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5.07.19.
출처
미확인
분류
건축론

탈냉전, 탈근대의 사회와 건축계

90년대는 한국사회 뿐 아니라 세계적인 변화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짧게는 18세기의 산업혁명 이후, 길게는 15세기 르네상스 이후 지속해 온 근대적 사고체계와 물적 토대가 붕괴되어 이미 탈근대 (post-modern)시대로 이행했다는 진단이 정설화되고 있다. 90년대 한국사회가 근대의 연속인지, 탈근대로 접어들었는지 정확한 판단은 유보하고라도, 적어도 해방과 분단 이후 80년대까지 계속되어온 정치와 사회적 상황과는 매우 판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음은 명확하다. 또한 건축계의 동향과 건축가들의 의식, 그리고 작품들도 이전의 상황과는 차별화될 수 밖에 없는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개혁의 움직임

80년대 말 옛쏘련의 개방과 개혁은 90년 베를린 장벽의 제거를 촉발시켰고, 곧이어 연쇄적인 동구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또한 쏘비에트 연방과 동구 공산권의 해체로 인해 2차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 온 냉전체제가 무너져 새로운 세계지도를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의 경우는 더욱 거센 변화를 맞게 되었다. 87년 근 20년만에 직접선거에 의해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이전의 권위주의 독재정권과는 다른 정치행태를 요구받았고, 세계사의 변화에 편승해 옛쏘련과 국교를 수립한데 이어 92년 중국과도 국교를 맺었다. 이는 해방 이후 남한의 의식세계를 지배해 온 냉전 이데올로기의 종말 혹은 약화를 뜻하는 것이었고, 건축계의 의식에도 지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93년, 33년 만에 등장한 김영삼 문민정권은 사회 전반의 민주화와 개혁의 물길을 열었다. 건축계에 개혁의 움직임이 싹튼 것도 정치 사회적인 변화와 무관하지는 않다. 80년대에 이미 청년건축인협의회가 발족되어 대사회적 발언이 시도되었으나, 이 단체의 주축은 신진 건축인들과 대학원생들로 구성되어 사회적 비중은 물론 건축계 내부의 파급효과도 크지는 못했다. 그러나 90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개혁의 움직임은 소장 및 중견 건축가들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벌어져 건축계 내부에 일정한 비중을 가질 수 있었다. 개혁의 움직임은 건축사협회 내부에서부터 출발했다. 설계-감리 일원화 문제와 시공회사의 설계업 참여 여부를 놓고 진보적 건축가들이 단합하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은 93년 9월 18일 “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건미준)”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이 단체는 건축인의 윤리성 회복과 건축의 사회적 역할 수행을 기치로 내걸면서 “새건축운동”을 벌여나갔으며, 가시적으로는 건축사법의 개선과 건축사협회의 재편 개혁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단체의 주축 가운데 일부는 이러한 제도적 개선에 만족하지 않고, 건축계의 모든 문제는 교육에서부터 출발한다는 판단 아래 94년 11월 “서울건축학교 (SA)”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대학들도 건축 교육의 개선을 위하여 노력을 경주한 바, 건축대학 혹은 건축전문대학원의 설립을 시도하였고, 95년 최초로 경기대학교에 건축대학원이 설립되었다. 일제 때부터 지속되어 온 ‘건축교육=기술교육’이라는 틀을 60여년만에 최초로 탈피하여, 전문 건축가교육을 시도한 것이다.

정보화, 국제화, 지방화

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사회의 구조를 뿌리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다. 80년대 한국사회에 도입되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는 90년대 혁명적인 변화를 매년 거듭한 결과, 8비트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한지 10년만에 32비트 펜티엄과 멀티 미디어 컴퓨터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한 90년대 시작된 이동통신의 급속한 보급은 이미 통신 체증에 걸릴 정도로 확산되었다. 아울러 위성방송의 전파가 국경을 넘어 국내 안방까지 파고듦으로써, 대중문화의 국제화를 부채질하게 되었다. 이제 독점적으로 정보를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정보공개 정보홍수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건축설계 분야에도 컴퓨터 이용 설계 (CAD)가 보편화되어 대형사무실 뿐 아니라 소규모사무실까지 보급되었다. 정치적인 민주화에 이어 기술의 평준화 경향이 농후해졌다. 소규모 사무소의 경우 아직은 설계 전산화가 초기 투자의 부담 때문에 생산성 향상의 수준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 적은 인원으로도 일정 규모 이상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95년 7월 설계사무소의 ‘단독-종합’ 구분이 없어져 초소형 사무소 운영도 가능하게 되었다.

