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1.07.11.
출처
아시아나
분류
건축문화유산

1. 정여창
鄭汝昌(1450,세종32-1504,연산군10)은 조선 전기의 文臣 學者로 本貫은 河東, 字는 伯勖, 號는 一두 判典農寺事 復周의 손자이며 咸吉道 兵馬右侯 贈漢城府左尹 六乙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金宏弼과 함께 金宗直의 門下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論語>에 밝았고 性理學의 근원을 탐구하여 體用의 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11)에 成宗이 成均館에 諭書를 내려 行實을 닦고 經學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成均館에서 그를 제일로 薦擧하였다. 知館事 徐居正이 그를 經筵에서 進講하게 하려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8월에는 成均館 上舍의 同列에서 그를 理學으로 推薦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하고, 어머니가 죽자 衰服(최복)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侍墓하였다. 그 뒤 智異山을 찾아가 晋陽의 岳陽洞(現 河東 岳陽)에 들어가 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參議 尹就에 의해 孝行과 學識으로 推薦되어 召格署參奉에 除受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成宗은 그의 辭職上蔬文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 라고 쓰고 사임을 允許하지 않았다.

그 해 別試文課에 丙科로 及第하고, 藝文館檢閱을 거쳐 侍講院說庶로서 正道로써 東宮(연산군)을 輔導하였으나 東宮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疾苦가 賦斂에 있음을 알고 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만에 정치가 맑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監事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遠近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를 돌아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春秋로 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戊午士禍 때 경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甲子士禍 때 剖棺斬屍되였다.

정여창은 ‘左江 安東, 右江 咸陽’이라 할 때 우강 함양의 기틀을 이루었으며 中宗代에 右議政에 贈職되었다. 학덕으로 성리학사에 큰 족적을 남겨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1610년(광해군 2)에 文廟에 배향되었다.

羅州의 景賢書院, 尙州의 道南書院, 咸陽의 藍溪書院, 陜川의 伊淵書院, 居昌의 道山書院, 鍾城의 鍾山書院 등에 祭享되었다. 著書로는<一두遺集>이 있다. 諡號는 文獻이다.

2.남계서원

* 소재 : 慶尙南道 咸陽郡 水東面 院坪里
* 배향자 : 鄭汝昌, 姜翼, 鄭蘊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91호

1552년(명종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명종21)에 ‘藍溪’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으로 승격 되었으나, 1597년(선조30) 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그 뒤 숙종 때 姜翼과 鄭蘊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별사에 兪好仁과 鄭弘緖를 배향하였다가 1868년에 별사를 훼철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 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선현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 전사청, 명성당, 양정재, 보이재, 애련헌, 영매헌, 풍영루, 묘정비각, 고직사 등이 있다. 정여창을 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성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居敬齋, 오른쪽 협실은 執義齋라 하며,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동재인 양정재와 서재인 보인재에는 각각 연못과 애련헌, 영매헌이 있다. 매년 2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은<御定五經百篇> <고려사> 등 59종 317책이 있으며,재산으로는 전답 1만 4500여평, 대지 6천평, 임야 1.5정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