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州의 지형 – 山地와 平野가 만나는 땅
경상북도 尙州시는 산지와 평야가 공존하는 땅이다. 북동쪽은 白頭大干의 험준한 산맥들이 에워싸고 있지만, 남서쪽은 비옥한 평야 가운데 유장한 洛東江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따라서 건축적인 전통도 경사지에 걸맞게 발전한 산지형 건축문화와, 평탄한 지형에 맞추어 발전한 평지형 문화가 서로 만나고 조합되어 독특한 건축형식을 만들어왔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 전통까지도 경북 산간지역의 嶺南學派와 충청 평야지역의 畿湖學派가 서로의 높은 담을 헐고 조우하는 곳이기도 했다.
尙州에는 두 개의 유서 깊은 서원이 있다. 內西面의 興巖書院과 矛東面의 玉洞書院은 비록 그 규모가 크진 않지만, 창건에 특별한 사연이 얽혀있고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을 만큼 건축구성도 독특하다. 두 서원은 모두 18세기초에 창건되었는데, 이 시기는 서원들이 전국에 급증하던 시기로서, 서원의 성격도 변화되었고, 건축 형식도 초기의 고전적 형식을 넘어 새로운 변화와 역동적인 모색이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興巖書院 – 敵陣 속의 主氣派 서원
興巖書院은 경상북도 尙州시 內西面 淵源里, 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1702년 설립되어 1705년 賜額을 받았고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에는 尙州牧使를 역임한 宋浚吉 (同春堂 1606-672)을 봉향하였다. 宋浚吉이 잠시 尙州의 지방수령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그의 고향은 충청남도 論山이었고, 학문적으로는 주기론을 주창하는 기호학파의 거두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영남 南人계열의 최대 라이벌인 西人계의 수장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李滉과 李珥라는 두 巨木에 의해 主理論的 嶺南學派 (李滉)와 主氣論的 畿湖學派 (李珥)로 분할되었다. 두 학파는 정치적으로 東人(영남학파)과 西人(기호학파)으로 대립했으며, 동인은 南人과 北人으로, 서인은 老論과 少論으로 다시 分派되어 이른바 四色黨派의 주역들이 되었다.
기호학파의 계보는 이이에서 金長生으로 이어지고 宋浚吉은 金長生의 수제자였다. 宋浚吉과 친족인 宋時烈 (尤庵 1607-1627)은 김장생의 아들인 金集의 제자였으며, 이 두 송씨는 기호사림과 노론계의 쌍두마차였다. 宋浚吉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들에게는 온화했던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지만, 명쾌하고도 강력한 정치적 논리로서 반대파인 남인계열을 물리치고 서인을 정계의 핵심으로 부각시킨 정치적인 인물이었다고 하다.
尙州지역을 비롯한 영남의 사림들은 정치적으로 남인계열에 가까웠기 때문에 宋浚吉을 최대의 정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영남사림의 본 고장에 政敵을 기념하기 위한 서원을 세웠다는 사실은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의 연고가 있다면, 宋浚吉은 尙州의 정치적 정신적 지주였던 鄭經世 (遇伏 1563-1633)의 사위였고, 잠시나마 尙州牧使를 지내면서 尙州 유림들을 훈육했던 사실이 있다.
정경세는 이황의 수제자인 柳成龍의 계승자였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우대했던 아량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정경세 당시의 정권은 宋浚吉을 위시한 노론파에게 넘어가 있었고, 노론파들이 반대 세력인 영남에 지역적 교두보를 확보하려던 노력과 尙州 유림들의 융통성있는 정치적 판단이 아우러진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찌되었든, 영남 (주리론) 속의 기호학파 (주기론) 서원답게 색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같은 지역의 玉洞書院과도 다른 입지에 자리를 잡았고, 건축적인 구성방법도 다르다. 이 지역의 서원이나 향교는 대개 급한 경사지에 자리잡아 건물간의 위계를 높이 차이에 의해 나타낸다. 즉, 제일 앞에 문루를 두고 그 뒤에 동서재와 강당을, 그리고 가장 뒤 위쪽에 사당을 두는 것이 영남지역 서원의 일반적인 배열법이다. 앞에서 뒤로 갈수록 건물들도 높아지며, 높은 곳에 세워진 건물일수록 그 격이나 위상도 높아진다.
