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민을 가장 열 받게 하는 나라는 어디인가? ‘악의 축’ 발언으로 한반도에 전쟁의 공포를 잔뜩 조장하다가, 방한하여 당장 전쟁 계획은 없다고 병주고 약주는 횡포를 일삼는 대통령을 뽑은 나라다. 자기 나라에서 개최한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선수의 금메달을 박탈하여 자국 선수에게 안겨주고 환호를 지르는 나라다. 국제 정치에서, 경제에서, 정보산업과 기술에서, 심지어는 스포츠조차도 독점과 독식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라이기도 하다.
신년 컬럼으로 미국이라는 유일 강대 제국의 출현을 우려하면서 기우에 그치기를 바랬지만, 염려는 더욱 뚜렷한 현실로 획인되고 있다. 앞서의 컬럼이 실린 후에 주변의 몇몇 분들은 지나치게 편협된 시각이라고 지적했고, 특히 건축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하는 비판도 있었다. 모두 고마운 관심이며 질책으로 받아들였지만, 또 다시 건축을 넘어선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문명에 가장 크게 기여한 나라가 미국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이기와 물질적 풍요도 미국이 없다면 기대할 수 없음도 사실이다. 건축과 건설에도 미국의 공헌은 절대적이다. 마천루로 가득 찬 도시의 풍경,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과 공법의 발전,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건축의 성취, 대중 사회에 적합한 개념의 변화, 새로운 유형의 개발과 보급, 정보산업과 결합된 디지털 건축의 전개까지, 미국에서 출발된 건축적 기여는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전통과 장소적 고유성을 박탈하고, 건축적 가치를 상업화시키고, 물신적 욕망을 끝없이 증폭시킨 것도 미국적 가치관의 해악이다. 적어도 문화적 면에서 미국의 기여는 유럽이나 여타 세계의 건축에 비해 결코 높다고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량적이고 소비적 문화의 부정적 영향력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과 LA의 건축적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부시가 방한하고 김동성이 금메달을 빼앗긴 바로 그 날 아침, 우연한 자리에서 부산대학교 총장을 만날 수 있었다. 한때 재무부장관을 역임한 관료 출신으로서 자유 경선을 통해 국립대 총장으로 선출된 그의 이력은 전형적인 권력추구형 지식인이라는 선입견을 유도한다. 그러나 대학을 운영하면서 겪는 고초를 솔솔 털어놓으며 공감을 유발하더니, 필자의 전공이 건축임을 알자 곧바로 부산대 옛 본관건물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강대학교 본관과 더불어 몇 안되는 김중업의 초기작품으로, 모더니즘의 어휘를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뒷산과 어우러지는 곡선형의 평면을 가진 수작이다. 그러나 60년대 건물들이 대개 그러하듯, 당시의 시공 수준을 넘어선 조형적 시도 때문에 곡선계단들은 붕괴 직전으로 사용이 금지되었고, 수업공간의 부족으로 철거 논란이 일던 건물이다. 박총장이 부임했을 때는 이미 철거가 결정되었고, 예산도 확보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눈에도 김중업의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을 헐어버리기 아까워서 차일피일 집행을 미루며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건축계에서 지속적으로 건의한 보존의견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비좁은 현 캠퍼스의 기존 저층건물을 헐고 고층건물을 지어 밀도를 높이는 이른바 재건축 방법은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대학의 전통을 지우는 반역사적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른 넓은 곳에 제2캠퍼스를 조성하는 안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산시내에는 그만한 땅이 없어서 부산시역 바깥에 30여만평의 제2캠퍼스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계획이 발표되자 예상 밖의 난관에 부딪혔다고 한다. 동문들은 물론 지역민들 까지 부산대를 부산 바깥에 지을 수 없다는 지역 논리로 강렬히 반대해서 계획이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그는 단독으로 무기한 단식을 선언했고, 대학 총장의 단식 투쟁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전국 언론의 화제가 되고 그의 결단력을 지지하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제2캠퍼스 계획은 추인되었고, 철거 위기에 놓였던 옛본관을 보존하기로 결론을 맺었다. 김중업의 또 다른 명작, 제주대 본관이 건축계의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거된 전례 때문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귀중한 작품은 이런 우연곡절 끝에 관료 출신 총장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다.
미국의 횡포로 온 국민이 열받은 날에 한줄기 빛과 같은 기쁜 소식이었다. 옛본관은 현재 인문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철거 유보와 보존에 가장 반대한 이들은 인문대 교수들이었다고 한다.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 줄기차게 철거를 주장하면서 사사건건 총장의 정책에 반대했다니, 지식과 실천이 괴리된 지식인의 허위의식에 씁씁함이 남았지만.
근대화 이후, 한국은 항상 모순이었고 미국이 구원이었지만, 어느 순간, 적어도 이날만은 미국은 고통의 근원이었고, 국내의 노력은 구원의 희망이었다. 우리 사회의 잠재된 능력을 무시한 채, 바깥에 매달리는 허무한 짝사랑에 너무나 익숙해왔던 건 아닐까? 이제 우리 스스로 구원의 역량을 발휘할 만큼 성숙했는데, 그리고 어느 타자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혹시나 건축의 희망도 외국산 잡지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하게 난립하는 것 같은 우리 도시와 전원에서 발견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