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地에 세워진 禮法의 장소 -筆巖書院과 武城書院
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이루었던 畿湖學派는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 출신의 유생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조선 성리학의 嶺南學派와 畿湖學派는 철학적 바탕이 달라서 대립했지만, 동시에 지역적 차별도 뚜렷해 대립의 정도가 더욱 심했다. 畿湖學派 안에서도 지역적인 편차가 있었다. 학파 성립 초기에는 경기도와 전라도 유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17세기 이후에는 주도권이 충청도로 넘어가면서, 전라도에는 뚜렷한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지 못했다. 따라서 전라도에는 충청도나 경상도에 비해 이른바 명문으로 꼽힐 서원들이 설립되기 어려웠다.
전라도 지역의 명문서원이라면 전라남도의 筆巖書院과 전라북도의 武城書院을 꼽을 수 있다. 특히 筆巖書院은 畿湖學派들의 서원건축 형식을 완성한 전형으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존 서원 대다수가 경사지에 세워져 경사지에 맞는 공간형식들을 구현한 것에 비하여, 筆巖書院은 평지에 위치하면서 평지에 적합한 공간을 성공적으로 구성한 예로 평가된다.
筆巖書院 -前堂後齋형의 전형
전라남도 長城郡 黃龍面 筆巖里 377번지에 위치한 筆巖書院(사적 242호)은 金麟厚 (하서 1510-1560)를 모시기 위해 1590년 장성읍에서 서쪽으로 십리 떨어진 岐山里에 창건되었다. 1597년 丁酉再亂 때 소실된 것을 1624년 황룡면 甑山村의 경사진 대지로 위치를 옮겼다가,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재이건했다.
金麟厚는 奇大升(1527-1572)과 함께 전라도 道學을 대표한던 인물로, 왕세자의 스승을 역임할 정도로 학문이 높았다. 퇴임후에는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면서 <河西集>, <周易觀象篇>, <西銘四天圖> 등을 저술하였다. 특히, 한국 최고의 정원인 瀟灑園의 주인인 梁山甫와 사돈지간으로 소쇄원 건축에 깊이 관여하여 건축적 안목도 높았던 인물이다. 양산보의 아들인 梁子澂(1523-1594)은 金麟厚의 사위일 뿐 아니라 학문적 계승자여서, 筆巖書院에 장인과 함께 봉안되었다.
金麟厚의 학문과 인품에 대해서는 “가을의 물과 얼음 항아리 같이 맑고 청정했다”도 하고 “도학과 절의, 문장을 겸하여 가진 분으로 百世의 스승이다”라고도 할 정도였다. 한국의 위대한 유학자 18명을 뽑아 문묘에 배향하는데, 金麟厚는 유일하게 전라도 출신 학자로 꼽힌다.
서원 입구에는 紅箭門과 下馬石, 그리고 오랜된 은행나무가 서 있어 서원의 높은 격을 암시하고 있다. 주요한 건물은 문루인 廓然樓, 강당인 淸節堂, 동서재인 進德齋와 崇義齋, 사당인 祐東祠, 그리고 敬藏閣으로 이루어진다. 경장각은 仁宗이 하사한 御筆墨竹 그림과 正祖대왕이 직접 쓴 현판을 모시고 있는 이 서원의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다. 그외에도 제사 때 사용되는 典事廳, 도서관인 藏板閣과 藏書閣, 서원의 首奴들이 거주하던 汗掌舍, 書院奴들의 거주처인 庫直舍 등이 딸려있다.
筆巖書院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東西齋가 강당 뒤쪽에 위치하여, 강당의 앞마당 보다 뒷마당을 중심공간으로 형성시킨 점이다. 이른바 前堂後齋형의 이러한 서원형식은 畿湖學派 특유의 건축형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畿湖學派에 속하는 서원들이 대부분 毁撤되어 筆巖書院만이 거의 유일하게 완벽한 형식을 보존하고 있다. 남쪽에는 강당, 북쪽에는 사당, 그리고 동서에 齋室들이 놓인 이 마당은 서원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된다. 특히 강당 건물은 사당을 바라보는 뒤쪽이 정면으로 형성되어,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되는 묘한 건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문루와 강당 사이에 있는 마당은 문루의 뒷면과 강당의 뒷면을 면하게 되어 매우 독립적인 마당으로 바뀌게 된다. 문루 역시 강당에 속한 것이 아니라 독립된 누각건물과 같이 취급되었다.
