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4.09.01.
출처
공간
분류
건축비평

1. 앞 이야기 : 선정의 기준

2년전 “공간 25년상”의 1회 수상작으로 김중업의 주한프랑스대사관을 결정한 바 있다. 당시의 수상 결정이유는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시초이자 대표작이라는 점, 그리고 순수히 건축적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불과 25년전, 그러나 오히려 조선시대의 건축보다 아득히 멀고 생소한 가까운 과거의 건축을 평가한다는 작업은 즐거움보다 안타까움에 가깝다. 아무리 꼽아 보아도 몇 안되는 작품들, 그보다 더 희소한 건축가들. 그리고 각 작품들이 갖는 뚜렷한 한계와 부족함. 그러면서도 90년대 건축을 가능케한 모태가 되었고, 열악한 환경 안에서 그 정도의 성과도 기적에 가깝다는 위안들.
25년이라는 차이는 과거인 동시에 현재다. 한국건축은 2-3대의 새로운 세대들로 바뀌었고, 그들 사이에는 동질성보다는 차별성이 더 크게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현재의건축과 건축가들은 25년전의 자원에 뿌리를 두고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차원의 평가와 동시에 현재적 유용함의 차원에서 평가되어야할 이중성을 갖게된다. 제2회 25년상 수상작을 결정하는 과정은 역사성과 현재성의 두 시각 사이에서, 또 건축물과 건축가라는 두 존재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수상작 결정에 두가지의 기준이 작용하였으며, 모두가 심사자 본인이 우리의 근대건축을 보는 관점에서 설정된 것이다. 첫째, 적어도 70년대 이전의 작품들에 대해 건축적 완결성만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 건축역사는 건축물 보다는 건축가의 이론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야 한다는 것이 심사자의 생각이며, 특히 수준작들이 몇 안되는 근대건축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건축가 중심의 역사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과거의 건축과 건축가의 실천과정을 통하여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여야 한다는 것. 더 나아가 현재의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제공하는 과거의 건축을 발견하는 것. 아마 이 필요성 때문에 25년상이 제정된 것이리라. 이번 수상작으로 결정한 “절두산순교기념관 (옛이름 복자기념성당)”은 이 건물 자체의 우수함보다는 60년대 사회상황이 요구한 건축적 대응이라는 역사적인 면에서 추천되었다. 또한 건축가 이희태의 재조명 작업을 통해 90년대 건축이 부딪히고 있는 문제에 답을 구하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제2회 공간25년상은 절두산순교기념관에 수여되는 동시에 건축가 이희태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2. 근대건축가 이희태

흔히 60년대는 김중업 김수근 두 거장의 활동무대로 인식된다. 일제기 총독부 기사출신들이 주류를 이룬 건축계에 프랑스와 일본에서 혜성같이 나타난 두 거장들의 한작품 한작품이 대표작이 되어버렸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건축계의 토픽이 되어버렸다. 이른바 국내파 건축가들은 젊은 나이에 역사의 전면에서 밀려나 버렸다. 국내파 건축가들은 사라져버린 것일까? 거장들의 화려한 무대의 뒷면에서 그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과연 그들의 건축과 행위는 망각되어도 좋을 만큼 무가치한 것들인가? 이희태에 대한 관심은 이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박길룡을 필두로한 선구적 건축가 그룹 대부분이 경성제대와 총독부 기사를 역임하고, 해방 이후 건축계의 주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희태는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그는 경성공립 직업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조선비행소의 기술자로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약관 20세의 청년 이희태는 진로를 모색하다가 이듬해 “이희태 건축사무소”를 설립하였다. 그의 사무소 개설은 중견인 김태식에 이어 해방이후 두번째의 일이다. 50년대의 양대 산맥이라 평가되는 종합건축연구소와 신건축문화연구소가 6.25 휴전 이후에 개설된 것과 비교해 보면, 그의 저돌성을 상상할 수 있다. 77년 엄덕문과 함께 엄이건축을 운영하기 전까지 30년동안 그는 누구 밑에도 있어본 적이 없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본 적도 없을 만큼 철저하게 독자적이고 비주류적인 건축인생을 살아나갔다.
