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왕국 新羅의 古都인 慶州는 한국 최고의 유적지요 관광지다. 그러나 신라가 멸망한 후 1,000년의 세월이 더 흐르면서 당시의 화려했던 도시와 건축의 모습은 사라지고, 발굴된 몇 개의 절터와 왕궁 터만 남아있다. 歷史無常인가, 경주에서 신라는 모두 땅 속에 묻혀있는 동결된 왕국인 것만 같다. 그러나 역사는, 특히 1000년간이나 지속했던 신라의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도시는 일정한 밑그림을 깔고 직조된 양탄자와도 같다. 양털의 두터움를 자랑하는 페르시아 양탄자의 문양이 아무리 화려하고 정교하다고 할지라도, 그 밑판에 그려진 밑그림대로 짜여졌을 뿐이다. 도시의 밑그림은 가로망과 하천, 그리고 구획된 필지들이다. 가로망과 하천 위에는 건물을 세울 수 없고, 단지 가로망으로 구획된 街區 안에, 미리 정해진 筆地의 모양대로 건물을 세울 뿐이다. 따라서, 비록 입체화된 건물들이 현대의 것들이라 하더라도, 역사도시의 가로망과 하천의 흐름, 심지어는 하나 하나의 필지마저도 과거에 이미 그려진 것일 수 있다. 과거에 그려진 밑그림 위에 새롭게 세워진 도시와 건축물들. 경주를 천년의 고도라 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그렇게 역사가 퇴적된 지층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건축물들에서도 그러한 역사적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경주 안에서 현존하는 건축물 가운데, 천년 전 신라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건축물을 꼽으라면 우선은 佛國寺와 石窟庵이다. 불국사의 기단과 축대들, 그리고 석굴암은 모두 신라 때 가공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첨성대 등 석조건축은 과거의 형태가 변하지 않고 보존된 박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진화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년 전 신라의 향기를 전하고 있는 건축들도 있다. 西岳書院과 慶州鄕校가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들의 건물은 비록 17-18세기의 것들이지만, 그 형식과 형태에서 신라건축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살아있는 건축적 화석이라 할 수 있다.
西岳書院은 慶尙北道 慶州市 西岳洞 615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경주는 적당한 높이의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경주를 감싸는 사방의 중요한 4산은 明活山(동), 仙桃山(서), 朗山(남), 그리고 小金剛山(북)이다. ‘서악’이란 바로 선도산을 지칭하며, 西岳書院은 선도산 자락을 뒤로하고 그 앞에 펼쳐진 평지에 자리잡았다. 서원의 이름은 앞산의 이름을 따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풍산을 바라보는 병산서원, 자옥산을 바라보는 옥산서원 등이 그러하다. 그만큼, 서원건축은 앞산의 형상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西岳書院은 뒷산을 따라 이름을 정했다. 뒷산 이름을 따르는 것은 불교사원에서 나타난다. ‘태백산 부석사’, ‘조계산 송광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로 사찰건축은 뒷산의 형상에 맞추어 자리를 잡았고 공간을 창조했다. 西岳書院은 서원의 일반 예를 무시하고 불교적 作名法을 따른 것이 된다. 왜일까?
또한 세워진 위치도 특이하다. 서원의 우측(남쪽) 능선에는 4개의 커다란 고분들이 인공적인 산맥을 이루고 있다. 바로 신라 太宗 武烈王의 왕릉이다. 또한, 좌측(북쪽) 2km 떨어진 선도산 줄기에는 金庾信의 大墓가 있다. 金庾信 장군은 경쟁국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신라의 삼국통일을 주도한 대영웅이며, 무열왕은 金庾信의 평생 동지였으며 주군이었다. 삼국통일의 두 주역 사이에 자리잡은 西岳書院은 원래 金庾信 장군의 위업을 후세에 길이 새기고자 1561년에 건립된 서원이다.
