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햇병아리 교수였던 시절, 공간사에서 연락이 왔다. 공간에서 설계한 진주박물관에서 작가가와의 대화를 진행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때는 진주까지 자리를 비우기도 마땅찮았고, 학과에 즐비하신 선배교수께 기회를 미루는 것이 순리로 보여 다른 분을 추천했었다. 사흘 후, 직접 걸려온 전화에는 굵은 부산사투리가 전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장세양 선생이었고, 진주박물관 대담자는 꼭 나여야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자는 반명령조의 요청이었다. 새까만 후배에게 이처럼 관심을 보여주는데 거절할 수 있을까. 1주일 후 공간사 회의실에서 드디어 대담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이 장선생과의 첫만남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대담내용이 아니라 대담 후에 가진 점심식사 자리였다. 가회동의 어느 음식점에서 장장 4시간에 걸친 식사 도중, 참석한 세사람이 비운 소주는 모두 7병이었다. 나와 공간지 담당자가 합해서 1병, 나머지는 모두 장선생의 몫이었다. 아무리 주당이라도 제정신이었겠는가? 거나해진 그는 내게 많은 주문을 했다. 한국건축 뿐 아니라 세계건축으로 시야를 넓혀달라는 요구부터, 공간사에 자주 들러서 같이 공부하고 작업하자는 등등. 또 대담 때는 공개하지 못했던 진주박물관 설계에 얽힌 사연들까지. 그 앞해에 내가 쓴 ‘한국의 건축’이 공간사에서 출간되었기 때문에 공간사와 관계는 있었지만, 장세양 선생과의 첫만남은 무척 이례적이었고 의아했었다. 그 의아함에 대해서 공간사 담당자의 설명을 듣고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당시는 김수근 선생이 타계하시고 공간사의 경영마저 위태로울 시기였고, ‘한국의 건축’ 출간 후원을 장선생께서 개인적 비용에서 충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날의 만남도 대담을 핑계로 나에 대한 격려와 충고가 목적이었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장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어이없는 그의 영정 앞에 흰 국화꽃을 바치면서 줄곧 첫만남의 기억이 떠나지 않는다. 그후 최근까지 10년이 넘도록 더욱 많은 도움과 격려를 받았다. 새로운 글을 발표하면 예외없이 전화를 걸어 소감을 말씀해 주었고, 내게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축하해 주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상의를 할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가족과 공간사의 비극일 뿐 아니라, 항상 도움을 받던 커다란 개인적 손실이기도 하다. 어디 나 뿐이겠는가. 크고 작은 건축계의 일들부터, 음악 미술 문화계까지 김수근 선생의 유지를 넘어서 독자적인 후원과 기회를 마련해 주시던 이 시대의 메디치는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3,4년 전부터 가끔 만나면 입버릇 같이 하시던 말씀을 이제야 비로소 사뭇치는 회한임을 깨달았다. 1년에 작은 프로젝트 하나만 하겠고, 그것도 외국에 머물면서 공부하면서 수행하고 싶다던 말씀. 단순한 현실도피의 말씀이 아니고, 이제는 건축가 장세양의 길을 걷겠다는 제2의 출발 선언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으면서 괜한 희망이라고 흘려버렸던 내 둔감함이 한스럽다. 속으로 삭였던 현실적 고통과 외로움이 얼마나 컸던가. 공간이라는 대조직을 이끌면서, 결코 경영자로 만족하지 못하고 작가의 길을 고수하려면 얼마나 많은 개인적인 갈등에 시달렸을까. 공간 잡지와 문화재단까지 이끌고 건축계의 일까지도 도맡아야 했던,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강골 장세양의 삶을 살아야했던 내면적 고통을 그 누가 눈치챌 수 있었을까.
김수근의 후계자로서가 아니라, 공간사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건축가 장세양으로서 꽃피울 여건이 이제야 마련됐는데, 그는 떠나고 말았다. 김수근 선생이야 원없이 많은 작품을 남겼고, 온갖 영예를 누렸지만, 장선생은 억울하지도 않으신가. 그보다도, 생전에 벌여 놓으신 그 많은 활동을 이제 누가 계속해 나갈 수 있는가. 장선생께 받은 것은 너무 많은데 보답도 하지 못한채 영원히 이별해야하는 내 안타까움을 저승에서나마 생각하고 계실까. 그러나 그 많은 회한에도 불구하고 편히 잠드소서. 그리고 생전의 크신 포용력과 역량을 저승에서도 발휘하셔서 이승의 건축계에 더 큰 음덕을 베푸소서. 첫 만남 때 미처 더 권하지 못했던 소주잔을 이제 다시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