90년대는 본격적인 국제화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경제 협상이었던 우루과이 라운드가 지적 소유권 분야까지 파급됨으로써, 국내의 경제체제는 물론 문화 예술 분야의 개방과 국제화를 가속시켰다. 95년 정권적 차원에서 국정의 목표를 세계화로 설정함으로써, 국내 시장 잠식의 우려와 함께 사회 전반의 국제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건축계의 국제화 경향은 매우 급속히 진행되어, 80년대부터 벌어졌던 외국 설계의 도입은 일반화된 관행이 되었고, 외국 유명 건축가들의 국내 설계와 함께, 97년 설계 시장의 전면개방을 목전에 두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기술 면의 큰 변화들은 새로운 세대를 등장시켰다. 신세대 혹은 X세대로 불리우는 그들은 탈이데올로기적 성향을 가지며, 기존의 권위와 관습을 타파하는 신선함과 적극성 창의성을 세대적 특징으로 한다. 반면 진지하지 못하고 즉흥적이며 이기적이라는 부정적 지적도 받고 있다. 어찌되었건 대중문화의 수요층은 대부분 신세대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그 창출의 주역마져 이 세대들이 도맡게 되었다. 대중문화의 유행 주기는 6개월이 멀다하고 바뀌게 되었고, 기성세대들은 그 변화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른바 신세대 건축가들의 작품 경향이 매우 다양하고, 혼성적이며, 절충적인 경향을 갖는 것 역시 시대적 조류이며, 기성 건축가들에게는 신선한 도전인 동시에 비주체적인 치기로 비춰지기도 한다. 앞세대에 비해 신세대 건축가들은 해외유학이나 연수를 통해 국제화된 감각과, 세계건축의 움직임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앞세대 건축가들이 가졌던 한국성의 추구나 전통의 계승 노력은 신세대 건축가들에게서는 약화되었다. 국내에서 아직 검증이 안된 건축의 경향을 직수입한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세계건축을 모방의 대상이 아닌 건축 보편성의 차원에서 수용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동시에 가능하다.

이러한 제반 변화 속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문학 미술 사회 분야의 탈근대 논쟁(post-modern debate)은 건축계에도 논란을 일으켰다. 구미 사회의 건축계는 7-8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행을 지나 해체주의 건축 (deconstruction)이 이슈로 등장했으며, 국내에도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디컨스트럭션의 철학적 문명비판적 기반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단지 뒤틀린 형태와 가벼운 구조 등 외형만을 복제하는 문제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른바 해외파 건축가들보다 국내파 건축가들에게서 디컨스트럭션의 형태적 수용이 더 심하다는 사실이 이 우려를 뒷받침한다.

1995년 6월 27일은 전면적인 지방자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날이기도 했다. 건축계 역시 서울 중심의 일방통행적 문화구조에서 지역적 역사성과 색채가 가미되어 더욱 다양하고 풍부한 건축문화를 형성할 기회가 온 것이고, 지방의 건축가들이 부각될 여건도 마련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지방건축의 활성화로 인한 부정적 측면도 예견된다. 각 지방의 경제활성화를 위해 무리한 시설 유치와 건설 붐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그로 인한 역사적 생태적 환경 파괴는 물론 저급한 건축물들의 대량건설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해방 50년 동안 줄곧 정책의 기조를 이루어왔던 개발 드라이브는 거주 공간의 물량을 확보하려는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질적인 면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한 결과로 나타났다. 93년부터 계속 일어났던 대형사고들은 모두 천재지변이 아닌, 졸속공사 부실시공 관리감독부재로 인한 허무한 참사들이었다. 경부선 구포 선로붕괴사고와 대구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는 여러 시공업체 사이의 영역조절 부재가 빚은 어처구니 없는 참사였다. 94년 서울의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유신시절 무리한 개발정책의 업보였고, 95년 5백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세계에서도 유래없는 부실건축물 붕괴참사였다. 특히 삼풍 붕괴는 건설에 관련된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 공무원 건축주 모두의 총체적 부실과 부정의 결과로 건축인들 모두의 반성과 참회를 촉구하는 사건이었다. 90년대 건축계는 한마디로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뒤엉켜 있는 혼돈의 상황이며, 이를 정리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90년대 작가들