그가 본격적인 건축가로서 개성을 드러낸 것은 55년 혜화동 성당을 통해서이다. 그 배후에는 장발과 김세중 등 당시 혈기왕성한 미술인들과의 교류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53년부터 8년간 서울미대에서 시간강사로 출강을 계속하였는데, 추측컨데, 초보적인 건축기술교육만을 받고 기술자로 출발한 그가 건축의 예술성과 사회성에 눈을 뜬 시기가 바로 이 때였을 것이다. 초기 작품들은 중동고교 본관, 동아제약 사옥, 메트로호텔 등에서 보여지는 모더니즘 계열과 명수대성당, 인천 송림동성당, 진해와 혜화동 성당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개성으로 대별된다. 특히 55년 세련된 기능주의의 메트로호텔과 기념성이 부각된 혜화동성당은 이희태 건축의 출발점으로 보여진다. 당시 대다수의 건축가들이 모더니즘과 국제주의 건축을 수용하고 소화하기에 급급하여 자신들의 개성을 개발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기존 성당의 형태개념을 거부한 혜화동 성당의 출현은 경이로운 일이다. 기념비적 크기의 계단 위에 설정된 추상적 매스, 그리고 전면 스크린의 조각으로 입면을 대체한 구상에서 그의 자생적인 독창성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일련의 모더니즘 계열 작품들에서는 건축기술자로서의 역량을 과시한다. 메트로호텔의 정제된 입면형태는 당대의 대표작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후 60년대까지 그의 작업은 모더니즘의 기술적 바탕 위에 자신의 개성적 형태언어를 결합하는 일에 몰두한다. 64년의 절두산순교기념관과 67년의 국립극장에서 이른바 한국적 전통의 형태를 선보였기 때문에, 이희태의 건축을 전통주의로 치부하기 쉽다. 그러나 그가 전통에 몰입하고 다소 복고주의적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의 일이다. 앞의 두 작품을 제외한 5,60년대의 대다수 작품들은 극히 기능주의적 형태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작업과 70년대의 작업은 명확히 구별해 평가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두산순교기념관에 대한 그릇된 평가를 야기할 것이다. 절두산순교기념관에 나타난 전통적 요소의 디테일들은 한국성 표현의 일반적 범주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며, 60년대 후반 건축계를 풍미한 전통계승론의 유행을 탄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천주교의 역사와 기념성의 해석, 그리고 싸이트의 충실한 해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다시말하면, 이 건물의 형태는 철저한 특수해의 결과일 뿐이다.
60년대는 앞서 말한 두 거장의 개별적인 성과가 주목을 받은 반면, 그들과 같이 화려하게 각광은 받지 않았으나 양적인 면에서는 훨씬 활발했던 국내파들의 노력으로 구성된다. 특히 59년대 결성된 종합건축과 신건축문화연구소 멤버들의 개별적 활동이 건축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어떤한 의미에서 두 거장은 비주류였으며 견제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구도에서 이희태는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그의 성향은 국내파였으나, 학연과 인간관계 등의 이유로 주류에 동참하지는 못하였다. 60년대 군사정권의 개발주도 상황에서도 굵직한 대형 프로젝트들은 주류 건축가와 두 거장들의 차지였으며, 이희태는 자신의 건축주를 주로 천주교 계통과 몇 사립대학재단에서 찾아야 했다. 60년대 작품들의 독창성과 성실함은 이처럼 어려운 외부적 환경의 소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70년대의 작품들은 60년대의 관심사들이 고착화된 양상을 보인다. 특히 그의 이름을 널리 퍼뜨렸던 국립경주박물관과 공주박물관 부산시립박물관들은 엄덕문에 협력한 세종문화회관과 함께, 한국성 추구의 대표적인 건축들로 부각되었다. 60년대의 국립극장이 그의 많은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면, 70년대에는 매우 강력하고 유일한 방법론으로 선택된 것이다. 물론 힐사이드 아파트나 부산 럭키연암회관에서 보여지는 것 같이 모더니즘의 방법론을 전적으로 폐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유신시대와 맞물려 있는 이 시기 대표작들은 민족주의적 복고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띨 수 밖에 없었다.