어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이 되었으니, 그 사상적 뿌리는 강화도에서 시작된 셈이다.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더불어 기독교가 다양한 통로로 전파되었다. 특히 영국 성공회는 강화도를 ‘조선의 Iona섬’으로 만들기 위한 선교 전략을 실천했다. Iona섬은 영국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전파할 때 전초기지로 삼았던 섬이다. 1890년대 강화성곽 부근에 ‘성니콜라스 회당’을 세웠다가, 1897년 강화읍 정상에 강화성공회성당을 건축하게 된다.
강화성공회성당은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술과 유럽 기독교교회의 공간 구조를 결합한 ‘한-양 절충건축’의 본격적인 시도였다. 1911년에는 강화도 온수리성공회성당이 토착 교인들의 성금으로 건축되었으며, 역시 한-양 절충식 교회였다. 이 교회 형식은 내륙으로도 전해져 청주와 수원 등 각지의 성공회 성당의 건축형식으로 도입되었다.
5. 3개의 바다를 읽는 법
한반도를 둘러싼 3면의 바다는 각각 육지와 만나는 지형적 방식이 다르고, 이에 따라 각 바다가 고유한 경관을 연출한다. 높고 급한 산맥 때문에 동해안에는 뚜렷한 해안선이 형성된다. 조수 간만의 차이도 거의 없고, 섬들도 없다. 따라서 동해안은 선적(linear)인 바다가 되며, 동해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해안에 서서 큰 곡선을 그리는 해안선을 바라보아야 한다.
남해안은 세계에서도 굴곡이 심한 해안의 하나로 꼽히는 이른바 리아스식 해안이다. 수많은 섬들이 육지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떠있는 다도해다. 남해안의 풍경을 그리면 결국 무수한 섬들이 점점이 찍히게 되는 점묘화가 된다. 남해안은 점적인 바다이며 해안의 높은 산위에서 감상할 때 점묘바다의 참 맛을 느끼게 된다.
반면 서해안은 면적인 바다다. 드넓은 개펄을 가진 서해안은 육지와 바다의 구별이 모호하다. 썰물 때가 되면 바다가 육지로 바뀌며 매일 그 면적과 형태가 달라진다. 그 전모를 파악하려면 공중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안된다. 서해안은 면으로 이루어진 바다이며, 강화도는 서해안에 있다.
중국 대륙을 굽이굽이 관통하면서 km의 긴 여정을 끝낸 황하는 황토고원의 미세한 진흙 입자들을 황해로 운반한다. 수십만 년 동안 퇴적된 막대한 양의 진흙은 한반도 서해안에 광대한 갯벌을 형성한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거의 없어 썰물 때 넓게는 2~3km에 달하는 갯벌이 노출되며, 이 저습지를 메우면 어렵지 않게 농사를 지을 땅을 얻을 수 있다.
6. 떠오르는 땅, 줄어드는 바다
1237년, 고려 정부가 강화도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옮겨오면서 강화도는 심각한 토지 난에 봉착하게 된다. 불과 수천의 인구가 살던 한적한 농경지에 수십만의 인구가 대규모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강화도는 저습지인 갯벌을 매립하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여 800여 년간 섬 전체 면적의 50%에 달하는 새로운 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땅은 넓어졌지만 잃는 것도 많았다.
간척 이전의 강화도는 크고 작은 산 사이에 협곡이 발달하여 강화읍까지 들어오려면 좁은 수로를 따라와야 하는 천혜의 방어용 지형이었다. 특히 남부의 마니산 일대는 아예 별도의 떨어진 섬이었다. 또한 섬 주위는 넓은 갯벌로 둘러싸여 배를 댈만한 항구가 극히 드물었다. 고려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며 39년간 세계 최강의 몽골을 상대로 저항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배를 댈 수 없고, 상륙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지반인 갯벌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세기간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사라지고 해안선이 뚜렷해졌다.
이 지형의 변화를 무시하고 17세기의 조선 정부는 중국 청나라의 침략을 피해 다시 강화도 피난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갯벌이 사라진 강화도 해안에 어렵지 않게 상륙하여 조선 정부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강화도는 더 이상 견고한 요새가 아니었다.
섬은 바다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바다가 육지로 끊임없이 바뀌는 강화도는 섬으로서의 특징과 잠재력을 점차 잃어왔다. 수도의 서쪽 요새가 될 수 있었던 접근 불가성도 사라졌고, 육지-갯벌-바다로 이어지는 풍부한 생태계를 잃어버렸다. 원래 이 섬의 표면은 생태학적 표면이었다. 육지의 견고한 동식물과 바다의 유동적인 생물계를 이어주는 갯벌의 생태계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으나, 갯벌의 소멸과 더불어 육지와 바다의 생태계는 단절되고 있다. 중간층의 소멸- 강화도가 잃어가는 가장 안타까운 잠재력이다.
7. 전등사와 정수사 -산의 건축
서해안을 바라보면, 원래의 강화도 해변을 바라보면 매우 부드럽고 연약한 표면 (soft surface)의 땅을 떠올리게 되고, 여기에 지어지는 건축물은 연착륙(soft landing)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과거의 건축들은 연착륙을 할 기술적 가능성을 갖지 못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강화도의 모든 건축물은 해안이 아닌, 산으로 올라갔다. 산은 안전한 곳이고 바다는 불안하고 위험한 자연이다. 그래서 산 위에 산성을 쌓고, 가장 높은 대지에 궁궐을 짓고 사찰을 만들었다.