즉, 동서재가 강당 앞에 놓이는 대부분 서원들은 강당 앞 마당과 사당 앞 마당이 두 개의 중심공간을 형성하는 것에 비하여, 前堂後齋형의 筆巖書院은 강당 뒷마당만이 유일한 중심을 이루게 되며, 전체적인 통합성을 극대화시키게 된다.
이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敬藏閣의 위치도 시사적이다. 서원 중심부분으로 통하는 출입문은 강당의 서쪽 코너에 설치되었는데, 이 문을 들어서게 되면 중심마당이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보이게 된다. 敬藏閣은 사당 정문 앞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위치하는데, 이 위치가 출입문에서 가장 중심으로 보이는 위치가 된다. 다시 말해서, 敬藏閣을 가장 부각시키기 위해 이 위치를 택했다고 할 수 있다. 前堂後齋형 서원건축의 특성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이용했던 설계수법이 돋보인다.
筆巖書院 -장식과 보물들
호남의 중심서원으로서 큰 규모를 가졌던 筆巖書院은 몇 개의 부분적인 영역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강당-내삼문으로 이루어지는 중심영역은 물론이고, 그 앞의 루각-강당 사이 비어있는 마당이나, 내삼문 안의 독립적인 사당영역 들이 중심 축상의 3 영역을 이룬다. 또 좌우로는 고직사 영역, 사당 옆의 장판각과 한장사 영역, 그리고 지금은 비어있지만 고직사 안쪽의 강수청 영역과 장판각 앞쪽의 차노사 영역 등 총 7개의 독립된 영역들로 전체를 구성했다. 이들 영역 간의 경계는 물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담장이었다.
만약 筆巖書院이 경사지에 입지했더라면, 이런 부분 영역들은 대지의 높이차에 의해 자연스레 구획됐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지에 입지한 관계로 담장이 발달하게 됐고, 자연히 영역과 영역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夾門들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성리학은 건물을 화려하게 채색하고 요란하게 장식하는 것을 매우 저급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의 서원건물들은 단청도 하지 않고 일절 장식이 없는 소박한 건물들이다. 그러나, 筆巖書院의 모든 건물들은 화려하게 단청을 했고,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장식적으로 꾸몄다.
임금의 하사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敬藏閣은 筆巖書院의 자랑이기도 하다. 추녀 끝에는 龍頭를 조각하고 채색을 했는데, 마치 불사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기법이며, 서원건물로는 이례적이다. 敬藏閣 내부에는 鶴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닫집이 서리되어 있다. 또한, 용 봉황 삼태극 국화 연꽃 등이 비록 소박한 솜씨이기는 하지만 건물의 모든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불교사찰 건물을 만드는 수법이 동원된 특별한 건물이다.
가장 성스러워야할 사당 건물마저도 전면에 龜甲문양으로 장식된 문을 달고 있다. 보통 사당은 두꺼운 판장문을 달아 내부가 어둡지만, 筆巖書院 사당은 한지를 바른 창호를 달아 내부가 무척 밝고 화사하다. 사당 내부에는 金麟厚가 남긴 <天命圖> 병풍이 둘러쳐 있고, 벽면과 들보에는 학 용 연꽃 봉황 잉어 매화 국화 소나무 등 절개와 장수를 상징하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소박함이나 절제와는 거리가 먼, 筆巖書院 특유의 건축관을 엿볼 수 있는 장식들이다.
사당 영역 안에는 조선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石燈이 서있다. 아래부분은 화로와 같이 휘어진 다리를 달고, 위부분에는 집모양의 지붕을 올린 이 석등은 왕실 사당에서나 쓰였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사당 서쪽에는 반듯하게 조성된 望燎位가 놓여있는데, 제사가 끝난 후 祭文을 태우는 곳이다.