90년대에 두각을 나타내거나 활동을 시작한 건축가들을 몇가지 유형으로 구별짓고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선 전국 4년제 대학의 건축관련 졸업생이 5,000명을 넘어선 양적 팽창과 함께, 국내 대학원의 활성화와 급증하는 해외 유학생들로 인해 매우 다양한 지적 토대의 건축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건축가라는 직책이 전시대에 비해서는 월등히 향상된 사회적 인식을 얻게 되어 지망도가 높아졌고, 매우 다양한 과정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70년대 한자리 숫자에 불과했던 건축사 선발 인원이 점차 늘어나 94년도에는 900여명의 건축사를 양산하여 독립건축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90년대의 건축계는 대형설계사무소와 소형설계사무소 (아틀리에)로 양극화되는 추세가 강하다. 기존의 정림, 원도시, 간삼, 선진, 건원 등은 사세를 더욱 확장해 200명에 가까운 설계 인원을 보유하게 되었고, 아키플랜 서울건축 남산건축 삼우설계 등 재벌그룹과 강력한 연계를 가진 사무소들은 더욱 영역을 확장하였다. 반면 급증한 젊은 건축인들은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독립 사무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부분은 10명이 채 못되는 인원으로 꾸려나간다. 자연스럽게 사무소의 규모에 따라 프로젝트의 종류도 나뉘어져서, 대형사무소, 대단위 아파트 단지, 관공서건축,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등은 대형사무소에 일임되었다. 반면 아뜰리에 그룹은 다가구 주택, 근린생활 시설, 소규모 종교시설 등을 주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프로젝트 규모의 양극화는 다시 경제적 이익의 양극화와 작업 내용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순환과정을 형성했다. 또한 급증한 건축가 수는 치열한 경쟁을 초래하여, 물량주의와 덤핑 등의 폐해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일면에서는 작품의 완결성과 새로운 시도를 통해 차별화되려는 바람직한 풍토를 양성하기도 했다. 설계의 물량은 대형사무소들이 압도적이지만, 건축적 개념의 새로운 시도나 논의는 아뜰리에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벌어졌으며, 각종 건축상도 대부분 그들의 몫이었다.
90년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축가들을 굳이 분류한다면 세 집단 정도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부류는 국내 설계사무소에서 오랜 수련을 통한 뒤에 독립한 건축가들로서 4.3그룹에 속한 이들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이보다는 아래 세대로서 국내에 기반을 두면서 비교적 일찍 독립하여 차분한 성장을 계속해 온 건축가들이다. 세째는 외국의 대학에서 유학을 마치고 혹은 외국 사무소에서 수련을 쌓은 후에 귀국하여 독립한 신인급의 건축가들이다. 자연히 연령대도 첫째 부류는 1955년생 이전의 세대로 다양하고도 주목할 작품들을 완성하여 중견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둘째와 세째 부류는 그 이후의 세대로 아직 완공된 작품들이 많지는 않으나 그들의 이론과 활동이 주목을 받고 있는 신인들이다.
첫째 부류에 속하는 건축가들 가운데 우선 거론할 이들은 김수근의 사후에 독립한 후계자들이다. 공간사를 떠 맡은 장세양은 민경식 이상림 등 젊은 파트너를 영입해 김수근 건축의 전통을 잇는 동시에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여 동남아 등지의 국제 무대로 진출을 꾀하고 있다. 공간사를 떠나 자신의 사무소를 설립한 이들 가운데 류춘수 승효상 이종호 양남철 등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86년 이공건축을 설립한 류춘수는 “강촌휴게소” 등으로 두각을 나타내다 93년 중국 하이난의 대규모 프로젝트에 현상 당선되어 일약 국제적인 건축가로 부상하였다. 승효상은 89년 독립한 이후 여러 경향의 건축을 모색하다가 드디어 “수졸당”을 통해 자신의 확고한 건축관을 피력하고 있다. 김수근의 마지막 제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이종호와 양남철은 스튜디오 메타를 통해 공동작업을 하면서 일련의 농촌교회와 “바른손 사옥” 등으로 가장 촉망받는 신진 건축가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92년 독립한 민현식은 공간사를 거쳐 원도시건축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였다. 독립과 동시에 발표한 “신도리코 기숙사” 등을 통해 본질적인 건축의 요소와 한국적 공간의 주제를 구현하여 많은 수상과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4.3그룹과 동세대 건축가들