서원에 모셔지는 인물들은 위대한 성리학자들, 즉 문신이요 지식인들이다. 西岳書院은 예외적으로 성리학과는 거리가 먼 무신이며 직업군인인 金庾信을 모시고 있다. 이러한 破格은 건립 당시에도 숱한 비판거리가 되었다. 金庾信 장군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性理學의 殿堂에 奉安될 수 있는가? 西岳書院 건립주도자들은 이 비난을 약화시키기 위해 薛聰과 崔致遠을 추가로 配享했다. 그들은 强首와 더불어 신라를 대표하는 3대 문장가로 이름이 높다. 특히 薛聰은 한국 유학의 효시라고 숭상되는 인물이다. 이 서원에 모셔진 3명의 인물은 모두 경주 출신으로서 신라를 대표하는 위인들이다. 西岳書院은 이처럼 그 세워진 위치와 모셔진 인물들부터 신라-경주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金庾信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각종 전쟁에 임해 불패의 신화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급기야 삼국통일의 공로로 그를 위해 특별히 신설한 太大角干의 작위를 받았다. 죽은 후에는 생전의 업적을 기려 興武大王으로 追尊王의 지위에 올랐다. 신라 천년의 역사상, 평민으로서 왕위를 수여받은 이는 물론 그 뿐이었고, 태대각간의 작위를 받은 이도 金庾信이 유일하다. 金庾信이 입지전적 인물이라면, 薛聰과 崔致遠은 매우 흥미로운 개인사를 지닌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薛聰(?-?)은 元曉大師의 유일한 아들이다. 원효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高僧이었고 제일의 천재였다. 그런 그가 경주 시내를 떠돌며 요상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나? 내가 하늘을 고일 기둥을 깍아 보겠네.” 남편없는 귀부인이 자기와 부부관계를 맺는다면, 천하를 이끌고 나갈 당대의 인재를 낳아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노래였다. 어느 보름날 원효는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졌고, 바로 그 앞에 있는 堯石宮에 들어가 옷을 말리다가, 그 궁궐의 주인이며 아름다운 과부였던 堯石公主와 인연을 맺게된다. 승려로서는 破戒이며, 과부로서는 불륜인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薛聰이었고, 원효의 예언대로 薛聰은 유학을 체계화하고 정치 고문으로서 신라 사회를 이끈 당대의 대석학이 되었다.
崔致遠(857-?)은 신라 말에 태어나 12세 때 중국 唐나라로 유학을 했고, 18세 약관으로 당의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복무했다. 주로 반란 토벌군의 문사로 일을 했는데, 그가 쓴 檄文들이 반란 진압에 혁혁한 공헌을 세워 일대의 천재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29세에 귀국하여 翰林學士 등을 지내면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잘못된 왕도를 교정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미 신라사회는 멸망의 나락으로 함몰하고 있었고, 崔致遠의 노력은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이 비운의 지식인은 44세 때, 모든 벼슬과 재산을 버리고 유랑을 떠났고, 전국의 명산에는 그의 전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죽은지 몰라 그는 伽倻山의 산신이 되었다는 신화가 전해온다.
西岳書院은 평지에 동향으로 터를 잡고, 멀리 앞쪽으로 명활산을 아스라히 바라보고 있다. 서원의 교육부분은 講堂과 그 좌우로 東齋와 西齋가, 그 앞쪽으로는 樓閣이 배치되었다. 강당 뒤로는 멀찍이 떨어져 사당부가 자리잡아 전형적인 서원건축의 배열을 따르고 있다. 강당인 時習堂은 3칸의 대청과 양끝의 두 온돌방으로 이루어졌다. 동재는 切磋軒, 서재 이름은 澡雪軒이다. 강당의 이름은 ‘學而時習之不亦說好’라는 논어의 유명한 구절에서 따왔고, 두방의 이름인 敬誠齋와 進修齋의 이름은 성리학적 修養의 방법론을 의미한다.
강당 뿐 아니라, 동서재와 누각인 詠歸樓 모두 5칸의 긴 건물들이다. 동서재와 누각은 두께가 1칸 밖에 되지 않는 매우 좁고 긴 건물들이다. 또한 기단은 낮게 지면에 깔리고, 지붕은 낮고 긴 수평선을 이룬다. 전체적으로 지면에 밀착된 듯 수평적인 인상을 가진 건물들이다. 경주지역의 살림집은 앞뒤로 1칸, 옆으로는 5-7칸의 규모로 지어진다. 이처럼 방들이 옆으로 일렬로 붙은 집을 ‘홑집(外通家)’이라 부르며, 경주지역에서는 살림집 뿐 아니라 절집이나 서원같은 공공건축도 종종 홑집 구조를 취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경주만의 지역성이며, 평지가 많은 경주분지에 잘 어울리는 건축형식이라 할 수 있다.
西岳書院은 1592년 임진왜란 때 燒失되어 17세기 초에 재건되었다. 따라서 목조건물들은 400년이 채 못되는 것들이지만, 건물 밑을 지지하고 있는 기단과 초석들은 모두 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1,400년이나 나이를 먹었다. 강당과 內神門, 祠堂의 기단은 돌로 기둥과 지붕모양을 만들어, 마치 목조건물을 모사한 고급 기단이다. 특히 내신문과 사당 기단은 윗면 돌의 아래를 곡선으로 깍아 대단히 정교한 솜씨를 보인다. 건물 기둥들을 받치고 있는 초석 역시 원형으로 정교하게 가공된 것으로 특히 석재 가공에 뛰어난 신라의 솜씨를 보이고 있다. 마당에 있는 庭燎臺는 밤중에 조명을 하기 위한 것으로, 정교한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원래 이 터에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무열왕릉을 제사하고 관리하기 위한 願刹이었을 것이다. 기단과 초석, 정료대는 모두 신라 사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서원에서 재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돌들 위에 조선의 나무기둥이 세워져 건물 자체가 역사적 지층을 구성하며, 西岳書院에 흐르고 있는 강렬한 시간의 격차와 축적이 이 서원의 근본적인 매력이다.
