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 -마을과 가문의 중심
‘종가(宗家)’는 “종손이 사는 집”이다. 설혹 종손이 타향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종가(집)은 움직이지 않고 한 장소에 서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그 당당한 풍모를 드러내며 말없이 한 집안을, 한 마을을 이끌어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어떤 면에서 한 가문의 중심은 종손이 아니라 건축물인 종가일 수도 있다.
종가집의 역사는 종손의 역사와는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보편적인 재산상속제도는 ‘남녀균분상속제’라 하여, 장차남은 물론 결혼한 딸도 차별없이 똑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받았다. 이런 제도 속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를 드는 일이 흔하게 된다.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장손으로서 재산상의 특혜도 없고, 그들의 아들 역시 다른 지방으로 장가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고정된 종가집은 존재하기 어려웠다.
현존하는 종가집들이 지어진 시기는 빨라야 16세기이며, 대부분은 조선중기인 17세기 이후이다. 이때부터는 ‘시집’간 딸은 아예 재산분배 몫이 없고, 장남은 차남의 몇 배에 달하는 재산을 물려받는 차등상속제가 시행되었다. 이제는 신부가 시집을 오게 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이 한 집안에서 살게 되는 가부장제가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최초의 종가집들은 마을의 가장 깊고 뒷산의 맥이 흐르는, 풍수지리적인 명당혈에 자리 잡는다. 세대가 지나 자손들이 결혼하면, 종손은 종가집에 대를 이어 살게 되지만, 차남 이하는 같은 마을에 집을 짓고 살림을 따로 나가게 된다. 분가를 하더라도 종가집 뒤쪽에 새집을 만들 수는 없다. 뒷산이 시작될뿐더러 종가 뒤에 집을 짓게되면 가문의 위계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남은 종가 바로 앞에 분가하고, 또 삼남은 그 앞에, 차남의 차손은 또 그 앞에…. 하는 순서로 집들이 들어서게 된다.
조선조 오대 현인의 한분인 정여창을 배출한 함양의 지곡마을은 종가에 이르는 길고 운치있는 고샅으로 유명하다. 종가인 정여창 고택에 가려면 마을을 관통하는 개울길을 따라 깊숙이 올라가고 다시 마을 안으로 뻗은 골목길을 몇 번 꺾여야만 종가의 대문에 다다를 수 있다. 종가까지 가는 길은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듯, 정씨 가문의 위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꼴이 된다.
봉제사를 위해 비어있는 공간들
종손의 임무는 선조들의 위패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고,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이다. 대를 잇는 목적 역시 제사를 받들기 위함이다. 가문은 제사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고, 종손의 권위는 제사시에 한껏 빛난다.
종가에는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시설이 있으니 바로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사당이 놓이는 위치도 집안에서 가장 좋은 명당, 지맥이 흐르는 혈점에 잡는다. 사당에서 바라보는 경관도 가장 좋은 곳이다. 돌아가신 조상들이 편안해야 후손들도 잘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당은 비단 제사 때만 이용되지 않는다. 종손은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가서 안부를 고하고, 외출할 때나 돌아올 때 사당에 역시 고해야 한다. 가문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어도 사당에 올라 조상들께 고한다. 종가에 있는 사당을 가묘(家廟)라 하는데, 이쯤 되면 가묘는 종가집의 중심이며, 돌아가신 조상들은 산사람 이상으로 후손들을 보호하고 간섭하게 된다.
경주의 양동마을에는 월성손씨와 여주이씨의 두 명문가문들이 섞여 살아왔다. 두 가문의 종가는 서백당(손씨종가)과 무첨당(이씨종가)인데, 두 집 모두 가장 중요한 중심에 가묘를 두고 있다. 서백당의 가묘는 사랑마당 뒤쪽에 자리잡아 대문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은밀하게 마련된 길을 따라가다보면 문득 사당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첨당의 가묘는 집 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세워져 있다. 후손들이 사는 살림채는 그 아래에 납작하게 지어졌고.
종가에는 사당 말고도 중요한 제사용 공간이 있으니, 정침(正寢)이라 부르는 안채의 넓은 대청마루다. 보통 집의 대청은 가사 작업을 위해 마련된 여유 공간으로 집의 전체 규모에 비례하여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종가의 안대청은 제사 때 모이는 친족들의 수에 따라 크기가 정해진다. 경주 양동마을의 관가정의 경우, 연면적은 40여평에 불과하지만, 6칸의 안대청은 10평에 달한다. 이집의 5개 온돌방을 모두 합한 면적 정도로 크다. 제사 때 모이는 50여명의 후손들이 한 자리에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가의 대청은 늘 비어있다. 가구를 놓거나 가사작업을 하여 공간을 차지하게 되면 제사 때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두번 쓸 제사를 위해 이 넓은 공간을 비워두는 게 낭비라고 할지 모르지만, 종가의 생활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다. 충청도의 모 종가의 경우, 한해 19번의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이 정도의 명문가면 보통 한대에 부인을 2-3명 두기 때문에, 4대조 내외분의 제사가 12번, 불천위라 하여 영원히 제사를 지내야할 위대한 선조의 제사가 2번, 봄가을의 시제와 명절 차례 등 합하면 19번으로 거의 보름에 한번 제사를 모신다니, 종가의 제사란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살림인 셈이다.
