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의 건축가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울의 창덕궁은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궁궐이다. 옛 한양 도성 내에는 5개의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제1의 왕궁은 물론 경복궁이다. 한양의 주산인 백악을 뒤로 하고 육조거리였던 세종로의 중앙에 자리 잡은 위치도 제1이고, 7,000여 칸이 넘는 가장 큰 규모의 왕궁이고, 광화문을 비롯한 당당한 건물들의 위용도 으뜸이다. 그래서 경복궁을 법궁(法宮), 또는 정궁(正宮)으로 불렀다.
반면 창덕궁은 봉우리 존재마저 희미한 매봉 아래 자리 잡았고, 정면은 종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전성기 때의 규모도 2,000여 칸에 불과했고, 건물들도 경복궁에 비해 소박하다. 창건 당시부터 보조궁궐인 이궁(離宮)의 지위로 만들어 제2의 궁궐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조 500여 년 동안 300년이 훨씬 넘는 기간을 국왕이 상주하여 법궁의 지위에 올랐고,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평가되어 급기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왜 조선의 국왕들은 크고 당당한 경복궁을 멀리하고, 좁고 소박한 창덕궁에 머물기를 좋아했을까? 이 근본적인 물음에 정설이 된 답은 없다. 단지 경복궁이 정면과 양 측면이 도시에 노출되어 심리적으로 불편하고, 중국식 제도를 따라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경직된 공간들을 싫어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반면 창덕궁은 정면은 종묘가, 동쪽은 창경궁이, 서쪽은 낮은 구릉이 감싸 아늑한 곳이며, 지형을 따라 자유롭게 배치된 건물과 공간들이 오히려 인간적인 친근함을 주기 때문에, 이곳을 더 선호했으리라.
창덕궁에는 궁궐 전체를 관통하는 구성축이 없다. 정문인 돈의문에서 정전인 인정전까지 이르는 길을 보자. 궁궐의 서쪽 끝 모퉁이에 자리 잡은 정문부터 예사롭지 않다. 정문을 들어서 바로 우로 꺾어 영제교를 지나 진선문에 다다른다. 진선문을 지나 다시 좌로 꺾어야 인정문에 닿고, 그 뒤에 인정전이 있다. 궁궐의 정문에서 옥좌가 있는 정전까지 두 번이나 꺾어 들어 가야하는 희한한 구성이다. 다른 전각들도 일정한 질서를 찾을 수 없이 방향이 제각각이고, 이들을 연결하는 통로는 미로와 같이 복잡하다.
창덕궁의 불규칙한 구성은 불규칙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고 조화를 이룬 결과이다. 평지에 위치한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은 뒷산에 흘러나오는 완만한 경사지에 놓였다. 자연 지형을 무리하게 절단하고 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지형에 맞추어 건축한 결과였다. 이러한 태도는 고려시대의 건축적 전통이며, 곧 한국적 전통이었다.
창덕궁의 공간 중 가장 창의적인 곳은 바로 인정문 앞마당이다. 사방을 회랑으로 두른 이 마당에는 3개의 대문만 있을 뿐, 주인이 되는 건물이 없다. 이 마당의 모양은 직사각형이 아니라 갈수록 좁아드는 사다리꼴이다. 일국의 궁궐마당, 특히 가장 중요한 정전으로 향하는 마당이 이처럼 불규칙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정문 앞마당에 얽힌 사연은 더욱 흥미롭다. 창덕궁 창건주인 태종은 총애하는 건축전문가인 신하에게 건설을 맡겼는데, 이 사다리꼴 마당의 설계가 마음에 안 들어 사각형으로 고치라고 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당은 원 설계대로 찌그러지게 건설되어, 격노한 태종이 그 신하를 하옥시켰다. 그러나 “자연 지형과 주변 환경에 맞추어 일부러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신하의 변명에 수긍하여 용서하고, 더 큰 치하를 했다는 것이다. 그 신하가 바로 조선조 궁궐을 비롯한 공공시설들을 도맡아 설계하고 공사했던 박자청 (朴子靑1357~1423)이다.
내시에서 판서가 된 올곧은 건축가
박자청은 고려 말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무신인 황희석의 사병으로 입신했다가, 조선 건국 시기에 공조판서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황희석은 왜구 격퇴전과 위화도 회군 등에서 이성계의 전위로 활약했고, 조선 개국 2등 공신까지 오른 자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재주와 남다른 충성심을 가졌던 박자청은 이성계의 눈에 들어, 이내 그를 측근에서 모시는 내시(內侍)가 되었고 조선 건국 때 중랑장이라는 무장의 지위에 올랐다.
