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은 흔히 순조 임금 때 사대부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지은 99칸 한옥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연경당의 뛰어난 건축적 구성이나 정교한 구조 기술은 당대 최고의 솜씨일 뿐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인 살림집을 대표하는 최고의 주택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역사 기록을 통해 보면, 순조 당시에 창건한 연경당은 현재의 연경당과는 위치와 형태, 규모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원래 연경당(演慶堂)은 순조28년인 1828년, 순조의 장남이자 왕세자인 효명세자 (孝明世子 1809-1830)가 후원 주합루(宙合樓)의 서쪽, 옛 진장각 자리에 ㄷ자형의 소박한 건물을 지은 것으로 나타난다. <동궐도>에 그 생생한 모습이 그려진 바, 현재의 연경당 보다 서쪽 능선 위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현 연경당은 1865년 고종조에 다시 지은 것으로, 그 자리에는 수궁(守宮)과 창고(庫)가 그려져 있어 그다지 중요한 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형태는 더욱 특이하다. <동궐도> 상의 연경당은 정면 7.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 몸채이고, 여기에 좌우 앞으로 3칸의 날개채가 부가되어 전체적으로 ㄷ자형 건물을 이룬다. 연경당 몸채 동쪽 앞뒤로 운회헌(雲繪軒)과 개금재(開錦齋)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세워졌다. 개금재와 운회헌은 아마도 효명세자가 서재용으로 이용하던 부분이라 생각되며, 연경당 일곽은 이 두 건물의 부속공간과 몸채의 주공간,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ㄷ자 몸채를 뒷면과 양 옆면을 돌담이 둘러쳤고, 앞면은 붉은 주칠을 한 판장담이 세워졌다. 3면에 견고한 돌담을 두르고, 정면에 가설적인 판장담을 친 경우는 흔치 않다. 동궐도에도 이러한 붉은 판장담은 매우 부수적인 공간이나 가변적인 마당을 나누기 위한 정도로 쓰였지만, 연경당에서는 매우 중요한 정면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판장담에는 솟을대문인 장락문이 있고 그 바로 우측에 협문이 마련되어 있다. 사대부가 당상관에 이르면 높은 외륜 수레가마인 초헌이 통과하도록 솟을대문은 두기도 하고, 사당문을 가운데 솟을대문 양옆으로 각각 문을 달아 솟을삼문(三門)을 구성하는 예가 있다. 그러나 이처럼 솟을이문(二門)이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효명세자의 연경당이 사대부가를 본받았다는 증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특히나 사대부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채가 없고 행랑채도 없다. 이러한 모습의 민간 살림집은 없다. 오히려 효명세자는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건물을 지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추론일 것이다.
당시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이고, 현재의 낙선재 영역 일대에 큰 동궁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기거했다. 순조가 18세의 젊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의탁한 것은 순조의 외척인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에 시달려, 자신의 아들에게 이를 견제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이처럼 절박한 임무와 짧은 청정기간 동안에 자신의 사대부적 취미를 위해 그다지 시급하지 않은 사대부 주택을 짓고, 거기에 머문다는 건 효명의 뛰어난 정치감각과 총명하고 어진 성품에 견주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효명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부패한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궐내에 여러 차례 큰 잔치를 벌였다. 그를 통해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 신하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그중 한 연회가 1828년 6월 1일에 행해진 연경당진작례(演慶堂進爵禮)로서 여기에는 춘앵무와 같이 자신이 직접 창작한 궁중정재무들이 시연되었다.
효명의 연경당에서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ㄷ자로 앞이 터진 형태의 몸체이다. 이처럼 앞이 터진 형태의 집은 기(氣)가 머물지 않고 빠져 나간다고 믿어 기피하는 집이었다. 또한 3건물로 감싸진 안마당은 박석(薄石)으로 포장된 곳이며, 궁궐에서도 인정전이나 명정전 앞 조정(朝廷)마당 정도에만 박석으로 포장할 정도로 특별한 곳이다. 이러한 박석 포장 마당은 조회나 종묘대제와 같이 특별한 의식이나 행사를 치루기 위한 장치였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연경당 마당은 진작례 따위의 큰 의례에서 정재무를 추기 위한 무대로 사용되었으며, 마당의 앞이 터진 이유는 무용수들의 등장과 퇴장에 용이하도록 계획된 것이 아닐까?
의례의 내용을 일부 분석하면, 왕과 왕비는 연경당 중앙 대청 안에 나란히 앉아 진작을 받으며, 왕세자는 한단 아래 기단 위에 앉아 부모에게 잔을 바친다. 양 옆 날개채는 ㄷ자 모양으로 마당을 감싸는 중요한 공간적 역할도 하지만, 의례 진행이 필요한 창고와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또한, 솟을이문의 높은 대문은 왕부부와 세자 정도의 출입구였고, 그 옆 낮은 대문은 무용수 등 의례 관련자들의 출입구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고종 조에 다시 건축된 현 연경당은 이러한 의례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사대부 살림집 모양으로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등으로 마당이 분할되어 있고, 안채와 사랑채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마당들이 만들어지는 순환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어느 특정한 마당에 집중하기 어려워 공연형식의 의례를 치루기에 난점이 있다. 굳이 연행을 한다면 현 연경당 안채 앞마당이 적당하리라 보인다. 안채 대청 앞 좌우로 한쪽은 누마루가, 다른 한쪽은 사랑채가 안채보다 돌출되어 안대청 앞에 오목하게 파인 마당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효명의 ㄷ자 연경당 몸채에 가장 근접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효명세자의 연경당은 정재와 의례를 치루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공연장(?)이었다. 마당은 무대이고 건물은 관람석이었다. 정면의 붉은 판장담은 무대의 배경막이 되며 그 붉은 색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을 것이다. 결코 사대부가도 아니고 살림집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