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 마을은 순천 박씨들이 모여 사는 씨족마을이다. 이들은 500여년전 세조의 왕위 찬탈을 죽음으로 반대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자손들이다. 사육신들은 처가와 외가, 친가의 삼대를 처형하는 이른바 ‘삼족지멸’의 화를 입어 직계후손들이 있을 수 없으나, 묘동마을의 박씨들에게는 무협만화에 나오는 것 같은 기구한 가문의 역사가 있다.
박팽년의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어 삼족이 참수당하는 와중에서 박팽년의 며느리는 임신 중이었다. 비록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철혈정권이었지만, 임신 중인 태아에게는 관대하여 딸이면 낳아 노비로 삼고, 아들이면 낳는 즉시 죽이리라 잠시 처형을 유보했다. 또한 며느리의 몸종 가운데 거의 같은 시기에 임신한 여종이 있었다. 박씨 며느리가 낳은 아이는 아들이었고, 몸종이 낳은 아이는 딸이었다. 이에 서로 아이를 바꾸어 며느리는 처형을 당하고, 몸종의 여아는 관비로 키워지는 한편,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을 맡은 몸종은 멀리 시골로 피신하여 비밀리에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 세월이 30여년을 흘러 사육신의 화가 점차 진정되었을 때, 드디어 몸종은 상전의 아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었고, 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관아에 나아가 자신 가문의 비밀과 진실을 고하게 되었다. 당시 임금은 세조의 아들인 성종으로 아버지의 부당한 권력 찬탈과 사육신의 충절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육신의 유일한 혈육을 사면했을 뿐 아니라, 가문을 일으킬 수 있도록 재산을 하사하는 등 배려를 베풀었다. 일종의 과거 청산과 화해의 제스처였다.
이렇게 복권된 이가 바로 묘동 박씨들의 선조인 박일산이고, 그후 대대 손손 묘동마을은 박씨들의 터전이 되었다. 묘동마을은 낮은 구릉의 능선이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천혜의 은둔지에 자리를 잡았다. 대구-왜관을 잇는 중요한 국도에서 면해있는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국도변에서는 마을의 존재를 알 수없을 정도로 숨어있는 지세를 가지고 있다. 마을에는 오래된 한옥 고가들이 즐비하고, 그 한 가운데는 중심도로의 끝에는 보물 554호로 지정된 태고정과 육신사가 자리한다. 원래 이 자리에는 99칸의 대종가가 있었는데 언젠가 불에 타버렸고 별당인 태고정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육신사는 사육신 여섯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큰 사당으로서, 사육신의 직계자손이라고는 예의 박일산 밖에 없으므로 박씨 후손들이 도맡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묘동 박씨들은 이처럼 유서있는 가문일 뿐 아니라, 자손들이 열심히 일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조선조에도 수없이 많은 과거합격자들과 고위관료, 유명한 학자들이 나와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면서 마을을 가꾸어 왔다. 근세에도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씨가 이 마을 출신일 정도로 명문가를 유지했다. 따라서 묘동마을에는 아직도 10여채의 고가들이 잘 보존되고 있어 전통마을의 품위와 아련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건축적인 백미는 파회마을에 있는 삼가헌이다.
삼가헌은 박씨 가문의 파손이 분가를 해 이룬 대규모의 살림집이다. 파회마을은 묘동 본마을에서 서쪽으로 산을 넘어 형성된 마을이고, 현재는 대구-왜관 국도변에 위치한다. 본 마을이 고만고만한 여러 살림집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진 반면, 파회는 삼가헌을 중심으로 몇채의 작은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비록 마을의 규모는 작지만, 뒷산에 이 마을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낙빈서원을 세웠을 정도로 재력이 풍부했고 문화적인 의식이 높았던 곳이다.
삼가헌은 크게 살림집 부분과 별당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살림집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고간채 등 여러 건물로 이루어졌다. 삼가헌이란 사랑채의 이름이고, 별당의 이름은 하엽정이다. 별당의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별당 앞에는 넓은 네모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 한 가운데에 둥근 모양의 인공섬이 만들어졌는데, 도교 신화에 나오는 신선도의 하나인 봉래섬이다. 중국 고대설화에 중국의 동쪽 끝 발해만에는 바다 가운데 3개의 섬이 있는데, 그곳에는 신선이 살고 있어 불로장생의 낙원이라는 것이다. 3개의 신선도는 봉래-방장-영주섬인데, 우리나라 연못에 자주 등장하는 조경요소였다. 일반 민가 연못은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섬으로 농축시켰지만, 보는 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성에는 변함이 없다.
삼가헌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다름 아닌 여름이다. 푸른 연잎과 붉고 하얀 연꽃이 연못을 가득 메우고, 그 가운데 섬에는 한 그루 소나무가 휘어진 듯 곧다. 별당의 작은 누마루에 앉아 이 경치를 바라보다 멀리 들판과 산들의 자연경치에 넋을 잃고, 비라도 올라치면 그야말로 신선의 경치가 따로 없다. 십년 전,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가 TV드라마로 방영됐을 때, 별당아씨 서희가 머물던 그 별당이 바로 이 하엽정이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민가별당으로는 최고의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이다.
별당의 유명세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오히려 건축적으로 중요한 곳은 본채의 살림채들이다. 넓은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띄이는 것은 사랑채보다는 그 옆에 있는 중문채다. 중문이란 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문을 말하는 것이며, 남자들의 영역인 사랑채와 여자들의 안채 영역을 서로 격리시키는 동시에 연결시키는 중요한 문이다. 대문에서 안채의 안마당까지 들어가려면 방향을 4번 꺽어야 한다. 중문을 열어두어도 안마당이 보이지 않는다. 중문채의 문짝은 비록 열려있다고 해도, 그 뒤를 벽이 막고 있어서 ‘열린 듯 닫혀있는 문’이 된다. 열어두면서도 닫는 구조의 문은 오히려 폐쇄성이 더욱 강하다. 필요없이 들어오면 안된다는 내외의 강한 거부를 건축적 구조로 대신하고 있다.
대부호의 주택인 삼가헌의 모든 건물은 튼튼한 목조뼈대에 기와지붕을 올린 한옥이다. 그러나 중문채의 지붕만은 초가로 이루어져 의아심을 자아낸다. 이는 청빈한 사대부의 정신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선택이다. ‘청빈’이란 부유한 환경 속에서 일부러 가난을 자처하는 마음으로, ‘빈곤’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가난한 집의 초가집이야 재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부자집의 초가집은 여유있는 절제와 겸손의 표시이다. 이를 위선이라고 몰아칠 수만은 없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 식의 천박한 과시보다는 훨씬 고급스러운 정신이기 때문이다. 아늑하게 꾸며진 안채의 분위기에서도, 작은 사랑 뒤에 숨어있는 보물창고-고간채에서도 이런 청빈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삼가헌에는 멋과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