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건축에서 유교적 건축으로
한국건축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면 하나의 흥미로운 의문에 부딪힌다. 현존하는 목조건축 문화재의 대다수(어림잡아 99.9%)는 17세기 이후에 세워진 건물들이다. 물론 BC1세기경부터 다양한 건축물들이 축조되어 왔지만, 16세기말 일본의 침략전쟁시기에 대부분이 불타 없어진 결과다. 전쟁의 피해는 17~18세기에 걸쳐 서서히 복구되었는데, 이 시기는 유교의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전 분야를 지배하던 시기이다.
조선 왕조의 지배층인 성리학자들은 이전 왕조의 국교였던 불교를 극심하게 탄압하였다. 14세기말 조선왕조 개국 당시 전국에 3,000여 불교사찰이 존재했는데, 강제적인 통폐합과 철거 등을 통해 16세기말에는 300여 사찰로 축소되었다. 일본과의 전쟁 이후에 불교는 일대 중흥기를 맞아 기존에 사라진 많은 사찰들을 재건하였지만, 이 시기 역시 불교에 대한 사회적 천대는 여전하였다. 불교 승려들은 여전히 최하층민의 신세였고, 도시에는 일절 사찰 건설이 불허되었으며, 재력과 권력을 가진 양반층들은 여전히 불교를 외면하였다. 불교를 지원한 것은 가난한 지방의 농민들과 영세한 중소상인층이었고, 이들의 빈약한 시주에 의존하여 사찰건물들이 건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세워진 유교건축에 비해, 불교건축물들은 거대한 규모와 정교한 건축기법, 그리고 화려한 장식미를 자랑한다. 18세기의 화엄사 각황전이나 법주사 대웅전 등은 2층 구조로 실내면적이 600m2에 달한다. 불교건축 이외에는 3~4개의 궁궐 정전만이 2층으로 세워졌을 뿐이다. 유교의 신전이라 할 수 있는 서원이나 향교에는 2층 구조는 전무하며, 개별 건물의 내부면적도 150m2을 넘지 못한다. 구조기법에서도 불교건축은 주심포나 다포계의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채택한데 비하여, 유교건축물은 간략하고 손쉬운 익공계 기법을 채택하고 있다. 화려한 단청과 벽화는 불교건축물에만 채색되었을 뿐, 유교건축물에는 아주 간략한 채색만 허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무식하고 억압받았고 가난했던 불교의 건축은 크고 화려하며, 온갖 지식과 권력과 재력을 독점했던 유교의 건축물은 작고 초라하다. 이처럼 모순에 찬 역사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비단 건축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불교시대였던 고려와 유교시대인 조선의 예술을 비교해 보면, 조형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현상이다. 재현적이고 화려한 고려 불화는 추상적이고 단순한 성리학자들의 문인화로 대체되었다. 오묘한 색채와 정교한 문양으로 유명한 고려청자는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백자로 바뀌었다. 건축, 회화, 공예 등 모든 조형예술은 화려하고 정교한 것에서 소박하고 단순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이는 불교적 예술이 유교적 예술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건축과 예술의 양상이었다.
불교적 건축 -부분완결적인 다양한 세계
석가모니 당시부터 불교는 사성평등을 주창하는 대중적 종교로 자리 잡았다. 특히 한국 불교의 주류로 자리 잡은 대승불교는 개인의 수양 못지않게 중생 구제를 중요한 교리적 명제로 삼았고, 7세기부터 지도적 승려들은 다수 대중을 위한 포교의 방법론과 철학을 정착시켜왔다. 대승과 대중성이라는 한국 불교의 특성은 불교건축의 근본적 두 가지 원리를 형성하게 된다.
불교 교리는 어느 종교보다 난해하고 광대하다. 고등철학에 가까운 이 교리들은 수천 종의 경전에 기록되어 있지만, 문자를 모르는 대중들에게 경전의 내용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불교는 원시 경전의 내용을 묘사한 본생도부터, 부처의 모습을 재현한 불상들, 그리고 화엄이나 밀교의 세계를 상징화한 만다라까지 수없이 많은 조형물을 창조하여 대중 포교의 방편으로 삼았다. 또한 스투파를 비롯한 독특한 건축 형식들을 창조해 신앙의 상징과 대상물로 삼아왔다.