넓은 사당 앞의 마당과 큰 안대청은 종가의 건축적 특징을 결정한다. 종가에는 이처럼 비워져 있는 공간이 많기 때문에 추상적인 공간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게 된다. 기능으로 꽉 차있는 현대주택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적 아름다움이다. 비워져 있어야 채울 수 있듯이, 비워져 있는 종가의 공간에는 역설적으로 풍요가 가득하다. 안대청에 떨어져는 서까래의 그림자, 양지바른 사당 마당 앞의 따사로운 햇살, 제사용 물품들을 보관하는 많은 고간들의 든든함…….등이 종가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접빈객의 다양한 시설들
종손은 따로 직업이 없다. 제사를 모시기에도 바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상의하고, 가문 내의 갈등을 조정하고, 종중의 큰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집안의 어른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종손의 항렬은 가문에서 가장 높지만, 보통 나이는 어리게 된다. 할아버지 뻘의 손자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엄격한 규범에 따라 일족을 대해야하고, 동시에 나이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아야 한다.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가져야지만 종손의 위엄을 세울 수 있다. ‘종손’이라는 직업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다양하다. 한 가문을 대표하여 다른 가문이나 지방 행정관과 유지들을 접객해야 하는 임무도 만만찮다. 특히 먼 지방에서 찾아온 내왕객들을 위해서는 며칠 간의 숙식을 제공해야하는 수고도 마다할 수 없다. 이를 수고라고 하면 짜증날 일이기에 접객을 즐거움으로 삼기 위한 다양한 시설들이 필요하게 된다.
사랑채는 남자들의 공간으로 보통 아버지와 결혼한 아들이 거주한다. 종가 정도의 규모면 아버지를 위한 큰사랑채와 아들을 위한 작은사랑채, 2채를 갖는다. 형편이 어렵다면 하나의 사랑채 안에 큰사랑방과 작은사랑방을 두기도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각각 별도의 마루를 두어야 한다. 찾아오는 손님들의 세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집안의 손님들은 사랑방이나 사랑마루에서 접객한다.
며칠씩 묵어가는 손님들을 위해서 사랑채 앞에 행랑채를 마련한다. 객행랑의 규모는 바로 이 집안의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름하는 척도다. 강릉의 저택인 선교장의 경우, 20여칸의 객행랑을 두어 전국에서 모여든 20여명의 식객들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 집은 아예 열화당이라는 접객용 사랑채를 별도로 두기도 했다. 주인과 손님 사이의 교류 뿐 아니라, 손님들 간의 교류도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종가의 사랑채는 늘 외부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손님들에 시달리지 않고 홀로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게 된다. 보통 종가에서는 사랑채 뒤편에 딸린 책방이 그런 역할을 한다. 책방은 사랑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이중의 차단 장치가 되어있고, 책방 뒤에는 약초를 키우는 작은 마당이 만들어진다. 종손만을 위한 개인용 마당인 셈이다. 여기서 책도 읽고 약초밭도 거닐며 안정을 취하는 것이다.
책방을 아예 옮겨서 별당채를 만들기도 한다. 연못을 파고 그 한편에 정자와 같이 아름답고 작은 건물을 지어 은밀한 장소를 만든다. ‘별당마님’이라는 호칭 때문에 별당을 아가씨들의 공간으로 여기지만, 실재로는 주로 남자주인들의 휴식처였다. 물론 극히 친한 손님들을 초청해 주연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대구 달성의 삼가헌에는 정말 아름다운 별당이 있다. 연꽃이 피어있는 넓은 연못과 한그루 잘생긴 소나무가 휘어져있는 섬이 만들어졌다. 그 앞으로는 마을과 들판의 전원풍경이, 그리고 멀리 안산의 아름다운 곡선이 별당 안으로 들어온다. 먼 곳에서 찾아 온 귀한 손님과 함께 별당 누마루에 올라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소박한 술상에는 정갈한 안주거리가 마련되고, 서로 술잔을 기울이면서 인생의 아픔을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정취. 이것이 바로 접빈객의 즐거움이요, 종가의 아름다움이다. 종가 -마을과 가문의 중심
‘종가(宗家)’는 “종손이 사는 집”이다. 설혹 종손이 타향으로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종가(집)은 움직이지 않고 한 장소에 서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그 당당한 풍모를 드러내며 말없이 한 집안을, 한 마을을 이끌어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어떤 면에서 한 가문의 중심은 종손이 아니라 건축물인 종가일 수도 있다.
