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는 유물 유적의 발굴과 조사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실체가 밝혀져 있다. 근세라 할 수 있은 조선은 유적뿐 아니라 풍부한 문헌 기록을 통해 자세한 전모를 알 수 있다. 반면 중세인 고려의 문화는 문헌 기록도 빈약하고 그 중심 무대가 현재의 북한 땅이어서 발굴조사 등 유적 자료도 여의치 않다. 특히 음식문화는 실물을 보존할 수 없기에 문헌 자료를 통해서만 전수될 수 있지만, 고려의 음식문화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고려는 지방자치를 기반으로 다양한 지역문화가 번성했고, 활발한 국제 교류를 통해 신문물 수용에 개방적이었으며, 섬세하고 정교한 공예 정신으로 가득한 창의적인 나라였다. 한 사회의 문화는 총체적이어서 이러한 다양성, 개방성, 창의성은 모든 분야에 작동하며, 고려의 음식문화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을 규합해 나라를 세웠다. 건국에 참여한 호족들은 이내 고려사회의 귀족 세력이 되었고, 이들은 각자의 연고 지역을 세습할 수 있었다. 각지의 토착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역을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시키기에 힘썼고, 그 결과 특색있는 지역문화들이 꽃을 피웠다. 예컨대 고려 문화를 대표하는 청자는 전라 해안 지역이 대표적인 산지였고, 금속활자인 직지심경은 청주의 사찰에서 주조 편찬된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석탑들은 크게 개성 일대 수도권, 충청 일대, 강원 이북, 영남 일대 등 다양한 지역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개성 수도권의 석탑들이 고려적 특성을 대표한다면, 충청은 옛 백제계, 강원 이북은 고구려계, 영남은 신라계의 전통을 따랐다.
고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외교 강국이었다. 고려 중기까지 중국 대륙에 송과 요 등 복수 왕조가 들어서 복잡한 정세를 이루었다.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해 등거리 외교술을 통해, 때로는 외침을 물리치는 군사적 무력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예성강 하구인 벽란도는 개성의 외항으로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상인들까지 드나드는 국제적인 무역항이 되었다. 벽란도에서 개성까지 이르는 길에는 상점가를 형성해 국제 문물의 수입 창구가 되었다.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한 나라로 만든 팍스 몽골리아 시대는 고려의 국제화 개방화 시기와도 일치했다. 기록에 등장하는 개성의 다점茶店은 고려판 스타벅스였으며, 쌍화점雙花店은 고려식 맥도날드였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정부는 물론 민간에서도 불교를 숭상하고 불교문화를 후원, 장려했다. 불교문화는 현실과 이상을 일체화해 현실에 부처의 장엄한 나라를 재현하려 노력했다. 불교회화, 조각과 건축은 물론이고 특히 불교 공예가 크게 발전했다. 따져보면 고려청자는 극히 불교적 그릇이며, 금속활자는 불경을 간행하기 위한 발명품이었다. 불교용 장신구나 의례용품 등 현존 유물들은 정교하고 우아하다. 고려 중기 개성을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의 공예품 수준을 “細密可貴 정교하고 아름다워 가히 귀하다”라 크게 감탄했다.
고려는 강인한 국가였다. 건국의 주역들인 호족은 지역의 사업가인 동시에 민간 군인이었다. 상업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사병 양성을 통해 외부의 간섭과 침략을 물리쳤다. 고려의 귀족 세력이 된 후에도 이들의 강인한 주체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여진족을 정벌한 윤관이나,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크게 물리친 강감찬 등은 모두 문벌 귀족이었다. 세계 제국 몽골은 고려를 40년간 7차에 걸쳐 침략했으나, 끈질긴 항전 끝에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형식상 항복이 아닌 강화는 몽골 역사상 유래없는 것이었고,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 하여 고려의 자치와 독자적 문화를 인정받았다. 1세기 동안 몽골의 직간접적 지배를 받고도 고려의 전통은 이어졌다. 이 시기에 의식주부터 종교와 사상까지 새로운 외래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왔으나 전래의 전통에 더해 더욱 풍부한 보편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아름지기가 이번에 개최하는 고려의 음식, <고려味려>전은 무모할 정도의 도전이다. 음식이란 자세하고 정확한 기록이 없는 한 그 전승과 보존이 불가능한 분야다. 더욱이 천년 가까운 공백을 뛰어넘어 음식문화를 재현하는 것이 무슨 현재적 의미가 있을까? 현대의 한국인들은 브라질산 커피를 마시고, 호주산 스테이크를 먹으며, 유럽산 와인을 즐긴다. 정통 한식에 대한 선호가 줄어든다는 우려도 있지만, 오히려 외래 음식이 한국화되어 한식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21세기 한국의 음식문화는 다양하고, 개방적이며, 창의적이다. 어쩌면 700년 전 고려인들이 매일 맛보았던 음식문화도 현재와 유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고려味려>전은 과거를 돌아보는 전시가 아니라 현재를 조명하고 앞날을 조명하는 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