그러나 興巖書院은 낮은 동산 앞 널직한 평지에 자리잡았다. 경사지에 어울리는 문루를 생략하고, 작은 외삼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대신 강당이 크고 높아 樓閣의 역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외삼문과 그를 둘러싼 담장은 높지 않아 담 밖에서 우뚝 자리한 강당건물을 볼 수있다. 보통 서원의 내부는 담장이나 축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과도 대조적으로, 興巖書院은 내부의 강당건물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드러냄과 중심성 -주기파 서원의 특징
또 하나의 특징은 東齋와 西齋를 강당 뒤에 배열한 이른바 前堂後齋型의 배치형식을 따른 점이다. 전당후재형은 일반적으로 충청도나 전라도 서원의 지역적 형식이다. 이에 비해 경상도 서원은 동서재가 강당 앞에 있는 前齋後堂을 원칙으로 삼았다. 興巖書院이 경상도에 있으면서도 전당후재형을 따른 것은 이 서원의 主享者와 운영주체가 서인계라는 정치적 학맥적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학파적 성격과 정치적 차이를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심 축선상에 外三門 -강당인 進修堂 -內三門 -사당인 興巖祠를 배열하고 東西齋인 依仁齋와 集義齋를 강당과 사당 사이에 배치했다. 이렇게 되면 강당 앞 공간은 휑한 空地에 불과하지만, 강당 뒤의 마당은 강당과 사당, 동서재로 둘러 쌓인 중심공간이 된다. 강당은 앞이 후면이고, 뒤가 정면이 되는 묘한 성격을 가지게 된다. 강당의 출입구도 앞 뒤 모두에 마련되어 있지만, 주출입구는 뒷면 사당 쪽의 출입구가 된다.
일반적인 서원의 외부공간은 강당 앞마당과 사당 앞마당으로 二分되어 서로 독자적인 성격을 유지하는 데 비해서, 興巖書院과 같이 前堂後齋型 서원에서는 강당마당과 사당마당이 하나의 거대하고 강력한 외부공간으로 통합된다. 따라서 사당의 正面性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어, 강당보다는 사당이 서원의 중심건물로 자리잡는다. 다시 말하면, 기호학파 또는 주기파들의 서원은 교육적 목적보다는 사당에 모셔진 선현에 대한 祭享的 목적이 우선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서쪽 별도의 경역에 세워진 御書閣은 1716년 肅宗 임금이 직접 下賜한 御書를 보관하고 기념하기 위한 건물이다. 숙종 통치기에 정국을 주도한 것은 서인의 노론계였고 그 핵심인물은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친족이며 기호학파의 대가였던 宋浚吉을 모신 興巖書院의 정치적 위상이 이 시기에 한껏 높아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서원의 중심은 강당건물이다. 5×3칸의 강당은 전체 규모도 크지만 칸살의 넓이가 넓어 내부공간이 시원한 공간감을 갖는다. 원래는 양쪽 끝에 온돌방을 두고 그 사이에 3칸의 대청이 있는 구조였다. 현재는 방 하나를 없애고 마루를 깔아 더욱 넓어 보인다. 앞의 툇마루를 제외하고는 대청의 외벽까지 모두 살창을 달아서 폐쇄적인 외관을 갖는 것도 충청 전라지역의 건축에 가깝다.
팔작지붕의 二翼工 구조건물로 기둥사이에서 지붕틀을 받는 화반 등의 조각이 화려해 장식화의 경향도 짙다. 정제된 기단 위에 잘 다듬은 整平柱礎를 올린 것도 서원의 강당건물로는 이례적이다. 우선 지붕 도리를 7개나 보낸 대규모 구조체계를 취했고 (이 정도의 건물은 보통 五梁 구조), 우람한 부재들이 당시 興巖書院이 누리던 위세를 보여준다. 특히 대들보 위의 中大工은 항아리 모양으로 조각한 유머러스한 부재다.
3칸 규모의 依仁齋는 방-마루-방으로 구성된 평범한 건물이고, 맞은 편 集義齋는 부엌을 덧붙여 4칸이 됐고, 앞의 툇마루를 없애 의인재와 구별된다. 최근 제례 때 편리하도록 典祀廳의 역할로 개조한 듯하다. 사당인 興巖祠는 長臺石 3벌대의 당당한 기단이 인상적이지만 상부건물의 구조와 부재는 빈약하다.
玉洞書院 – 다리같이 놓인 2층 門樓
尙州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는 玉洞書院은 1714년 설립하여 1789년 賜額을 받았고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서원의 역사는 약간 복잡하다. 1518년 이 지방 유림들은 黃喜 (厖村 1363-1452)와 黃孟獻을 기리기 위해 祠宇를 창건하고 白華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그후 1580년에는 黃喜의 影堂을 건립해 享祀를 지내왔고, 1714년 全湜 (沙西 1563-1642)을 追加 配享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정식으로 서원의 격식을 갖추었다. 사우와 영당에서 출발하여 훨씬 뒤에 서원으로 격상된 사례다.
