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0.07.01.
출처
RAILROAD
분류
건축역사

이름난 정자에서 술을 마시니 푸르름이 새롭고
꾀꼬리 노래소리 가운데 소먹이는 목동을 보네
해 저물고 술깨어 보니 향그런 풀속에 소 꿈꾸는 듯
산남쪽엔 오랫도록 언덕 서편의 봄이 와 있네
(윤병성, 방초정 주인을 위한 시)

이 시는 경북 김천지방에 있는 방초정이라는 시골 정자의 주인을 위해 지어준 것이다. 조선시대 한 선비가 정자 주인과 술 한잔하며 주변의 풍경을 마음 속에 담아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 정자 앞에는 큰 연못을 파고 멋진 나무를 심어 정원을 꾸몄으며, 동네 한켠에 자리를 잡아 멀리 들판에서 농사짓는 풍경을 바라보는, 매우 목가적인 경치를 즐기기 위한 곳이다. 이처럼 정자는 개인의 휴식과 낭만을 위해 지어진 건물들이다. 누각이 지방자치체의 공공적인 휴식처였다면, 정자는 개인이 짓고 개인이 이용했던 작은 건물이다. 그러나 담겨져 있는 뜻은 작지는 않다. 다른 시도 있다.

새로 지은 작은 정자 살구나무 아래서
그윽히 스며오는 흥을 억제할 수 없구나
술병을 차고오는 글친구가 있어
자리를 다툴 때 들판의 촌로들도 찾아든다
(임대정 늙은 매화에 기대어)

이 시를 적은 판액은 전남 화순의 임대정에 걸려있다. 비록 개인이 자신을 위해 지은 정자이지만, 벗이 찾아오고, 농사를 마친 동네 할아버지들이 찾아온다. 신분의 차이나 연령의 다소간 차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흥건한 술판이 벌어지고 시 한수가 읊어져 나옴직한 풍경이다. 이처럼 정자는 여러 사람들이 서로 이용하는 공공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정자(亭子)라는 글자는 ‘높게(高) 세운 집(丁)’이라는 의미이며, ‘자’자는 ‘의자’, ‘탁자’와 같이 작은 물건에 붙이는 축소형 끝말이다. 또 옛 서적에는 ‘정(亭)이란 정(停)으로서 사람이 잠시 머물러 쉬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정자란 특별나게 생긴 건물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무르기만 하면 되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현대의 버스 정류소나 지하철 역의 벤치도 일종의 정자라고 할 수 있다. 단 예전의 정자가 가졌던 풍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한 차이가 있다.
옛 선비들의 일상은 매우 엄격한 수련의 연속이었다. 항상 옷가짐을 바로하고, 말투는 점잖아야 했으며, 행동거지 역시 진중해야 했다. 따라서 선비들이 살았던 양반주택이나, 공부했던 서원 등의 일상적 건축물들은 엄격한 규범에 따라 빈틈없이 지어졌다. 건물이 사람을 만든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들도 인간인 이상,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 이완의 장소로 최적인 곳이 바로 정자였다.
그들의 휴식은 늘상 자연을 벗삼아 일어난다. 따라서 경치가 좋은 강변이나 산중턱,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종종 정자가 세워졌다. 동네 안에 세울 필요가 있으면, 방초정과 같이 인공적인 정원을 만들고 그 정원을 가장 잘 즐길수 있는 곳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크다고 해야 3칸을 넘지 않는 작은 건물이지만, 사방의 벽을 트고 대자연을 건물 내부로 담을 수 있도록 계획된, 규모의 건물이 아니라 뜻의 건물이었다. 옛 사람들이 정자를 지을 때는 가장 먼저 어떤 경치를 바라볼 것인가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경치를 잘 보기 위해서는 어디에 놓을 것인지, 어떤 방향을 잡을 것인지가 중요했다. 위치와 방향이 결정됐다면, 정자의 규모나 형태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자의 형태나 규모를 감상하는 것은 그릇된 정자 감상법이다. 정자의 작은 마루에 올라 앉아서 보여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고, 옛 사람들이 정자를 지은 뜻을 새겨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자의 형태는 다양하다. 일상적인 건물이 아니라, 일상에서 해방된 건물이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정자건물들을 보려면 창덕궁의 후원에 가보면 된다. 흔히 ‘비원’이라 알려져 있는 조선왕실 최고의 이 정원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요소요소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가 없는 후원은 그냥 자연일 뿐, 정원이 아니다. 정원이란 자연을 인공적으로 가공한 곳이며, 후원의 경우, 그 인공을 표상하는 것이 정자건물이기 때문이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부용정은 아(亞)자형으로 생긴 매우 복잡한 건물이며, 존덕정은 6각형의 2층 건물이다. 농숙정은 1칸의 작은 피라미드형이고, 청의정은 초가지붕을 얹은 가냘픈 건물이다. 심지어 관람정은 부채를 펼친 듯한 모양이다. 격식과 위엄을 갖추어야할 왕실의 건축으로는 예외적으로 자유롭고 파격적인 모습이다.
이처럼 고급스러운 정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라도 농촌에 가면 마을의 어귀나 들판 가장자리에 예외없이 정자가 서 있다. 이를 ‘초정’이라고 불러 일반적인 정자와는 구별한다. 전라도 들판에는 논이 많고, 모내기나 김매기 등의 논농사는 짧은 시간에 많은 마을사람들이 품앗이해야 하는 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논농사는 무더운 여름날에 해야한다. 품앗이가 끝난 마을사람들은 시원한 초정의 그늘에 올라 하루 피로를 달래며, 이런 저런 이야기와 술잔치로 공동체의 우의를 다지고 밤 느즈막히 헤어진다. 초정의 건물 형태는 후원의 정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급하다. 초가지붕이거나 슬레이트 지붕이기도 하고, 구조는 엉성하며, 화려한 장식은 물론 일절 없다. 심지어는 콘크리트나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조잡한 초정들도 부지기 수다. 그러나 효용면에서는 궁궐의 정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민중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요 건물이기 때문이다.
집안 은밀한 곳에 세워진 정자도 있다. 경북 경주시 옥산 골짜기에는 독락당이라는 살림집이 있다. 조선 중기 최고의 유학자인 ‘이언적’의 별장인 셈인데, 높은 관직에 있던 이언적은 정적들의 모함에 걸려 벼슬길에서 떨려난 후,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자의반 타의반의 은둔생활을 하게 됐다. 그 은둔의 장소로 독락당을 다시 꾸몄는데, 이 집은 개울가 골짜기에 자리 잡았고, 집 뒤편에 ‘계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이 정자의 위치가 절묘하다. 정자는 물론 안마당에서 출입하도록 만들었지만, 그 서 있는 위치는 집 바깥의 계곡 위이다. 다시 말해서, 계정은 살림집의 일부이기는 하되 자연에 속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안이면서 바깥이고, 인공이면서 자연인 셈이다.
집주인인 이언적은 세상사에 정이 떨어져 사회적인 교류는 멀리한 채, 오로지 자연을 벗삼아 은둔생활을 즐겼다. 집안에서 책을 보고 명상을 하다가, 계정에 올라 물 위에 드리운 나무들의 그림자를 감상하고, 그 물 위로 뛰노는 물고기들을 바라본다. 그러다 정자 아래로 내려와 주변의 산과 골짜기들을 소요하며 거닐다가 해질녘이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들고 잠을 잤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정자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요 입구가 된다. 이언적의 계정이나, 농투성이들의 초정이나, 임금님의 관람정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정자는 사람이 자연으로 들어가는 해방의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