장서각에는 <河西集> 등 많은 서책과 문서들이 소장되어 있고, 장판각에는 637판의 판각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서원에 소장된 고문서 14건은 보물 587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이 가운데 <奴婢譜>는 서원 노비들에 대한 필사본 기록으로 노비들의 숫자, 거주처 등이 밝혀져 있다. 노비들은 거의 모두가 독립된 가정을 이루면서 서원에 딸린 토지들을 경작했고, 서원의 제사 때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했다고 한다.
武城書院
全羅北道 井邑市 七寶面 武城里에 위치한 武城書院 (사적 166호)은 매우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서원들은 조선시대의 특정 선현을 모시기 위해 조선 중후기에 창건되었지만, 이 서원의 기원은 멀리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
신라말의 천재적 학자였던 崔致遠 (孤雲 857- ? )을 기리기 위해 고려시대에 사당인 泰山祠로 창건한 것이 武城書院의 오랜 기원이다. 최치원은 한국 유학의 효시로 꼽히는 신라말기의 대학자요 문장가였다. 그는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중요한 중앙의 관직을 사양하고,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옛 泰山고을)에서 현감을 지내며 많은 업적과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태산사는 고려말에 철거되었으나, 1481년 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겨 다시 설립되었다. 향학당은 조선 초, 한국 歌詞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丁克仁(1401-1481)이 <賞春曲>을 쓴 유서깊은 곳이다. 그 뒤 丁克仁 宋世琳 鄭彦忠 金若黙 金灌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종합 사당으로 기능을 했다. 또한, 1544년 이곳 현감이었던 申潛(1491-1554)을 위해 生祠堂 (살아있는 인물을 위한 사당)을 지었는데, 1696년 기존의 泰山祠와 병합하고 서원으로 개편해 오늘에 이른다. 두 개의 사우건축에서 시작하여 확대된 서원이며, 講學을 위주로한 일반 서원건축과는 달리, 제사 행위가 위주가 되었던 서원이다.
마을 안 낮은 구릉을 등지고 평지에 입지한 경내에는 문루인 絃歌樓와 강당인 明倫堂, 그리고 사당인 泰山祠 만이 중심 축선상에 놓여있고, 재실들과 전사청은 담장 밖에 산재한다. 5칸 강당 가운데 3칸 대청은 앞 뒤 모두 벽이나 문이 없어 앞뒤로 시야가 훤히 트인다. 따라서 마당에서 바라보면 강당을 투과해 사당의 내삼문이 바로 보이며, 사당영역이 모든 시선의 중심을 이룬다. 특히 강당 마당 중앙에 廟庭碑를 세워서 사당으로 향하는 중심 축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제향 위주의 서원다운 구성이다.
원래는 경내에 東齋인 講修齋와 西齋인 興學齋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잦은 중건과 중수과정에서 경내가 축소되고 담장 바깥에 講修齋만 독립적으로 위치하게 됐다. 담장 바깥에는 여러 기의 비각들이 서 있어서 이 서원에 관계된 인사들이 많았던 사실도 알 수 있다.
태산사는 1884년에 중수했고, 명륜당은 1828년에 중건했다. 사당과 강당 모두 소박한 규모와 형태를 띠고 있고, 기단과 건물 높이도 낮아 대지에 밀착된 듯 평활한 외형을 갖는다. 이러한 수평적 조형은 충청-전북 지방 건축의 지역적 특성으로 이른바 ‘평지형’ 건축의 비례감각이다.
문루인 絃歌樓에서 평지성의 전통은 여실히 드러난다. 누각을 세우고 그 아래로 출입문을 만든 발상은 평지라는 대지조건과 잘 맞지 않는다. 2층 규모의 누각을 평지에 세우면 뒤편의 강당과 사당 부분이 가려지고, 강당에서의 경관도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각의 층고를 낮추면 출입하기가 불가능하다. 높아도 안되고 낮아도 안되는 평지 누각의 조건은 무척 까다롭다. 絃歌樓는 간신히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층고를 최대로 낮추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결과적으로 낮고 왜소한 모습을 가져서 누각으로서의 당당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武城書院은 현존하는 서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연원을 자랑하는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서원의 중심은 강당과 사당건물이 되지만, 武城書院은 사당을 유일한 중심건물로 설정하고, 강당의 앞뒤를 개방하여 사당을 위한 투명한 틀로 역할하도록 구성한 독창적인 건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