黃喜는 長水 黃氏로서 출생지는 開城이다. 고려말에 정계에 입문했으며, 조선초에 刑曹, 兵曹, 禮曹, 吏曹, 工曹判書를 역임하고 右議政 左議政을 거쳐 최고직인 領議政을 18년간이나 지낸 최대의 행정가, 정치가였다. 한국 역사상 六曹 가운데 五曹의 장관을 역임하고, 부총리격인 좌우의정, 그리고 총리인 영의정을 모두 지낸 인물은 黃喜가 유일하다. 특히 그의 관직은 조선초 4대 임금에 걸쳐 임명된 것으로, 정권과 관계없이 淸白吏로서, 또 뛰어난 정치인으로서 평가된다.
1868년, 大院君에 의해 전국의 서원들이 撤廢될 때 살아남은 이른바 ‘辛未存置 47書院’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원형은 많이 훼손되어 문루인 淸越樓와 강당인 蘊輝堂, 사당인 景德祠 정도가 남아있다. 강당 뒤에 최근에 지은 3칸 典祀廳이 있으며, 東齋와 西齋는 없어지고 말았다. 담장 바깥으로 오히려 庫舍와 火直舍 廟直舍 등 부속시설이 많고, 약간 떨어진 곳 錦江邊에 八角亭을 부속정자로 소유하고 있다. 세분화된 부속시설은 창고지기 불지기 사당지기 등 분화된 역할을 맡은 書院奴들이 기거한 곳이다. 사당에 부속된 건물들은 매우 발달해 있지만, 강당에 부속된 건물들은 없어져서 교육보다는 제향에 치중했던 서원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사당이 강당에 비해 크고 높아서, 제향 중심으로 기능이 변한 18세기 초의 서원건축 형식을 대표한다. 사당의 전면에는 가운데 문설주가 있는 楹雙窓과 楹雙門이 달리고 옛 기법의 初翼工 구조가 남아있어 설립 당시의 건물임을 나타낸다. 사당에 비한다면 강당은 약간 초라한 감이 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문루건물이다. 위층의 루부분은 5×2칸 규모지만, 아래층은 3×2칸으로 2칸이 줄어든다. 아래층은 담장에서 연결된 축대가 양 끝칸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축대부분은 위층에 들인 온돌방의 구들부가 된다. 다시 말해 2층 루각에 온돌방을 들이기 위해 구들을 조성하면서, 동시에 아래층은 칸수를 줄여 3칸의 외삼문을 구성하는 절묘한 구조다. 외형적으로는 마치 양쪽에 육중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마루판을 올린 다리와 같은 구조다.
2층 건물의 위층에 온돌방을 들이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과거 건물의 구조상, 2층은 마루바닥일 수밖에 없고, 여기에 온돌을 들이려면 아래층 부분에 아궁이를 만들고 흙바닥을 깔아야 한다. 그러면 2층 루각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이상한 형식의 건물이 되고 만다. 따라서 다른 지방에서는 2층 온돌방을 쉽게 포기하고 마루면만 걸린 누각을 만들지만, 尙州지역에는 유독히 2층 온돌방에 대한 집착이 컸다. 서원으로는 玉洞書院의 門樓, 尙州鄕校와 善山鄕校 明倫堂이 이런 형식의 집이며, 살림집으로는 유명한 尙州 養眞堂과 五昨堂이 2층 온돌방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형식의 2층집을 高設式 建物이라고 부르며, 尙州지역의 독특한 건축적 전통을 이루고 있다.
아래층 3칸에는 대문을 달아 懷寶門이라 이름짓고, 위층의 3칸 마루칸은 淸越樓, 남쪽방은 縝密寮, 북쪽방은 潤澤寮의 이름이 붙었다. 위층에 있는 두 개의 온돌방, 즉 진밀료와 윤택료는 동서 양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강당 좌우에 독립된 건물로 있어야할 양재가 두개의 방으로 축소되어 루각에 붙은 것이다. 교육기능이 사라져 정식의 재실이 필요없게 된 18세기 제향서원을 위한 경제적이고 건축적인 아이디어다. 따라서 玉洞書院의 루각은 ‘대문 + 루각 + 동서재’ 의 4건물이 갖는 기능을 한 건물에 축약시킨 복합적 건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