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10.03.07.
출처
아시아나
분류
건축문화유산

조선 왕조가 서울에 남겨 준 궁궐은 모두 5개다. 그 가운데 창덕궁은 1405년에 세운 제2의 왕궁이다. 원래 왕이 상주하는 법궁은 서쪽에 있는 경복궁이었고, 옛 서울의 동쪽에 세운 창덕궁은 예비용 궁궐이었다. 그러나 역대 왕들이 창덕궁에 주로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으로 구실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1610년 가장 먼저 창덕궁을 재건했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명실상부한 조선 왕조 제1의 궁궐이 되었고,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도 사용한 최후의 왕궁이기도 하다.
궁궐은 왕의 권력을 상징하며 한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건축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왕궁은 대개 넓은 평지에 좌우 대칭의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수많은 건물들을 배치한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 중국의 자금성, 한국의 경복궁이 그러하다. 반면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은 이러한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이후에 건설된 경희궁이나 덕수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비대칭으로 흐트러진 자연스러움 속에서 왕궁의 격식과 위엄을 녹여 놓은 절묘한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높이 사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창덕궁 정문에서 주 건물인 인정전으로 가려면 여러 차례 길을 꺾어야하고, 다리를 건너고 몇 개의 대문을 지나야한다. 왕의 공간은 그만큼 신성한 곳이다. 인정전 앞의 텅 빈 마당은 신하들을 도열시키고 국가적인 행사를 벌였던 곳이다. 이곳에 서서 왕이 앉아있는 인정전을 바라보면 건물 뒤로 숲이 감싸고 있어서 위엄과 친근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아마도 조선의 왕들이 신하를 대하는 성품이 그랬을 것이다. 인정전 뒤쪽과 오른쪽 바깥으로 왕과 왕비의 침전들이 에워싸고 있다. 특히 평소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희정당에는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고,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있다. 20세기 초 막 유입되기 시작한 유럽 문명과 한국의 전통 문화가 섞였던 현장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의 창덕궁은 원래 상태의 1/5 정도만 남아있다. 그래도 남아있는 곳 중에서 우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은 궁의 동쪽 모퉁이에 있는 낙선재 일곽이다. 기품있는 살림집들이 여러 채 날렵하게 서있고, 그 뒷동산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지는 곳이다. 이곳에는 왕실의 애틋한 로맨스가 서려있다. 24대 왕인 헌종은 총각시절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었으나, 원치 않는 왕비와 정략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그는 첫사랑의 아가씨를 후궁으로 삼아, 왕비의 침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그 후궁의 처소를 지어준 것이다. 헌종은 종종 이곳을 서재 겸 응접실로 사용했으니, 첫사랑에 대한 애틋함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로맨티스트였다.
창덕궁 북쪽으로 훨씬 넓은 영역에 거대한 왕실 정원을 가꾸었다. 본격적으로 왕실정원을 꾸미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다. 그 후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삽입하였다.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한 솜씨이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하나의 독립된 정원을 꾸몄는데, 서로 크기와 형상이 다른 정원이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뒷산으로 이어진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이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이에 비해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체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첫 번째로 나타나는 부용지 정원은 후원 전체의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1,000m2의 사각형 연못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언덕 위에 있는 누각 일대는 왕실의 도서관이었고, 연못가 마당에서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연못 한쪽에는 휴식을 위해 정자를 지었는데, 마치 사람이 바지를 걷고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이다.
후원의 여러 정원에는 크고 작은 정자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 안에서 바깥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곳에 세운 휴식용 건물들이다. 숨막힐 듯 빽빽한 궁궐 생활의 규범을 잠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건물답게 다양한 모습들로 생겼다. 육각형 건물, 부채꼴 건물, 이층 건물, 원형 건물, 긴 건물, 정사각형 건물 등….. 가장 특징적인 정자는 가장 깊숙한 옥류천 정원에 있는 청의정이다. 이 건물은 지붕을 지푸라기로 덮은 초가이다. 가장 신성한 장소에 이처럼 간략한 건물이 있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 정자 앞에는 작은 논이 있다. 농업 국가였던 조선의 왕의 손수 이 논에서 농사를 지었고, 수확한 볏짚을 모아 지붕을 덮었던 것이다. 쉬면서도 국민들의 노고를 직접 체험하고 이해하려했던 왕들의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