불교 건축물은 단순히 사람이 거주하기 위한 쉘터(shelter)가 아니라, 외부 형태는 불상을 봉안하는 거대한 포장물이며, 내부 공간은 부처의 세계를 재현한 불국토이다. 그 자체로 입체화된 교리이며 신앙의 대상물인 오브제(object)이다. 대중적 신앙의 오브제로서 건축물은 정교하고 화려하고 거대해야 했고,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장식적이어야 했다.
금산사는 미륵전과 대적광전이라는 두개의 주불전을 갖는다. 미륵전은 도솔천에서 강림하여 설법을 행하는 미륵불의 용화세계를,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부처와 6보살 등 총 11구의 불상을 봉안한 만다라의 세계를 재현했다. 미륵전은 일어서서 설법하는 거대한 입상을 봉안하기 위해 3층의 수직적인 구조를 채택했고, 대적광전은 10여구의 좌상들을 나란히 배열하기 위해 단층의 수평적인 구조를 갖는다. 하나의 영역 안에 수직과 수평의 상반된 두개의 건물이 대조를 이루며 배치된다. 이는 용화세계와 연화장세계라는 두 교리적 내용을 형상화함으로써, 건축물 자체가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을 상징하며, 일반신도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장식에 대한 욕구는 불교건축의 태생적 본능에 가깝다. 높고 깊은 산속에 위치한 매우 작은 사찰인 성혈사 나한전의 예를 들겠다. 이 건물은 인적도 드문 인근 지방민들의 시주와 지역 목수들에 의해 만들어진 3*1칸 규모의 최소 불전이다. 그러나 이처럼 작고 초라한 불전에 부착된 창문들의 장식적 의도는 놀랄만하다. 모든 창문의 창살을 연꽃, 모란, 그리고 민화풍의 각종 에피소드들의 조각품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수중세계와 공중세계의 환상적 생태계를 묘사한 목조 부조는 불교적 내용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어 보이고, 오히려 도교적 내용에 가깝다. 이 창문의 주문을 맡은 장인이 알고 있는 지식만큼 표현된 것이리라. 창문의 장식을 강조할수록 창문 본연의 기능 -채광과 환기-은 상실되지만, 불교도들에게 이런 실용적 불편은 장식적 욕구를 위해 치러야할 작은 희생일
뿐이다.
한국에 정착된 대승불교에는 3,000에 이르는 부처들이 등장한다. 또한 수없이 많은 보살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각각 자신만의 불국토를 가지며, 우주는 삼천개의 세계로 이루어진 집합체이다. 그러나 각각의 불국토는 자체적으로 완전한 또 하나의 우주이며, 단 한명의 부처만이 이 불국토를 주관한다. 이러한 “일세일불설(一世一佛說)”의 원칙은 사찰의 건축적 원리로 적용되어 왔다. 사찰은 한 부처나 보살의 독립된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의 금당에는 하나의 불보살이, 하나의 영역에는 하나의 금당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교리적 원칙이 세워졌다.
고대에는 이 건축적 원칙이 잘 지켜졌다. 불국사에는 4개의 금당이 현존하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이다. 각각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관하는 사바세계, 극락세계, 연화장세계, 보타락가산을 상징한다. 각각의 불국토는 회랑과 담장에 의해 독립적으로 구획되어 있고, 경사지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더욱 독자성이 강조되어 있다. 각각의 영역은 하나의 독립된 사찰이다. 불국사는 4개의 불국토, 다시 말해서 4개의 사찰이 집합된 대우주를 의미한다.
1불-1사찰의 원칙은 불교시대인 고려시대에도 잘 지켜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교시대인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이러한 건축적 원칙은 호사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대중적 지지를 위해서는 모든 부처와 보살의 영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교파의 구분 없이 수많은 불보살을 한 사찰에 모셔야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독립된 영역을 조성하기에는 불교의 경제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대신 등장한 것이 1불-1불전의 축소된 원칙이다. 적어도 하나의 불전은 하나의 불국토를 상징하는 것이며, 하나의 불보살만 봉안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사찰은 여러 개의 불전들로 이루어진 축소-통합된 우주를 의미하게 된다. 교리적 원칙은 변함없지만, 건축적 적용의 메카니즘이 변화된 것이다.
‘1불-1사찰’의 원칙이든, ‘1불-1불전’의 원칙이든 여전히 ‘일불일세설’은 결국 부분완결적인 건축의 구조를 구축하게 된다. “티끌만한 먼지에 우주의 섭리가 담겨져 있다”는 경전의 내용은 곧 “부분이 곧 전체”라는 건축적 원리로 치환된다. 이는 비단 건축적 배치나 불전 조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조형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교리적 세계관이다. 이 원리에 따르자면, 건물 한동 한동이 독립된 완결체이며, 창문 하나, 문고리 하나도 완결된 완성품이어야 한다. 건축물의 모든 부재는 독자적이며 완결된 형태를 가져야하고, 이들은 다시 정교한 맞춤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더 큰 전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로서 장식적 욕구, 공예적 기술, 오브제로서의 건축물의 성격 등이 ‘부분완결성’이라는 명제로 통합되게 된다.
