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의 본고장인 경북 안동에는 수 십 개의 종가들이 있다. 종가가 되려면 3가지 조건을 만족해야한다. 영구히 제사 지낼 불천위 조상과 그럴싸한 종택 건물, 그리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할 종손이 있어야한다. 종손들은 교육과 사회활동을 위해 객지에 나가더라도, 나이가 들어 종손 역할을 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낙향하여 종가를 지키는 것을 숙명으로 삼고 있다. 하회마을의 풍산류씨 서애파 종손과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대종손도 그러한 숙명에 순응하고 있다. 그들 역시 서울 등지로 유학해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잘나가는 직장을 얻어 국제적인 활동도 했지만, 돌아가신 선친의 대를 이어 현재의 종가를 지키고 있다.
두 집안은 특별한 인연, 악연이 있다. 퇴계 이황은 두 명의 수제자를 두었는데, 바로 의성김씨인 학봉 김성일과 풍산류씨인 서애 류성룡이다. 퇴계-서애-학봉은 퇴계학파의 중심이며, 퇴계학파의 중심 서원인 호계서원을 세울 때 3명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스승인 퇴계의 위패는 당연히 사당의 중앙에 놓았으나, 그 다음 순서인 좌측에 누구의 위폐를 모실 것인가로 두 가문은 격렬히 충돌했다. 나이는 학봉이 4살 많지만, 관직은 학봉이 관찰사에 그쳤고 서애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당연히 서애파는 관직을 기준으로 우위를 주장했고, 학봉파는 나이를 우선했다. 당대 유림계가 서애 우위를 판정했으나, 학봉파가 반발하자 급기야 위패를 병산서원으로 옮겨오고, 학봉은 호계서원에 남게 되었다. 17세기의 이 사단은 20세기까지 해결되지 않아 이를 <병호시비>라 불렀다. 300여 년 동안 양측은 사사건건 대립했고 서로의 통혼도 금지할 정도였다.
우연히 두 종손을 같이 만날 기회가 생겼다. 두 사람은 동향의 선후배로 매우 친하고, 종손의 어려움을 같이 나누는 동병상련의 사이다. 그들의 대화는 여러 면에서 특이했다. 병파와 호파, 청계공과 학봉할배 등의 용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서애할배의 바둑 실력이나 학봉 형제의 됨됨이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한다. 300년 전의 일화를 현재와 같이 말을 나누는 둘은 17세기 사람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그러나 병호시비를 한낮 교조적인 논쟁으로 치부하고, 종택 관리의 어려움을 공유하며, 앞으로 벌일 서로의 사업을 논의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현대인이다. 두 종손은 시내에 나가 한잔 더 하자며 또 다른 종손을 호출했다. 3사람, 종손들의 대화는 더욱 시공을 초월할 것이다. 한 시간 가까이 경험한 종손들의 세계는 일종의 타임 슬랩이었고, 그들의 인품은 다른 차원의 품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