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3.06.29.
출처
래미안
분류
건축문화유산

해남 윤씨가 -최고의 예술가문
오래된 은행나무의 무성한 초록 잎들이 비같이 흩날린다 하여 집의 이름이 녹우단(綠雨壇)이다. 한반도의 남서쪽 끝, 해남 땅 연동마을에는 국문학의 비조인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의 고택이 있다. 윤선도의 4대조인 윤효정(魚樵隱 孝貞)이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연동마을은 해남 윤씨들의 씨족마을이 되었다. 종가인 녹우단은 세워진지 4세기가 넘었고, 이 집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거대한 은행나무가 대문 앞을 지키고 있다.
녹우단은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대여섯 부속채 여러 동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이 모두 한 시대에 동시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안채는 최초의 선조 윤효정이 지었다고 하니 1500년대 초기의 것이고, 사랑채는 효종임금이 윤선도에게 하사한 수원의 살림집을 1668년에 옮겨온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안채는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가 1700년 무렵에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200여 년 동안 여러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착된 것이다.
윤선도는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뒷날의 효종)의 스승을 지낼 정도로 당대 정계의 거물이자 뛰어난 학자였다. 그러나 85세의 생애 가운데 40년이 넘는 세월을 지방으로 유배되거나 해남 일대에서 은거하는 야인 생활로 지내게 된다. 그 야인생활 중에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순 한글로 된 시조와 가사들을 창작하게 되니, 정치적 불행은 곧 예술적 행운이었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로 시작하는 유명한 <오우가>가 포함된 <산중신곡>이 자연을 벗하며 낙향한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면, 어부들의 활달한 생활을 노래한 <어부사시사>는 당대의 유행가이기도 했다.
윤선도의 예술가적 유전자는 증손자 윤두서(尹斗緖 1668-1715)에 와서 폭발적으로 발현한다. 그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한번도 벼슬길에 오른 적이 없는 재야 지식인이요 예술가였다. 이 집안이 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 산수와 인물, 꽃과 새, 풀과 곤충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이 전한다. 그 가운데 단연 <자화상> -목 없는 그림이 최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회화사적으로 더욱 위대한 것은 조선 풍속화를 개척한 초기의 화가라는 점이다. <나물 캐는 여인> <목기 깍는 기술자> 등 민중의 생생한 생활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특히 명문 양반이 그런 소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화가 윤두서는 또한 지리학과 천문학, 수학에 깊은 안목을 가졌던 실학자이기도 했다. 녹우단 옆에 세워진 유물관에는 그가 직접 제작한 <동국여지도> <일본지도>와 천문도, 기하학 서적 등이 남아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이익, 이서 형제들과 교분이 깊었다. 그의 예술가적 소양과 실학자적 기질이 합쳐져 완성된 것이 <기졸>이라는 예술론이다. 여기서 그는 사실주의적 예술의 태도를 주창하여,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 후배들이 활약할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18세기 화단의 르네상스는 윤두서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윤두서의 예술가적 혼은 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에게 전수되었다. 그들 역시 뛰어난 지식인이자 풍속화가로 족적을 남겼다. 반면 윤두서의 실학자적 태도는 외증손자 대에 와서 최대의 수확을 거두었으니, 바로 조선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윤두서가 세상을 뜬지 85년 후에 인근 강진 땅에 귀양을 오게 되었고, 외가 쪽인 해남 연동마을을 드나들면서 윤씨가에 쌓여있는 수많은 전적과 예술품들을 대하게 된다. 윤씨가의 자료들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가장 위대한 실학서들을 배태하게 된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실용성이 돋보이는 살림집 (사적167호)
집은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고 했다. 조선 선비들은 자신의 집을 직접 설계했기 때문이다. 윤두서가 화가이자 실학자의 두 얼굴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녹우단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인 동시에 쓰기에 무척 편리한 주택이기도 하다. 이 집은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 집의 정면은 앞산을 향하고 있는 서쪽 면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면은 남쪽 면이라고 할 수 있다.
멀리 떨어진 높은 앞산과 집 뒤의 선산을 잇는 자연 축은 동서로 놓인다. 연동마을과 문전옥답도 집의 앞쪽, 서쪽으로 펼쳐져 있다. 이 축을 따라 사랑대청도, 안대청도 모두 서향을 하고 있다. 땅의 생김새를 중시하여 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전통적인 살림집의 자리 잡기다. 그러나 서쪽의 오후 햇볕은 무척 따가워 감당하기 어렵다. 사랑 대청 앞에는 좁고 긴 기와 차양을 달아 서향 빛을 막고 있다. 체통을 중시하는 양반집들은 아무리 더워도 집의 얼굴에 이런 가리개를 하지 않는다.