유교적 건축 -질서와 통합의 세계
공자의 유학은 지배자와 지식인을 위한 사상이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에서 공자가 생각했던 이상사회는 봉건적 구조가 지배했던 주나라의 평화로운 사회였다. 천하의 중심에는 황제가 존재하고, 각 지역은 황제가 임명한 제후가 지배한다. 제후는 다시 그 아래에 공-경-대부라는 중간 지배층을 지배하며, 대부들은 일반 백성들을 지배한다. 사회 구조는 피라미드와 같이 상향적으로 조직되며, 그 조직의 근간은 황제-제후-공경대부(귀족)-평민의 수직적 질서에 의해 유지된다. 이를 ‘종법적 질서의 세계’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종법적 질서란 군대조직의 강압이나 범죄 집단의 폭력과 같은 야만적 수단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예(禮)’라는 이성적 판단과 ‘제(制)’라는 사회적 규약에 의해 지켜지고 발전하게 된다.
예제와 종법적 질서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원리였고, 건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예컨대 고대 중국에서는 신분별로 대문의 수자를 제한했는데, “황제는 9개의 대문을, 제후는 5개, 공경대부는 3개, 평민은 1개의 대문을 둘 수 있다”고 했다. 또 오래된 예법서인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는 제왕의 도시를 만드는 원칙이 규정되어 있고, 2,500년 후 조선왕조가 수도를 계획할 때에도 이 예법의 근간이 지켜졌다.
조선시대 공립학교였던 향교는 전국에 230여개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들의 건축적 형식은 5가지 정도의 유형으로 분류될 정도로 규범적이다. 예제적 관점에서 볼 때, 그나마 한국식 예제의 해석은 비교적 자유롭고 융통성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권위건축들 -향교나 서원, 도교 사원, 심지어는 불교 사원까지도 공통된 배치의 원칙을 준수하였기 때문에 그 막대한 수에 비하여 획일적인 건축의 유형이 지배해왔다.
유교의 가르침은 경전의 문자적 지식을 통해 전달되었고, 문자를 모르면 문화인이 아니며, 문자를 깨우친 지식인이야 말로 사회를 지배하고 계도할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 유교적 지식인들은 세계는 표상과 진리의 세계로 이루어진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졌고, 눈에 보이는 표상의 세계는 허위이며, 그 속에 감추어진 진리의 세계야 말로 도달해야할 이상이었다고 믿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은 단지 기술일 뿐이며, 진정한 예술은 인간의 생각과 정신을 그려야한다”는 관념적 예술론은 유교지식인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선언이다. 예술품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예술가의 관념을 담아내는 형이상학적 도구가 되며, 건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유교시대 지식인들은 누각과 정자들을 많이 세우고 소유했다. 이 건축물들은 자체의 완결된 기능을 갖기 보다는 자연 풍경을 담아내기 위한 커다란 그릇이었다. 그릇은 비어야만 무언가 채울 수 있듯이, 누각과 정자는 기본적으로 비어있고 외부에 대해 개방된 건축 형식이다. “함허정(중국 정자의 이름)은 비어있는 쓸모없는 건물이다. 그러나 정자에 오르면 온 세상이 건물 안으로 가득이 밀려온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어떤 벽면도 없이 툭 터지고 텅 비어 있는 건물이다. 열차 차량과 같이 길쭉한 7칸의 누각은 어떤 실용적 기능도 담을 수 없는 쓸모없는 건물로 보이지만, 누각에 올라보면 앞산과 강물의 풍경이 마치 여러 폭의 연속 그림과 같이 펼쳐진다. 앞산의 이름은 ‘병산’이며, 병풍같이 길게 펼쳐진 산이라는 의미이다. 앞산의 모습을 7폭의 그림으로 나누어 병풍과 같이 펼치기 위해 만대루는 길쭉해졌다. 다시 말해서, 누각건물 자체는 어떤 상징도, 감상의 대상도 될 수 없지만, 자연과 인간 사이를 결합해주는 매개체로서 훌륭한 가치를 갖는다.