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 한국적 문화, 한국적 충효사상,…등의 국수주의적 태도를 취했고, 국가 주도의 건축들은 현상설계 조건으로 “전통 계승…”의 요건을 명문화하였다. 이 시기 이희태의 대표작들은 60년대 자생적인 노력과는 달리, 관변적 성격의 형태와 표현에 치중되었다. 대칭적 구성과 반복되는 열주들, 무표정한 요소들의 조합은 권위적이며 위압적인 정권의 성격을 소위 한국성 안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작가 자신의 내부적 욕구라기 보다는 관변적 생존전략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건축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희태는 작고하는 순간까지 비주류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태생적 한계와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 때문에, 가장 비건축적으로 구조화된 당시 건축계에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죽음과 뒤이은 두 거장들의 죽음이 이미 과거의 사실로 묻혀진 지금에 있어서도 건축가 이희태의 재능과 작품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려는 그의 개별적 노력들이 단지 그가 비주류였다는 사실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으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그가 한국 건축계에 남겨준 것은 무엇인가. 그의 유산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는 한권의 책도 남기지 못했고, 걸출한 후계자도 길러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평가들은 주류적 역사의 평가일 뿐이다. 한국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혼란한 건축계의 풍토 속에서,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노력하면서도 결코 유행에 휩쓸리기 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살려나갔던, 그러나 세속적 성공보다는 좌절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개인 이희태. 개인의 삶에서 사회의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전형을 발견한다. 건축가 이희태의 개인사는 철저하게 한국현대사였으며, 이희태의 노력과 좌절은 현대건축사의 문제와 질곡이었다. 모더니즘의 수입과 국제주의의 이식, 그리고 소위 한국적 전통의 복고와 변용. 이러한 한국현대건축의 내적인 변화에 가장 민감한 노력을 보인 이가 바로 이희태였다. 그는 해외의 스승에게서 깨달음 받은 것도 아니고, 시대적 경향에 편승한 것도 아니었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 시대의 요구를 건축에 담으려 노력하였을 뿐이다.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도 완벽은 아니지만, 결코 범상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그의 건축적 경향은 정치적 의도로 읽혀졌고, 그의 독단적 노력은 주류건축계의 무시와 제어 속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좌절 속에는 정권과 결탁하여 경제적 과실을 향유하였던 건축계의 풍토와, 학력 인맥 위주로 결정되었던 제도적 건축계의 문제들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3. 작품 절두산순교기념관

이 성당이 서있는 한강변의 절벽은 원래 양화진이었다. 바다에서 서울로 들어가려면 강화를 거쳐 한강을 따라 접근해야 하며, 양화진은 가장 중요한 서울의 관문이었다. 1866년 대원군은 급속히 확산되는 외세를 제어하기 위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수천의 신도들을 잡아들여 바로 이곳에서 참수했다. 그래서 절두산이 되었고, 탄압 100주년을 기념하여 절두산순교기념관을 건축하였다. 서구의 개방 압력에 대항하여 쇄국과 수구의 자세를 견고히 했던, 그래서 서양과 한국 전통의 세계관이 충돌했던 그 역사적 사건의 자리에, 하필 이희태의 작품이 설계된 것은 아이러니칼한 역사적 인연이다. 100년전의 대결구도와는 반대로, 1960년대 근대화 서구화의 물결 속에 과거를 회상케하는 한국적인 조형이 추구된 것이다.