내시라면 환관을 연상하지만, 환관만이 내시가 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전통이다. 고려와 조선 초까지 내시는 일반 관료 출신의 친위대였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박자청 역시 환관이 아닌, 무관 출신의 내시로, 건국 초기에는 궁궐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번군사로 궁문을 지킬 때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박자청은 어명이 없다고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에 화가 난 의안대군은 발길로 걷어차는 등 얼굴에 상처가 날 정도로 갑질 폭행을 했으나, 요지부동 문을 지키고 출입을 막았다. 이 사건을 안 태조는 오히려 의안대군을 나무라고 박자청을 친위 경호원으로 발탁했다. 박자청은 충정을 알아준 태조에게 더욱 충성하여, 밤잠을 안자고 주위를 호위했다고 한다.
박자청은 단순한 무관이 아니었다. 그는 일찍부터 장인적 기질을 발휘했다. 조선 개국 직전인 1390년 (공양왕 2년)에 이성계 일족은 금강산 비로봉에 금동 사리용기를 만들어 바쳤다. 정치적 야망을 담은 비밀스러운 불공 의식이었는데, 이 사리용기의 발원자 명단에 박자청이 등장한다. 아직은 말단 사병에 불과한 그가 상류층 부인들의 이름이 즐비한 명단에 포함된 것은, 사리용기 제작의 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조선 개국 직후에는 공공 공사와 건설을 담당하는 선공감으로 보직을 옮겼고, 이내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가 되어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송도의 경덕궁을 수리하고 왕실 사찰인 개경사와 연경사의 불사를 담당했다. 문묘인 성균관을 건설하고, 모화루와 경복궁 경회루, 경덕궁 건설, 종각 근처의 시전 행랑 조성, 동대문 밖 마장 건설 등 중요한 공공 건축과 도시 시설들을 계획하고 건설했다. 뿐만 아니라, 살곶이 다리의 교각 건설, 도성의 수축, 용산의 군자감 건설, 청계천 수축 등 조선 초 한양의 웬만한 역사는 모두 박자청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한양의 기획자는 정도전이지만, 실제 건축가는 박자청이었다 할 수 있다. 태조의 건원릉, 정비인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 내외의 후릉, 그리고 태종의 헌릉도 박자청이 조성한 왕릉들이다. 그리고 그의 최대 역작은 앞서 언급한 창덕궁이었다.
그가 숱한 왕릉 조성을 주도했다는 것은 땅을 읽고 지형을 살피는 능력이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건축가로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질을 갖춘 것이다. 또한 종로에 행랑을 건설하고,청계천을 조성하고, 성곽을 쌓았다는 것은 도시를 해석하고 조성하는 탁월함도 갖춘 것이다. 개개 건축물 설계에도 능했다. 경복궁 경내 서쪽에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풍화로 쓰러져 재건의 임무를 박자청에게 맡겼다. 그는 이곳에 큰 연못을 파고 으리으리한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고 태종은 왜 이리 크게 지었냐고 야단을 쳤다. 박자청은 땅이 습해서 연못으로 해결했고, 누각이 또 붕괴될까봐 크고 튼튼하게 지었다고 답했다. 땅을 다루는 식견, 구조적 해석, 그리고 무엇보다 자발적인 판단력을 가진 진정한 건축가였다.
태조 뿐 아니라 태종은 이 뛰어난 건축가를 총애했고 신임하여 급기야 공조판서에 임명했다. 일개 내시에서 판서까지 이르니 얼마나 시기와 질투를 받았을까? 세종실록의 사관은 그를 “성품이 가혹하고 각박하여 어질게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미천한 출신으로 다른 능력은 없고 오로지 토목 기술 하나로 최고위직에 올랐다‘”고 혹평했다. 아마도 주어진 공사 임무 달성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현장을 닦달했던 모양이다. 또한 장인 특유의 고집과 위세도 부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얼마나 적이 많았을까? 박자청은 끊임없이 모함과 고발에 시달렸다. 오로지 태종만이 그를 감쌌다. “박자청은 비록 배우지는 못했으나 오직 부지런하고 올곧다. 종묘 사직의 공사는 모두 내가 명하여 이룬 것이다. 어찌 그 자신의 영화를 위해 했겠느냐? …. 내가 그를 파직시키더라도 어느 누가 대신 그만큼 할 것인가? 경들은 다시 모함하지 말라.”
건축가 박자청의 능력도 탁월했지만, 이만큼 전문가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건축주를 만날 수 있을까? 훌륭한 건축의 절반은 건축주의 몫이라 했다.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은 이러한 건축주와 건축가가 만났기에 가능했던 걸작이다. 또한 미천한 신분이지만 능력만 있다면 장관급 궁정 건축가로 발탁할 만큼, 건강한 기풍을 가졌던 시대 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