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후기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이다. 그러나 성리학이란 대중화大中華였던 밍明왕조가 오랑캐인 만주족에 의해 무너면서 이미 대륙에서는 폐기된 이데올로기였으나,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던 조선조 지배층에 의해 한층 공고히 되어 정치 분야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체계로서 자리잡게 된다. 조선 후기에 나타난 권위 건축물의 질적 퇴행 현상의 원인도 얼마쯤은 성리학에 있는 것 처럼, 성리학이란 근본적으로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윤리를 다루는 추상론이요 대표적인 허학虛學이다. 이 정체된 허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돌파구를 열려고 시도했던 진보적 지식인들이 실학자요 그들의 학문을 실학이라 부르며, 우리는 그들의 선각자적인 노력과 그 학문 체계의 실사구시적 내용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아 왔다. 건축역사학계에서도 실학건축사상을 조선조 건축사 최대의 유산으로 꼽기도 한다. 또 70년대의 개발독재 분위기와 과학기술입국의 기치 아래 실학의 연구는 꽃을 피워왔다. 그러나 실학이란 어디까지나 성리학이란 거대한 허학의 기반 위에 존재했던 것이며, 실학의 역사 가치란 전위적 희소성에 있었음을 망각하기 쉽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시간과 공간을 규정하는 용어들이 꽤나 많다. 정보화 시대, 후기 자본주의 사회, 탈 근대, 첨단 기술사회 등등. 이러한 규정은 사회와 시대의 한 단면들을 분석한 것들이지만 인간의 이성 우월주의에서 보다 유물론적인 사회로 전환되고 있다는 인식을 공통적으로 깔고 있다. 80년대 후반 건축계에 등장한 하이테크 건축, 해체건축 등의 흐름 역시 시대적 흐름에 대한 인식론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근대건축 초기 구성주의의 아이디어들이 그것들을 뒷받침해 줄 공업과 기술이 그리고 사회적 경제력과 정치적 후원이 부족하여 좌절했던 시대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가까운 미래는 물질 만능 기술 우위의 시대가 될 것이고,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의 정보를 수집하고 첨단 기술을 습득하여 응용하는 인테리젼스류의 건축이 우수한 건축이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예견과 선택은 너무나 즉물적이다. 고도 기술의 사회가 될 수록, 첨단 정보의 시대가 될수록 인간의 정신적 선택의 중요성은 오히려 증대된다. 이제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 지구라는 천체를 공중 분해시킬 수도 있고 사하라 사막에 곡식을 경작할 수도 있으며, 동경만에 수백층의 건물을 지을 수도 부산만에 거대한 인공섬을 조성할 수도 있는 시대에 도래했다. 공업과 기술이 불가능한 것이 없어질 정도로 발전된 상황일수록 선택 여하에 따라 우리 세계와 환경을 파괴할 수도 또는 재생시킬 수도 있는 시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실학만이 발달한다고 해서 인류의 밝은 미래와 우수한 도시 건축환경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실학이 범람할 수록 허학의 역할은 더욱 소중해 지는 것이다.
우리 건축학계의 동향과 건축가들의 의식을 점검해 볼 때 심각히 우려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건축의 허학 즉 건축이론과 역사학은 뜬 구름잡아 과거로 유람하는 쓸데없는 것으로 매도하며, 오로지 건축학의 비젼은 시공학 환경과학 구조역학에 달려있는 것으로 경도되어 있다. 건축 설계과정에서는 개념적인 철학과 이론적 바탕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감각과 세련된 기법의 조합만이 존재할 뿐이다. 건축의 실학은 도구일 뿐이다. 끝을 모를 정도로 무수히 존재하는 도구들은 건축가의 선택에 의해 이용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구에 얽매이고 도구를 추종하고 있다. 낙관론자들의 말대로 미래는 정보화 시대이며 첨단 과학의 시대라 할 지라도 그럴수록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가 훨씬 중요해진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세계에 유래없는 건설 붐으로 엄청난 물량의 건축물들을 설계하고 시공하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건축가들은 왜 그다지 허전해하는가. 해외건설에서 쌓인 높은 노우하우를 자랑하면서도 왜 행주대교가 무너지고 독립기념관에 빗물이 새는가.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공학자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문제의 핵심은 기술을 다루는 인간들의 선택이 잘못되어서이고, 정당한 선택을 불가능케 할 수밖에 없을 만큼 허학이 부재한 데에 있다. 한국 현대 건축의 위기는 공학기술의 미숙해서라기 보다는 철학적 기초와 이론 정립이 부재한 데에 기인한다. 건축가들의 창작 행위에 대한 정당한 이론이 구축되지 않고는 첨단기술 사회에서 건축의 정당한 역할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