1990년 4월 3일 발족한 4.3그룹은 90년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그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에도 목구회 금우회 용마루회 등의 건축가 그룹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특정 대학 동문회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4.3그룹은 출신대학을 불문하고 비슷한 연령대의 다양한 건축가들이 모인 집단이다. 구성원들은 모두 중소규모 사무소를 자영하고 있으며, 동시대 한국건축에 대해 비판적이며, 자신들의 작업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한국의 건축문화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진 건축가들이다. 구성원들은 곽재환 김병윤 김인철 도창환 동정근 민현식 우경국 방철린 백문기 승효상 이성관 이일훈 이종상 조성룡 등 14인으로, 70년대부터 독립 활동한 조성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에 독립한 건축가들이다. 4.3그룹은 아직 공동의 건축적 목표를 선언하지도, 집단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역시 동인그룹 이상의 진정한 집단적 운동체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일련의 활동들 – 수십 차례의 자체 세미나, 연례 기획 해외여행, 작품 전시회 개최, 동인지 발간 -은 늘상 건축계의 토픽이 되었으며,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활동은 그룹 바깥의 동년배 건축가들인 김영섭 류춘수 유원재 정기용 최동규 최영집 들과도 교류를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건미준” 창립의 주요 구성원으로 연결된다. 또한 그들 전부는 아니지만 다수는 “서울건축학교”의 창립 멤버로도 이어져서, 90년대 건축계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주체가 되었다. 이들은 대외적 활동 뿐 아니라 개인들의 작품성도 인정을 받아 명실상부한 90년대 세대의 주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례로 93년 3월 “분당신도시 주택설계 전시회”에 21인의 건축가가 초대작가로 출품하였는데, 조성룡을 비롯하여, 8명의 신진작가 중 김인철 도창환 민현식 승효상 이성관 5인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 전시회 참가 작가들은 기성 건축계의 추천과 투표로 결정되었으므로 당대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원로및 중견작가들로는 강석원 공일곤 김석철 김원 김종성 엄덕문 원정수 윤승중 장석웅 조건영 지순 황일인이, 4.3그룹과 동년배 작가들로는 류춘수 박연심 장세양 등이 포함되었다.)
이 세대의 건축가들은 매우 다양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김병윤은 매우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접근을, 김인철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형태를, 우경국은 동양적인 정신성을 강조한다. 또한 백문기는 추상화된 공간요소를, 이성관은 합리성과 기념성을, 이일훈은 “채나눔”의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건축에 도달하고자 한다. 김영섭은 90년대 주역의 대변인으로 개혁파의 선봉에 나서 맹렬한 사회적 활동을 벌이는 한편, “서대신동 주택” 등에서 명확한 개념과 세련된 조형을 보여주고 있다. 정기용 역시 민족예술인총연합 (약칭 민예총) 건축 아카데미를 주도하면서 “프랑스대사관 증축” 등에서 날카로운 비판적 건축을 선보인다. 최동규는 이미 교회건축의 전문가로 인정 받던 터에 “속초중앙교회” 등 연속된 종교건축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최영집은 자신의 “탑스튜디오 사옥”과 같이 근본적인 비례와 조형언어 위에 최신의 재료를 결합하여 가볍고도 발랄한 건축을 추구한다. 그들의 성장과정은 공통된 면이 많지만, 추구하는 건축세계와 방법론은 각기 달라 이전 시대보다 훨씬 폭넓고 다양한 건축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두각을 보이는 지방건축가들의 출현은 90년대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아직도 건축의 중심은 서울이지만, 차츰 지방에서도 역량있고 의식있는 건축가들이 의미있는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경주의 손명문은 92년 자신의 건축전을 경주에서 개최하여 중앙 무대에 충격을 주었고, 경주의 건축을 일신하고 있다. 부산지역에서는 “부산경남작가회”가 결성되어 나름대로의 활발한 작업을 벌이고 있고 그 가운데 마산의 허정도는 감각적 색채와 형태로 어필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구와 광주 등지에서 지역에 기반을 둔 역량있는 건축가들이 성장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