경주의 사찰들은 도심지 평지에 많이 세워졌다. 현재 西岳書院 부근은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지역이지만, 신라시대에는 도심이 이 동네까지도 확대되었었다. 도심사찰은 질서정연하게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었고, 인근 건물들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되도록 낮은 기단을 설치하고 건물을 세웠다. 西岳書院 건축물들이 지면에 밀착되고 옆으로 길게 뻗는 수평적 형상을 하며, 그럼으로써 전체적으로 平活한 공간감을 자아내고 있는 것은 바로, 신라 때 도심사찰의 하부구조를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강당 대청에는 여러 記文들이 걸려있는데, 그 가운데 서원의 규칙과 정신을 적어놓은 <院規>가 눈에 띈다. “모든 학생들은 항상 바르고 견고하게 뜻을 세우고, 학업을 원대히 닦을 것이며, ………” 등의 감동적인 교훈을 내용으로 적고 있다. 경상도의 또 다른 명문서원인 金烏書院에는 원규 외에도 7조의 금지사항을 걸어두었다. “창과 벽을 더럽히는 행위, 교과서 훼손 행위, 학업에 지장을 주는 놀이, 쓸데없이 모이는 행위, 술과 음식을 탐하기, 난잡한 말과 대화, 옷차림 불량” 등을 금했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일탈행위는 똑같은 모양이다.
신라 왕궁이었던 月城 부근 校洞에는 慶州鄕校가 있다. 서원이 사립대학이라면, 鄕校는 공립고등학교나 전문대학 쯤 된다. 향교에도 고을의 크기와 세력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는데, 경상도의 중심 도시였던 慶州鄕校는 규모도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며, 국립지방대학의 격을 가졌던 명문향교였다. 원래 이 터에는 신라시대의 국립대학 격인 國學이 있었다고 전한다. 국학은 682년에 설립되었고, 西岳書院에 봉향된 薛聰은 국학 창시기에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국학이 설립되기 이전에 이 터에는 요석공주가 거처하던 요석궁이 있었다고 한다. 요석공주는 薛聰의 어머니요, 요석궁은 薛聰의 생가가 된다. 아버지인 원효대사가 물에 빠진 다리라는 月精橋는 이 터에서 불과 200m 떨어져 있고, 지금도 橋脚 유적이 남아있다. 薛聰은 자신의 생가 터에 국학을 창시하고, 교수로서 위대한 학자로서 교육에 헌신하여, 한국 유학의 宗祖로 숭상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慶州鄕校 역시 교육부분과 제향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교육부분은 5칸 明倫堂(강당)과 각 11칸의 東西齋로, 제향부부은 3칸 大成殿(孔子의 사당)과 각 16칸의 東西廡(부속사당)로 구성된다. 西岳書院보다는 훨씬 큰 규모지만, 건물들은 西岳書院과 마찬가지로 길고 수평적이며 직선적이다. 한국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처마곡선의 유연함을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한 칸의 크기도 무척 크고 지붕의 높이도 높다. 慶州鄕校의 건물들은 당당하고 강직하다. 부드럽고 유연한 한국건축의 특성과는 예외적이다.
그 까닭은 역시 건물의 밑그림이 되는 기단과 초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건물의 기단과 초석은 신라 때의 것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우물과 계단까지 신라 때 작품이다. 특히 대성전 건물의 기단은 완전하게 조성된 신라 때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초석의 위치도 바꾸지 않고 그 위에 고스란히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기둥 간격 역시 신라 때의 모습이다. 비록 건물은 1600년에 지어졌지만, 그 격식과 형상은 바로 신라의 건축인 것이다. 살아있는 1500년 전의 건물. 西岳書院이나 慶州鄕校가 일반적인 한국건축의 정서를 벗어나 이국적인 풍취를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신라시대는 중국의 당나라 문화가 아시아 전역에 유행하던 국제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신라의 경주 뿐 아니라, 일본의 奈良에도 당나라 건축은 전파되어 3국의 건축문화가 차이가 없던 시대였다. 西岳書院과 慶州鄕校에서 느끼는 이국적 정서는 바로 당나라 건축의 특성이며, 곧 신라건축의 향기이기도 하다. 건축은 역사를 거역할 수 없고, 역사는 대지에 그려진 밑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