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7.09.08.
출처
플러스
분류
건축론

온양과 예산을 거쳐 서해안에 이르는 루트는 삼국시대부터 자주 이용되던 곳이다. 서산부근의 항구들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출발지들이었다. 따라서 중국유학을 갈망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지나가던 길이었고, 거꾸로 해안에서부터 내륙으로 이 길을 따라 중국의 문물들이 한반도로 밀려들어왔다. 서산지방에 있는 다량의 백제시대 마애불들은 중국문물 수입의 증표들이다.
이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기획해보자. 80년대부터 대학도시로 발전해 가고 있는 천안에는 단국대, 상명대, 호서대 등이 새로운 캠퍼스를 구축하고 있다. 정림건축, 동우건축, 김기석 등 우리의 중견건축가들이 설계한 작품들로 꾸며진 캠퍼스의 건축들을 감상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그보다도 온양에 있는 4점의 현대건축물을 꼭 들려보길 권한다. 온양으로 진입하기 직전, 왼쪽 산등성이에는 신도리코 온양공장이 있다. 복사기 등 사무용품 제조업체로 이름높은 이 중기업의 건축들은 90년대의 대표작가 민현식의 작품이다. 논 한가운데 세워진 기숙사동에서는 벽과 가로가 내부화된 풍경을 읽을 수 있고, 최근 준공된 공장 사무동건물에서는 마당의 내부화과정을 즐길 수 있다.
다른 두점의 건물은 온양민속박물관 안에 있다. 하나는 70년대 세워진 박물관 본관, 김석철의 출세작이다. 박물관의 동선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조직한, 전시공간으로는 합리적이면서 명쾌한 공간이다. 또한 모더니즘적 구성 속에서 한국적 정서를 구현하려 노력한 패기와 성취를 볼 수 있다. 본관 바로 맞은 편에는 타원형의 타워를 가진 또 하나의 미술관이 있다. 대표적인 재일건축가, 이따미 쥰의 한국 상륙작이다. 꼬르뷔제의 교회를 연상케하는 매스와 주황색 전돌의 토속적 재료가 조화된 야심작. 두 전시공간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법이다.
이제 조선시대로 올라가자. 우선 외암리 민속마을에 있는 여러 채의 주택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민속마을답게 TV드라마의 로케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곳이다. 대부분 조선말, 일제초의 주택들로 고유한 구성보다는 근대화된 모습들이 삽입된 묘한 동네다. 그보다 이 집들의 정원을 눈여겨 살펴보자. 모든 집들을 연결하고 있는 수로가 나무와 주택들을 일체ㅐ화된 거대한 정원으로 조직해 나간다. 특히 감나무를 주요 수종으로 삼아 가을의 풍경이 한층 깊어진다.
외암리 마을에서 더 깊이 들어간 배방리에 맹씨행단이 있다. 전하기는 최영장군의 유택으로 조선초 명재상인 맹사성에게 물려진 주택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현존하는 주택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건축이다. 골동품적 가치 말고도 특이한 구성과 직설적인 형태가 인상적이다. 집이름대로 거대한 은행나무 속에 자리잡아 특히 가을의 행단은 운치를 더한다.
맹씨행단이 고려말의 건축이라면, 예산 수덕사는 고려중기의 건축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설명을 필요치 않지만, 수덕사 어귀의 수덕여관에는 꼭 들려보도록. 뒷뜰 바위에 이응로의 문자그림들이 조각돼 있기 때문이다. 동베를린 간첩사건에 연루돼 국내출입이 불가능했던 노화백의 초기 구상을 엿볼 수 있다.
700여년을 오르락거린 지친 몸을 덕산의 온천에서 풀어보자. 서늘한 바람들이 온천을 그립게하는 계절, 따뜻한 물 속에서 피로를 녹이고, 그리고 시간이 더 남으면 서산의 백제 석불들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