이 집에는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 바깥에서 부엌 마당으로 통하는 협문, 그리고 사랑마당으로 출입하는 대문이 있다. 이 중요한 세 개의 문들은 모두 남쪽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서 출입의 방향은 모두 남북축으로 놓여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남쪽 면은 단순한 집의 옆면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정면이 된다. 안채 남쪽 면에 길게 툇마루를 붙여서 방과 방 사이의 연결을 쉽게 하고, 집에 입체적인 깊이 감을 형성한다. 남쪽 면 앞에도 넓은 마당을 두고, 중요한 방들을 남쪽으로 배열해서 남면을 또 하나의 정면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도록 구성했다.
안채의 부엌 지붕 위에는 또 하나의 작은 기와지붕이 솟아있다. 부엌에서 발생하는 연기를 뽑아내기 위한 환기구인 셈이다. 지붕에 구멍을 내어 또 하나의 지붕을 가설하는 기술이 쉬운 것은 아니다. 순천 송광사의 오래된 승방인 하사당 정도에서나 볼 수 있는 기법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녹우단 안마당에는 2층 다락집을 가설하여 방앗간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온다. 아무 것도 시설하지 않은 텅 빈 마당으로 유지하는 전통적인 양반집 구성에서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시설이었다. 실용적인 살림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 해남 윤씨가는 전통적인 체면이나 인습, 기술적 제약 등을 과감히 벗어 던진 것이다.

가장 정신적인 공간 – 조상들의 집
녹우단은 매우 실용적인 주택이면서 동시에, 명문가의 종가로서 건축공간을 통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집에는 3개의 사당이 있다. 하나는 집 안에 있는 가묘이며, 두 개의 사당은 집의 뒤쪽 담장 바깥에 있다. 이 사당들로 이루어진 공간이 윤씨 종가, 녹우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종가에는 4대조까지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5대가 되면 신위를 불태우고 5대조 이상의 조상들을 모아 1년에 한번 시제로 대체한다. 그러나 국가적 인물이나 가문의 시조 등 특별한 경우에는 신위를 폐기하지 않고 자손 대대로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를 불천위(不遷位)라 하며, 불천위를 위해서는 별도의 사당을 지어야 한다. 녹우단에는 두개의 불천위 사당이 있는데, 하나는 시조인 윤효정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선도의 것이다.
녹우단에는 두 개의 입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는 사랑마당으로 통하는 대문간으로 살아있는 후손들을 위한 일상적인 입구이다.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남쪽 담장과 유물관 사이에 뒷산으로 향하는 또 다른 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은 곧 죽은 조상들을 위한 길이요 대문이다. 두 개의 입구가 있다는 말은 두 개의 집이 있다는 말도 된다. 앞 서 설명한 살림집이 후손들의 주택이라면, 뒷산 쪽으로 전개되는 공간은 조상들의 집이 된다.
뒷산으로 이르는 길로 들어가면 먼저 윤선도의 사당이 나타난다. 산 밑에 독립된 담장을 두르고 모셔진 사당이다. 윤선도 사당과 대각선 방향으로 깊은 곳에 윤효정의 사당이 배열되어 있다. 이 사당과 살림집의 뒷 담장이 이루는 마당의 모습이 절묘하다. 사다리꼴로 이루어진 이 마당의 한쪽 끝은 산 쪽으로 터져있다. 사당에서 머물지 말고 산 위로 올라가라는 암시다. 이 뒷산에는 시조인 윤효정의 무덤이 있고, 그 주위로는 윤선도가 직접 심었다는 비자나무 숲이 울창하다. 윤씨 가문의 성지인 곳이다.
뿐만 아니다. 살림집 뒷 담장을 따라 숲 속으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갑자기 거대한 건물군이 나타난다. 마치 숲 속의 별궁과 같은 이 건물의 이름은 ‘추원재’다. 멀리 가신 조상들을 추모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해마다 한 번, 뒷산의 시조묘에서 윤씨 가문의 시제를 지내게 되는데, 경향 각지에 흩어진 자손들이 모여들어 추원재에서 몇날 며칠을 합숙하게 된다.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공동의 조상을 추모하는 일대 행사장이다. 녹우단에는 두 개의 집이 공존하고 있다. 후손들의 살림집을 조상들이 머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집이 감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