정족산성 안에 섬 안 최대 사찰인 전등사가 있다. 정족산 사고를 지키는 군사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조성된 산성 수호사찰이다. 정족산성의 옛 지도를 보면, 계곡의 끝 정상에 사고가 자리 잡았고, 전등사는 그곳에 오르는 길의 한 편 언덕에 조성됐다. 다른 절이었으면 사고 자리에 사찰이 위치했을 것이다. 규모도 크지 않다. 일반인의 포교를 위해 만든 절이 아니라 산성에 근무하는 군인들의 안전과 무운을 빌기 위해 만든 일종의 군용 사찰이기 때문이다.
전등사 대웅전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17세기의 기술과 미학을 잘 적용한 명품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대웅전 모퉁이 기둥 위에는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생물체를 조각해 넣었다. 불경에 등장하는 원숭이 상이라는 설도 있고, 벌거벗은 여인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산성과 사고를 구축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찰을 만드는 공사를 담당한 것은 국가 예산을 사용하지 않고 민간의 노동과 기술을 차출했던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국가의 수호를 위한 국방사업은 곧 민간에게는 희생과 피해였다. 장인들은 자신의 고통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에 대한 저주였을까? 또는 부당한 노동을 강요했던 국가 권력에 대한 은유적인 비판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비록 강제된 노동이지만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던 종교적 염원이었을까?
정수사는 강화도의 성산인 마니산을 지키는 작은 사찰이었다. 정수사에서 바라보는 강화도의 풍광은 단연 으뜸이지만, 이 궁벽한 산 위의 절까지 올라오는 신도들은 많지 않았다. 소수의 농민들과 어민들, 그리고 이제 막 경제적 부를 쌓기 시작한 강화도의 중소 상인들이 이 작은 절을 후원하고 법당을 새롭게 지었다. 이 절의 법당의 창문 조각은 꽃병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소재로 한 놀라운 작품이다.
18~19세기에 경제력을 갖추기 시작한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집 안을 화초나 새와 애완동물, 책 등으로 장식하기를 원했다. 모두 귀족층들의 즐기던 풍조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귀족층과 같은 경제력을 갖지 못해 실물을 소유하고 장식할 수 없었다. 대신 등장한 것인 화초, 새, 책들을 그림으로 그린 이른바 ‘민화 -일반민의 그림’이었다.
정수사 법당의 창문들은 민화의 소재와 기법을 사용한 조각품이다. 건물의 벽면을 화면으로 이용함으로써 민간의 염원을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건물의 규모를 크게 만들 수 없었던 한계를 장식으로 극복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창문을 과도하게 장식함으로써 내부에 유입되는 빛의 양을 감소시켜, 채광이라는 창문 본연의 기능을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적 건축이란 기능보다는 염원을 우선으로 담는 것이 아닌가?
8. 성공회 성당 -바다의 건축
산 속에서 이루어지던 전통적인 건축 환경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다를 건너 상륙한 이국의 종교건축이었다. 영국 성공회는 이미 한반도에 전파된 다른 교파의 건축물과 차별할 수 있는 건축적 전략을 모색하고, 그들만의 특징적인 건축형식을 정했던 것 같다. 토착 건축형태(vernarcular architectural form)와 기독교 고유의 공간형식(spatial type)을 결합한 혼성형식을 한반도의 성공회 성당건축의 형식으로 한다는 전략은 강화도에서 처음으로 실험되었다.
평면은 Basilica 형식을 충실히 따랐다. 장축형 공간으로 naive와 aisle이 있으며, naive는 aisle보다 층고가 높아 그 사이로 clearstory를 마련하여 내부로 하늘의 빛을 유입시켰다. 공간형식은 전형적인 중세 유럽의 교회건물이다. 내부의 안치된 세례반이나 제단 뒤편의 출입문은 영국에서 직접 제작하여 가져 온 것이다.
그러나 재료와 구조 공법은 한국의 전통적인 기술에 의존했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가구식 구조(post and lintel system)의 지붕틀을 얹었으며, 한국의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 그 앞에는 3겹의 한국식 대문채을 두어 마치 전통적인 불교 사찰을 들어오는 것 같은 모습이다. 본전 뒤에는 사제관을 두었는데, ㄷ자형의 전형적인 한옥이다. 전체 배치는 진입 문들 -본전 – 배전으로 이루어지는 불교 사찰의 배치법을 따랐다. 건물들의 외형도 사찰건물과 같다. 그러나 본전의 짧은 면을 정면으로 삼아, 건물의 긴 면을 정면으로 삼았던 한국건축의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설정했다.
2층 한옥건물을 90도 틀어서 배치했을 뿐이지만, 언덕의 정상부에 놓여진 성공회성당은 강화읍내를 향해 항진하는 배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어업에 종사하는 강화 사람들을 향해 전도하려는 의지의 표상일까? 아니면 해양제국 영국의 위용을 드러내고 바다를 건너 상륙한 외래 건축의 상징일까?
기독교 공간의 내용을 한국적 건축형식 속에 담았듯이, 기독교의 교리를 한국 전통의 사상적 틀 안에서 수용했다. 강화성공회성당의 기둥에 걸려있는 주련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시작과 끝이 없는 이 세상에서 소리와 모습을 먼저 지으셨으니 참된 주인이시라)”
“宣仁宣義聿照拯濟大權衡 (어질고 옳음을 널리 펴시며 무리를 비추시고 구하시니 큰 저울이시라)”
기독교의 세계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멸망과 심판의 때가 있는, 시작과 끝이 분명한 세계이다. ‘무시무종’이란 불교와 유교의 세계관이다. 또한 인(仁)과 의(義)를 피는 것은 유교적 제왕의 임무이지, 기독교 하나님의 권능은 아니다. 한-양 절충적인 성공회 성당건축과 같이, 유교와 기독교의 혼합적 사상은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상륙한 수륙양용의 전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