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대사관 -한국현대건축사의 측면에서
60년대의 3공화국은 ‘증산 수출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정략적인 그러나 의욕적인 출발을 한다. 정부 주도로 도로 항만 주택 등 대규모 토목 건설사업이 강력히 추진되며, 각종 금융 특혜를 기반으로 근대적 의미의 회사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경제 개발을 통한 소위 ‘조국 근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그 이전인 1,2공화국의 경제는 전근대적인 면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 한국 건축의 최대 과제는 경제 정책에 뒤따른 건설 물량의 소화와 건축의 근대화, 더욱 정확히 말하면 국제주의적 건축의 수용이었다. 60년대 초반의 굵직한 건축 도시적 사건이라면 청계천 변의 정비, 서울시 곳곳에 세워진 대규모 (당시로서는) 주택단지의 건설, 발전소와 중공업 부분의 공장 건설 등 모두가 전대미문의 대규모 물량들이었다. 또한 금융 특혜를 전담함으로써 선도적 자본 그룹이 된 은행들의 본점 건축들. 산업 구조의 근대적 개편과 근대 자본의 축적은 필연적으로 국제주의적인 근대 건축을 요구하게 된다. 최초의 커튼 월로 유명한 김정수의 명동 성모병원, 종합건축의 한일빌딩, 홍순오의 상업은행 본점, 유영근의 조흥은행 본점, 배기형의 유네스코회관, 이광노의 대한교육회관 등은 사회적 경제적 근대화의 추진에서 요구된 결과들이었다. 소위 국제적 모더니즘의 건축은 정권과 자본과 국민들이 갈망한 조국 근대화의 표상으로 받아 들여졌고, 이 과정에서 건축 전문인의 기술자적 직능이 사회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60년대의 특징이라면 김중업 김수근으로 대표되는 스타 건축가의 출현이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금의환향한 두 사람의 작품과 활동, 대사회적 발언들은 모더니즘의 수용으로 신장된 건축가의 위상에다가 ‘작가’로서 더 나아가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얹어 주었다. 61년 완공된 김중업의 주한 프랑스 대사관, 62년 완공된 김수근의 워커힐 힐탑바와 자유쎈타는 강렬한 표현주의적 형태로 인해 거의 최초로 근대적 건축 예술의 쟝르를 개척하게 되고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된다. 두 건축가의 업적으로 가장 크게 평가해야할 역사적 부분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두 사람의 데뷔작이 공통적으로 강렬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까닭 중의 큰 부분은 작가로서의 건축가를 의식한 자의식의 발로에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그 직후에 보여준 두 사람의 작업들, 김중업의 드라마쎈타 군인아파트, 김수근의 오양빌딩 우석의대병원 등은 개인적 표현보다는 모더니즘의 수용이라는 측면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더니즘을 논할 때마다 그 선두에 설 수 밖에 없는 김중업은 1952년 9월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 예술가 회의에서 꼬르뷔제를 조우하게 된다. 그의 사무실에서 56년 2월까지 만 3년반의 실무를 익히게 되는 데 주지하다시피 당시 꼬르뷔제는 인도의 샨디갈 계획에 열중하던 때이고 그 영향은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흔적을 남기게 된다. 프랑스 정부는 59년 주한 대사관 현상설계를 개최하고 당시 귀국해 있던 김중업에게도 참가를 권유한다. 7명의 응모자 중 김중업의 안이 확정된 것은 개인의 영예일 뿐 아니라 우리의 현대건축사에 큰 획을 긋는 바, 현대건축의 대표작 중에서 61년 경제개발정책이 공표되기 전에 설계된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본의 사회적 요구가 있기 이전에 최초로 작가의 의지를 조형화한 자발적 모더니즘의 건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작품에 쏟은 그의 정열은 건축계에서는 신화적인 이야기이다. 결국 62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65년 동양 최초로 프랑스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의 칭호를 수여받는다. 이처럼 ‘해외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은 그러나 건축가의 편중된 표현 의지와 당시 국내 기술진의 한계로 인해 구조적 결함과 누수 등부실한 시공물이 되고 만다. 70년대 후반 대사관동의 날렵한 지붕은 철거되고 현재의 조잡한 지붕으로 바뀌었으며 그 과정에 지금도 중진으로 활약하는 건축가가 관여하는 비극을 연출했다. 더욱이 88년 당시 프랑스 대사의 무심한 요구로 대사관저의 무분별한 증축이 벌어지며 그 과정의 악역은 김중업의 인척이 담당하게 된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한국 최초의 국제적 건축으로 기록할 수 있다. 물론 프랑스라는 문화 선진국 대사관이라는 이점과 꼬르뷔제의 원숙한 기량을 계승한 면에서 상당한 국제적 프리미엄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50년대 말부터 일어난 초기 모더니즘 특히 국제주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뉴부루탈리즘과 풍토주의 등이 등장하는 세계 건축의 흐름에 한 발 앞선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 작품에는 초기 모더니즘이 가졌던 기계 미학적 원리가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의 가소성과 낭만적 표정의 형태를 통해 작가의 개인적 에스프리를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60년대 세계건축의 무대에 등장 시켜도 부끄럽지 않다. 또 하나, 이 작품에서 우리는 최초로 소위 ‘한국성의 표현’이라는 명제에 접하게 된다. 그것은 60년대 중반에 일었던 ‘전통시비’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통건축의 모사나 변용과는 또 다른 차원의 정신적 표현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대지와 건물과의 관계, 건물과 건물 간의 관계 등 보다 근본적인 건축적 설정에서 한국성 한국적 詩心을 읽을 수 있다. ‘전통논쟁’으로 인해 강요되고 왜곡된 이후의 건축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국성의 본질에 몇 걸음 가까운 작품이며, 이런 까닭에 우리 건축계의 또 다른 멍에인 ‘전통계승’의 추구는 이 작품에서 시작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당시 모더니즘의 수용에 주력할 수 밖에 없었던 국내 건축계에 작가로서의 개인적 표현의 가능성과 한국성의 본질을 일깨워 준 선구적인 위치를 갖는다. 그러나 시대에 앞선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개인 세계에는 자만과 고독을 혹은 이에 파생되는 좌절을 수반하기 쉽다. 프랑스대사관은 김중업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이후의 작품들, 서산부인과나 제주대학본관 등 더욱이 80년대의 태양의 집이나 올림픽 기념문 등에서 프랑스 대사관의 감동과 완성도를 찾아볼 수 없는 한 작가의 이력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프랑스 대사관 이후에도 더욱 왕성했던 30년 간의 활동에서 제2, 제3의 프랑스대사관을 접할 수 있었다면 우리의 현대건축사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한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한국 모더니즘의 원점으로서 이 작품의 영원함은 우리의 현대사에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