유교-특히 성리학 지식인들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세상만사를 ‘중요한 것(본本)과 지엽적인 것(말末)’으로 구분하여 본다. 이 본말론에 의하면 건축의 쓰임새나 컨텐츠가 중요한 것이지, 건물의 생김새는 껍데기에 불과한 지엽적인 것이다. 하물며 건물에 부가되는 장식이나 색채나 현란한 재료의 사용 따위는 더욱 말초적인 것으로, 오히려 본질을 흐리는 장애물이라 여긴다. 성리학적 건축에서 건축의 형태, 장식, 색채, 재료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유교시대는 일반적 의미의 조형예술이 쇠퇴하고 축소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유교시대 예술은 형식미보다는 정신미의 측면에서, 외형적 거대함이나 화려함보다는 추상적이고 의미적인 측면에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청자가 조선백자로 변화된 까닭 -그것은 불교적 그릇이 유교적 그릇으로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은 성리학적 엘리트들을 배출하기 위해 한국 최초로 설립된 사립대학이다. 그만큼 중요성이 높은 명문 서원이다. 서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선현에 대한 제사의례이며, 소수서원은 한국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 -‘한국의 주자’라는 별명을 가진-을 봉안한 서원이다. 최초의 서원에 최초의 성리학자를 모신 곳이니 만큼, 제사시설은 최고급의 건축이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주요한 제사시설인 전사청(제물을 마련하고 보관하는 곳)은 3칸의 작고 초라한 건물에 불과하다. 아무런 채색도 장식도 없는 백색의 간단한 건물이며, 휘어진 부재를 다듬지 않고 사용한 무심한 건물이다. 제사를 드리는 정성과 예법이 중요하지, 건물의 생김새에 무슨 가치가 있으랴?
주자가 완성한 성리학은 공자 유교의 윤리학적 예법을 바탕으로, 불교의 형이상학과 도가의 자연철학을 통합한 종합적이고 거대한 세계관이었다. 개인-사회-국가-자연은 그 범위만 다를 뿐 동일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며, 동일한 중심을 가지고 있다. 그 중심은 다름 아닌 ‘깨달음을 얻은 인간, 군자(君子)’이며, 군자를 중심으로 온 세상이 전개된다. 다시 말해서 세계는 군자라는 주체적 중심에 의해 재조직되는 주체적 영역이 된다. 건축의 주인은 형태도 공간도 아닌 인간이며, 주체적 인간은 항상 건축물의 내부에 있다. 건축은 인간과 외부의 환경을 적절하게 관계 맺어주는 매개체이다. 따라서 건물의 외형도, 장식도, 색채도 내부의 인간에게는 의미가 없다. 외부 환경 -자연의 풍경은 주체적 인간에 의해 선택되며, 건축은 선택된 풍경을 적절한 각도와 크기로 조절하는 프레임이 된다.
도동서원은 북향을 하고 있다. 북쪽에 있는 산의 모습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서원의 앞산으로 삼아 축선을 정하고 건축물을 배열했다. 배열된 건물들의 모습이 앞산의 뾰족한 형상을 닮은 것은 물론이며, 중심건물인 강당은 원장이 앉아서 앞을 내다보는 풍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틀이 된다. “군자는 남쪽을 향해 바라본다.”는 오래된 규범이 있는데, 이는 오히려 “군자가 바라보는 곳이 남쪽 (기준 방향)이 된다.”는 뜻이다. 바라보는 좌측은 서쪽이지만, 서쪽에 있는 건물을 동재 (동쪽 기숙사), 동쪽에 있는 건물을 서재(서쪽 기숙사)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연 방위마저도 주체적 인간에 의해 재조직되고 통합된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은 자연을 주체적 인간이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 중심의 자연으로 조직한다는 적극적인 세계관을 의미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주체적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행하는 이상적 인간이며, 최고의 지식인을 의미한다. 그에게 건축을 포함한 사물은 본질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건축이란 사람 몸을 덮는 옷과 같이 인간을 보호하는 쉘터이며, 자연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성리학적 건축은 종종 장식과 형태가 소거된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갖는데, 그것은 건축이 목표로 하는 미학적 양식이 아니라, 성리학적 인식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두 개의 물줄기
조선시대에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도시 속에 있던 사찰들과 평야지역에 있던 사찰들은 모두 철폐되고, 깊은 산속에 있는 사찰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결과, 한국의 사찰들은 ‘**산 **사’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봉황산 부석사’라고 할 때, 봉황산은 부석사가 기대고 있는 뒷산이다.