종가집의 역사는 종손의 역사와는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보편적인 재산상속제도는 ‘남녀균분상속제’라 하여, 장차남은 물론 결혼한 딸도 차별없이 똑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받았다. 이런 제도 속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를 드는 일이 흔하게 된다.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장손으로서 재산상의 특혜도 없고, 그들의 아들 역시 다른 지방으로 장가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고정된 종가집은 존재하기 어려웠다.
현존하는 종가집들이 지어진 시기는 빨라야 16세기이며, 대부분은 조선중기인 17세기 이후이다. 이때부터는 ‘시집’간 딸은 아예 재산분배 몫이 없고, 장남은 차남의 몇 배에 달하는 재산을 물려받는 차등상속제가 시행되었다. 이제는 신부가 시집을 오게 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이 한 집안에서 살게 되는 가부장제가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최초의 종가집들은 마을의 가장 깊고 뒷산의 맥이 흐르는, 풍수지리적인 명당혈에 자리 잡는다. 세대가 지나 자손들이 결혼하면, 종손은 종가집에 대를 이어 살게 되지만, 차남 이하는 같은 마을에 집을 짓고 살림을 따로 나가게 된다. 분가를 하더라도 종가집 뒤쪽에 새집을 만들 수는 없다. 뒷산이 시작될뿐더러 종가 뒤에 집을 짓게되면 가문의 위계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남은 종가 바로 앞에 분가하고, 또 삼남은 그 앞에, 차남의 차손은 또 그 앞에…. 하는 순서로 집들이 들어서게 된다.
조선조 오대 현인의 한분인 정여창을 배출한 함양의 지곡마을은 종가에 이르는 길고 운치있는 고샅으로 유명하다. 종가인 정여창 고택에 가려면 마을을 관통하는 개울길을 따라 깊숙이 올라가고 다시 마을 안으로 뻗은 골목길을 몇 번 꺾여야만 종가의 대문에 다다를 수 있다. 종가까지 가는 길은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듯, 정씨 가문의 위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꼴이 된다.
봉제사를 위해 비어있는 공간들
종손의 임무는 선조들의 위패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고,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이다. 대를 잇는 목적 역시 제사를 받들기 위함이다. 가문은 제사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고, 종손의 권위는 제사시에 한껏 빛난다.
종가에는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시설이 있으니 바로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사당이 놓이는 위치도 집안에서 가장 좋은 명당, 지맥이 흐르는 혈점에 잡는다. 사당에서 바라보는 경관도 가장 좋은 곳이다. 돌아가신 조상들이 편안해야 후손들도 잘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사당은 비단 제사 때만 이용되지 않는다. 종손은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가서 안부를 고하고, 외출할 때나 돌아올 때 사당에 역시 고해야 한다. 가문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어도 사당에 올라 조상들께 고한다. 종가에 있는 사당을 가묘(家廟)라 하는데, 이쯤 되면 가묘는 종가집의 중심이며, 돌아가신 조상들은 산사람 이상으로 후손들을 보호하고 간섭하게 된다.
경주의 양동마을에는 월성손씨와 여주이씨의 두 명문가문들이 섞여 살아왔다. 두 가문의 종가는 서백당(손씨종가)과 무첨당(이씨종가)인데, 두 집 모두 가장 중요한 중심에 가묘를 두고 있다. 서백당의 가묘는 사랑마당 뒤쪽에 자리잡아 대문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은밀하게 마련된 길을 따라가다보면 문득 사당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첨당의 가묘는 집 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세워져 있다. 후손들이 사는 살림채는 그 아래에 납작하게 지어졌고.
종가에는 사당 말고도 중요한 제사용 공간이 있으니, 정침(正寢)이라 부르는 안채의 넓은 대청마루다. 보통 집의 대청은 가사 작업을 위해 마련된 여유 공간으로 집의 전체 규모에 비례하여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종가의 안대청은 제사 때 모이는 친족들의 수에 따라 크기가 정해진다. 경주 양동마을의 관가정의 경우, 연면적은 40여평에 불과하지만, 6칸의 안대청은 10평에 달한다. 이집의 5개 온돌방을 모두 합한 면적 정도로 크다. 제사 때 모이는 50여명의 후손들이 한 자리에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가의 대청은 늘 비어있다. 가구를 놓거나 가사작업을 하여 공간을 차지하게 되면 제사 때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두번 쓸 제사를 위해 이 넓은 공간을 비워두는 게 낭비라고 할지 모르지만, 종가의 생활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다. 충청도의 모 종가의 경우, 한해 19번의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이 정도의 명문가면 보통 한대에 부인을 2-3명 두기 때문에, 4대조 내외분의 제사가 12번, 불천위라 하여 영원히 제사를 지내야할 위대한 선조의 제사가 2번, 봄가을의 시제와 명절 차례 등 합하면 19번으로 거의 보름에 한번 제사를 모신다니, 종가의 제사란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살림인 셈이다.