작가가 이러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문화충돌의 근저를 꿰뚫을 만큼 높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혜화동성당 등에서 보여준 모더니즘적 천주교건축의 경향과는 매우 상반된 개념이 깔려있고, 당시로서는 매우 실험적인 이 작품이 발상되게된 동기는 아무래도 절두산 싸이트의 특수함과 기념성당의 기능 해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마치 반도와 같이 3면이 강변에 돌출되게 솟아오른 이 곳은 예전의 지리관으로 보면, 누대와 정자로 최상의 위치이다. 밀양의 영남루를 한국 최고의 누각이라 평가한다면, 그것은 영남루 건물 자체보다는, 몸채와 3개의 부속채가 이루는 집합적 모습, 그리고 건축의 집합이 지형과 어우러지는 더 큰 집합체를 이룸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절두산순교기념관의 뛰어남은 절두산이라는 지형과 두개의 건물군이 집합된 전체적 전경에서 찾아질 것이다. 모더니즘을 교의로 삼는 이들은 “절두산순교기념관의 두 매스가 서로 관입하지 못하고, 매우 애매한 상태로 접합되어 있으며, 그 사이의 종탑은 억지에 가까우며, 내부에도 공간이라할 만한 것이없다. 그래서 전근대적인 건축이다”라고 비판한다. 이 건축은 근본적으로 “축복받은 대지의 조건 때문에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지 알맹이는 보잘 것 없다”고 절하한다. 그러나 다른 각도로 본다면, 당시의 다른 모더니스트들이 이러한 싸이트에 이러한 집합적 건축을 이룰 수 있었을까? 오히려 철저한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한 이희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을 것이다. 주어진 대지의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고 더욱 좋은 장소로 만드는 것이 건축의 출발이라면, 이만큼 근본에 충실한 건축이 또 어디에 있는가. 또한 이 장소가 비단 한많은 사연의 건축주측의 역사 뿐 아니라 서구와 한국, 개화와 수구라는 비극적 대립의 우리 근대사가 상징화된 장소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희태의 공예적인 전근대적인 건축은 진정한 기념성을 구현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작가의 기능에 대한 해석의 결과였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작가 자신이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가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현재의 평가이다. 현재는 WTO체제의 출범을 목전에 두면서, 무한경쟁의 국제사회, 심지어는 제2의 개화기라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한세기 전의 과거와 같이 네가티브 섬의 도박을 할 수는 없다. 개방에 대한 대응은 다각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작업은 25년전 우리의 선배들이 모더니즘을 수입하면서 고뇌했던 시도들을 현재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가능성을 읽어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절두산순교기념관은 완성작이라기 보다는 문제작이다. 과거에 어떠한 완성도를 보여주었느냐 보다는, 그것이 현재에 어떠한 문제를 던져주느냐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공간구성면에서 이 작품의 한계들은 여러차례 지적되어 왔다. 기념성당과 전시관의 두 매스가 서로 하나의 꼭지점에서 접합되며,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조각적인 종탑이 부가되었다. 전시관 내부의 톱라이트는 산란된 빛을 끌어들임으로써 오히려 어수선한 내부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기념성당 내부의 구성은 너무도 작위적이다. 중앙 톱라이트를 감싸는 원통 루버와 돌출된 리브들은 존재의 필연성이 약하다. 내부공간의 한계들은 근본적으로 외부에서 추구된 형태적 노력의 결과이다. 다시말하면, 작가의 주된 관심은 내부보다는 외부에, 공간보다는 형태에 기울어 있었다. 절벽 위에 성당과 전시관의 두 분리된 매스를 올려야 했고, 그 사이를 효과적으로 결합하여야 했다. 수직적인 종탑은 원경에서 보이는 형태적 필요에 의해 설정될 수 밖에 없었다. 성당 내부의 어색함 역시 2중 원형지붕의 결과이다. 