성리학 교육기관인 서원들도 산 이름을 따른 명칭들이 있다. ‘병산서원’이나 ‘옥산서원’이 그 예인데, 이 때 병산과 옥산은 각기 서원에서 바라보는 앞산의 명칭이다. 명칭 상으로도 불교건축은 뒷산이, 유교건축은 앞산이 중요한 산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에는 불교와 유교건축의 상반된, 중요한 시각적 속성이 숨어있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건축은 신앙적, 감상적 오브제가 되어야 하며, 일반 신도들은 늘 불전 건물의 정면을 쳐다보게 된다. 건물은 뒷산에 기대어 자리 잡기 때문에, 이런 시각에선 뒷산 역시 건축의 배경으로서 매우 중요한 대상물이 된다. 반면,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주체적 인간은 건물 안에 자리 잡게 되고, 그는 늘 건축의 내부에서 앞을 바라보게 된다. 그에게는 앞산의 경관이 시야에 들어올 뿐, 자신이 기대고 있는 뒷산은 전혀 인식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불교건축은 외부적 경관 (off-site view)으로 인식되며, 유교건축은 외향적 경관 (on-site view)으로 인식된다.
이는 단지 사찰이나 서원같이 종교적 건축에만 적용되는 경관 구조는 아니다. 불교시대의 건축, 한국의 경우 신라와 고려시대의 건축은 전반적으로 외부적 경관구조를 따르며, 성리학 시대인 조선시대의 건축은 많은 부분 외향적 경관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건축물은 외부 형태의 비례나 완결성, 색채와 장식 등이 중요한 건축적 요소가 된다. 반면, 조선시대에 세운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정자와 누각, 그리고 상류층의 살림집들은 앞에 보이는 선택된 경관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축적 기준으로 작용한다.
건축은 흔히 공간적 비움(void)과 형태적 채움(solid)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어느 건축이든 두 가지 요소는 다 가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불교건축은 채움이, 유교건축은 비움이 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건물들로 둘러싸인 외부공간인 ‘마당(Madang -inner court)’은 조선시대 건축물들의 중요한 공간이다. 건물에서도 채워진 방보다는 비어있는 마루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반면, 그 이전 건축의 외부공간은 마당이라는 특성이 나타나지 않고, 단지 비어있는 부분일 따름이다. 건물은 채워진 방들의 결합으로 구성되며, 비어진 마루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관이 한 시대를 지배할 때, 그 시대의 모든 건축은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 건축의 경우, 종교적 세계관의 특성은 단지 해당 종교의 건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특성이 되어왔다. 불교사회인 신라와 고려시대에도 유교가 있었고, 유교건축이 존재했다. 또한, 성리학사회인 조선시대에도 많은 불교건축이 존재했다. 불교나 유교건축은 각기 고유한 종교적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시대의 보편적인 건축적 풍조에 지배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고려시대의 유교 사당은 불교적 유교건축이며, 조선시대의 불교사찰은 유교적 불교건축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의 불교건축이나 유교건축, 그리고 기독교건축은 고유한 속성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모두 자본주의적 건축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제 처음의 질문에 대답할 때가 왔다. “무식하고 억압받았고 가난했던 불교의 건축은 크고 화려하며, 온갖 지식과 권력과 재력을 독점했던 유교의 건축물은 작고 초라하다. 이러한 모순에 찬 역사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다분히 현대적 관점과 자본주의적 세계관 때문에 발생한 질문이다. 불교건축과 유교건축은 그 세계관이 달랐다. 경제적 조건과는 무관하게 각기 건축에 대한 정의가 달랐고, 추구해야할 목표가 달랐던 것이다. 다르다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와 유교의 세계관은 어찌 보면 매우 상반되는 것이며, 이 상반된 세계관을 수용하다보니 결과적으로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한국건축의 역사라는 도도한 강의 흐름을 밖에서 본다면, 한국의 건축은 모두 목조 뼈대와 기와지붕을 가진 하나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강물 속에 몸을 적시며 체험적으로 관찰한다면, 여기에는 적어도 불교적 건축과 유교적 건축이라는 두 개의 물줄기가 흐름을 알 수 있다. 때로는 한 줄기가 약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두 줄기가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부드럽게 섞이기도 한다. 20세기에 들어서 서구근대건축이라는 다른 줄기의 거대한 댐을 만나 아예 강의 흐름이 끊겨진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댐을 채우고 넘쳐 다시 강은 흐르기 시작한다. 또 다른 하나의 물줄기와 합쳐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