넓은 사당 앞의 마당과 큰 안대청은 종가의 건축적 특징을 결정한다. 종가에는 이처럼 비워져 있는 공간이 많기 때문에 추상적인 공간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게 된다. 기능으로 꽉 차있는 현대주택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적 아름다움이다. 비워져 있어야 채울 수 있듯이, 비워져 있는 종가의 공간에는 역설적으로 풍요가 가득하다. 안대청에 떨어져는 서까래의 그림자, 양지바른 사당 마당 앞의 따사로운 햇살, 제사용 물품들을 보관하는 많은 고간들의 든든함…….등이 종가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접빈객의 다양한 시설들
종손은 따로 직업이 없다. 제사를 모시기에도 바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상의하고, 가문 내의 갈등을 조정하고, 종중의 큰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집안의 어른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종손의 항렬은 가문에서 가장 높지만, 보통 나이는 어리게 된다. 할아버지 뻘의 손자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엄격한 규범에 따라 일족을 대해야하고, 동시에 나이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아야 한다.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가져야지만 종손의 위엄을 세울 수 있다. ‘종손’이라는 직업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다양하다. 한 가문을 대표하여 다른 가문이나 지방 행정관과 유지들을 접객해야 하는 임무도 만만찮다. 특히 먼 지방에서 찾아온 내왕객들을 위해서는 며칠 간의 숙식을 제공해야하는 수고도 마다할 수 없다. 이를 수고라고 하면 짜증날 일이기에 접객을 즐거움으로 삼기 위한 다양한 시설들이 필요하게 된다.
사랑채는 남자들의 공간으로 보통 아버지와 결혼한 아들이 거주한다. 종가 정도의 규모면 아버지를 위한 큰사랑채와 아들을 위한 작은사랑채, 2채를 갖는다. 형편이 어렵다면 하나의 사랑채 안에 큰사랑방과 작은사랑방을 두기도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각각 별도의 마루를 두어야 한다. 찾아오는 손님들의 세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집안의 손님들은 사랑방이나 사랑마루에서 접객한다.
며칠씩 묵어가는 손님들을 위해서 사랑채 앞에 행랑채를 마련한다. 객행랑의 규모는 바로 이 집안의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름하는 척도다. 강릉의 저택인 선교장의 경우, 20여칸의 객행랑을 두어 전국에서 모여든 20여명의 식객들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 집은 아예 열화당이라는 접객용 사랑채를 별도로 두기도 했다. 주인과 손님 사이의 교류 뿐 아니라, 손님들 간의 교류도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종가의 사랑채는 늘 외부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손님들에 시달리지 않고 홀로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게 된다. 보통 종가에서는 사랑채 뒤편에 딸린 책방이 그런 역할을 한다. 책방은 사랑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이중의 차단 장치가 되어있고, 책방 뒤에는 약초를 키우는 작은 마당이 만들어진다. 종손만을 위한 개인용 마당인 셈이다. 여기서 책도 읽고 약초밭도 거닐며 안정을 취하는 것이다.
책방을 아예 옮겨서 별당채를 만들기도 한다. 연못을 파고 그 한편에 정자와 같이 아름답고 작은 건물을 지어 은밀한 장소를 만든다. ‘별당마님’이라는 호칭 때문에 별당을 아가씨들의 공간으로 여기지만, 실재로는 주로 남자주인들의 휴식처였다. 물론 극히 친한 손님들을 초청해 주연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대구 달성의 삼가헌에는 정말 아름다운 별당이 있다. 연꽃이 피어있는 넓은 연못과 한그루 잘생긴 소나무가 휘어져있는 섬이 만들어졌다. 그 앞으로는 마을과 들판의 전원풍경이, 그리고 멀리 안산의 아름다운 곡선이 별당 안으로 들어온다. 먼 곳에서 찾아 온 귀한 손님과 함께 별당 누마루에 올라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소박한 술상에는 정갈한 안주거리가 마련되고, 서로 술잔을 기울이면서 인생의 아픔을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정취. 이것이 바로 접빈객의 즐거움이요, 종가의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