이들 보다는 조금 아래 세대로서 국내에서 성장한 건축가들 가운데 작품 발표가 활발한 이들로는 김개천 김관석 김흥수 송광섭 이필훈 주대관 함인선 그리고 이종호와 양남철의 메타건축 등을 들 수 있다. 80년대 “건축사회관 현상설계”를 통해 등단한 송광섭은 수많은 주택 작품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관석은 일련의 근린생활시설들에 충격적인 색채의 피막을 적용함으로써 신세대 건축의 일면을 선보이고 있다. 80년대 초에 이미 모람건축을 설립한 김흥수는 합리성과 서정성을 동시에 추구하여 “자명당” 등 의미있는 작품을 발표했다. 주대관은 몇개의 근린상가에서 쿱 힘멜브라우를 연상케하는 이른바 해체주의적 형태를 선보여 이목을 끌었고, 평론 활동을 겸하고 있는 이필훈은 기본적 요소들의 탐구를 통한 매우 논리적인 건축들을 소개하고 있다. “선禪의 건축”을 표방하고 있는 김개천은 원초적인 공간과 형태를 시도하고 있고, 후기 청건협을 주도한 함인선은 하이텍크 이미지의 도시건축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 신진건축가의 공통적인 성격을 굳이 묶어본다면, 자신들의 건축적 이론과 작품의 결과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이론은 사회화되었다기 보다는 건축 내부에 머물면서 실현 가능한 작은 범위에 국한된다. 또한 아직은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려는 이세대 공통의 노력은 건축의 본질적인 노력이며, 실천의 결과를 더욱 의미있게 해 줄 것으로 평가된다.

마지막 부류의 신진들은 대다수 해외에서의 장기간 수학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의 유학지가 미국 일본 중심에서 벗어나, 영국 프랑스 이딸리아 등 유럽 여러나라로 다변화된 특징도 갖는다. 앞 세대의 유학파들과는 달리 이들은 해외에서 본격적인 설계수련을 받았으며, 건축이론을 설계와 접목하려는 훈련을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95년 현재 30대에 해당하며, 귀국하여 독립된 사무소를 개설한지 2-3년 이내로 아직은 본격적인 작품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대 건축가들은 완공된 작품 뿐 아니라 활발한 강연과 교육 참여, 계획안들을 발표함으로써 그들이 추구하는 건축적 진로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고, 개방된 토론에 참여함으로써 서로의 생각들을 교환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건축적 전개를 알 수 있게한다.
미국에서 훈련을 받은 신진건축가들은 김준성 민선주 배병길 서혜림 장해철 제갈엽 조병수 최문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김준성과 배병길을 제외하고는 아직 발표된 작품들이 많지 않으나, 이미지의 유추를 통한 설계 방법과 주관적 개념에 의한 접근 등 매우 개방된 건축론들을 선보이고 있다. 배병길은 “국제화랑” 등을 통해 비틀어진 형태와 어긋난 공간 등 이른바 디컨스트럭션의 경향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주목을 받았다. 김준성은 “비승대 성당” 등을 비롯한 매우 형이상학적인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여 신선한 충격을 가져왔고, 경기대 건축대학원의 대우교수로서 설계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장해철은 “꽃마을 보울링장”과 같이 가벼운 터취의 대중적인 건축을 선보였다.
영국의 AA 스쿨에서 수학한 김종규는 성공회 성심원교회에서 추상적인 형태와 공간을 시도하고 있고, 또한 서울건축학교의 주임강사로서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다. 프랑스 빠리대학의 앙리 씨리아니에게서 수학한 김홍일 정재헌 들은 모더니즘 건축의 정통적 계승으로 건축관을 가지고 있다. 90년대 건축 유학지 가운데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 바로 빠리이고, 95년 현재 100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유학 중이다. 그들 대부분은 설계를 전공하며 이론보다는 설계 수련에 전념하고 있어, 80년대 까지의 유학 풍토와는 다른 경향을 보인다. 이외에도 독일과 이딸리아에 다수의 유학생들이 있고, 이딸리아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이로는 윤재원과 최욱을 들 수 있다. 또한 스위스의 마리오 보타 사무소에서 근무했던 한만원도 귀국하여 독립 활동을 시작 중이다.
해외에서 오랜 기간 수학하고 귀국한 신진세대들의 작품과 활동은 현재진행형 아니면 미래형으로 아직은 평가를 내리기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적인 성향으로는, 탄탄한 실무 훈련과 이론의 바탕, 이론과 실무의 결합 경향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적 담론들에 익숙하며, 국제적인 감각들로 국내외의 구별없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신들의 지식과 생각을 전수하기 위해 대학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들은 대부분 서울건축학교와 경기대 건축대학원의 교육에 참여하여 열성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점도 기성세대와는 구별이 되는 점이다.
실무와 교육의 병행 현상은 대학의 전임교수로 초빙된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기존교수들의 설계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진 설계교수들의 설계활동은 더욱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양상을 띤다. 90년대 임용된 설계교수들은 다수가 해외에서 체계적인 설계교육을 경험한 이들로서, 설계와 교육, 혹은 설계와 이론의 통합을 당연시하고 있다. 교수 겸직금지의 해제와 더불어 대학 교육의 질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