작가가 이러한 형태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작가의 한계인가, 아니면 이 프로젝트의 특수해인가? 두 측면 모두에서 원인을 찾을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건축가들과 마찬가지로 이희태는 본질적인 모더니즘 건축에 접근하지 못했다. 그에게 이해된 모더니즘 건축은 형태와 재료와 기술 뿐이었다. 본격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가 독학만으로 더 깊게 숨겨진 핵심, “공간”의 문제를 인식하기는 불가능하였다. 공간의 문제를 주제로 떠올린 것은 김중업과 김수근의 몫이었다. 이희태의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들에도 “공간”은 없다. 이 자생적 건축가가 자신의 언어를 표현할 수 있는 창구는 오로지 형태뿐이었다. 절두산순교기념관은 여러 각도에서의 형태적 조합이다. 원경에서의 매스구성과 근경에서의 건축요소들의 표현. 이 두가지가 이 작품의 주제이다. 지형과 어울어진 예의 매스 구성 뿐 아니라, 초가집의 가냘픈 구조를 연상시키는 건축요소들은 한국성 추구라는 통상적 목적 보다는 작가의 형태주의적 노력의 결과로 보여진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앞서 말한 이 장소와 프로젝트의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이다. 개화와 수구, 서구 천주교문화와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갈등을 표현하는 결과물로서 형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의 70년대 박물관들의 조형과 근본적인 차이를 이루는 대목이다. 절두산의 형태와 요소는 특수한 과제의 해결이지만, 박물관들은 상업적인 매너리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기의 것이지만 오히려 진부한 박물관들 보다, 절두산의 형태와 요소들은 매우 건강하고 간결하다.
순수 모더니즘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절두산순교기념관은 근대 직전의 건축이며, 이희태 역시 완벽한 모더니스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건축이 모더니즘만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가까운 과거는 모든 가치있는 노력들을 소중하게 다루며 재평가할 수 밖에 없을 만큼의 역사의 층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건축가 이희태의 시도와 좌절, 그 가운데서 피어난 아쉬운 성취들은 아직도 현재의 건축에 질문을 던진다. 제2의 개화기를 맞고 있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간 25년상 심사의 말

1) 25년상의 의의 : 직전의 역사를 정리 / 현재의 문제를 풀기 위한 과거의 재평가와 재해석

2) 이번 25년상은 돌아가신 이희태 선생의 <절두산 순교 기념관>
-자세한 내용은 10월호 공간지에 실린 <좌절과 성취>라는 제글에 있음.
-이번 상은 <절두산순교기념관>이라는 작품에 주어졌다기 보다는 이희태라는 건축가에게 주어진 것. 왜냐하면 이 수상을 전기로 하여, 잊혀져가는 건축가 이희태를 재평가하고 그의 좌절과 성취를 재해석해 보려는 것.
-개인은 역사의 산물 /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통하여 역사를 거꾸로 추적할 수도 있음. /
이희태의 개인사와 그의 작품을 통하여 한국근현대건축사와 건축의 고민과 성과를 정리해 보려는 것.

3)
-21세의 약관으로 해방 후 두번째 개인설계사무소를 개설./ 태생적 한계와 원만치 못한 대인관계로 항상 비주류의 조건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음. /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시대의 요구를 감지하고 대응하려는 노력 /
-50년대 자발적인 모더니즘의 수용과 혜화동 성당 등에 나타난 강렬한 개성
-60년대 절두산성당으로 대표되는 자생적인 한국적 표현에 관한 노력
-70년대 정치상황과 결부된 매너리즘

4) 건축
-사이트에 대한 탁월한 해석 / 한국적 전통인 집합성의 추구 / 건물과 건물이, 그리고 건물과 지형을 집합화하려는 노력 /
-절두산의 역사적 의미 / 밀려오는 개화의 상황 속에서 수구의 몸부림과 순교 / 모더니즘 속의 한국성 / 제2의 개항기를 맞이한 현재의 물음
-어휘의 독자성 / 현대건축의 개성과 독자적 세계를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