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1.12.07.
분류
기타

드디어 2000년입니다. 21세기다, 새천년이다 대단한 기대와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다지 희망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책상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빛바랜 강연 원고를 발견했습니다. 1993년에 준비된 21세기 건축에 대한 전망이 내용이었는데, 가장 큰 전제는 2000년까지는 남북교류 혹은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세계사적 이벤트를 대비하려면 세계 건축계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건축적 역량을 길러야하고, 길러질 것이라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시대의 뚜껑을 여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요. 통일은 고사하고, 남북한 학술교류조차 불가능하며, 오로지 금강산 개발을 담보한 거대 자본만이 왕래할 뿐입니다. 세계 건축계에 떠오르기는 커녕, 건축시장 개방조치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 보면서 여전히 곁눈질 세계화와 집안 싸움에 열중입니다.
지난해는 처음 맞는 ‘건축문화의 해’였습니다. 야심찬 기획과 성대한 행사들, 그리고 희생적으로 참여한 몇몇 건축인들의 성과가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건축의 해를 빛낸 이들은 비리로 언론의 조명을 받은 건축계 어른들이었습니다. 년초에는 건축의 해 조직위원장께서 비리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더니, 년말에는 서울시내 유명대학의 건축과 교수들 명단이 무더기로 신문에 오르내렸습니다. 그 가운데는 신진 40대 교수들도 혜성같이 등장하여, 건축계의 연공서열을 파괴하는 부패의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바깥에서는 WTO다, UIA다 하는 신자유주의의 야수적인 파고가 밀려오는 가운데, 이것이 건축의 해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정녕 새시대는 오는 것이고, 희망은 있는 겁니까? 존경할 원로는 사라지고, 어떤 지도단체도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현실에서, 한세기 동안 왜곡되어 왔던 건축실무와 교육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하는 엄청난 과제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 새롭게 이상건축의 편집주간을 맡으면서 영광과 기대보다는 중압감이 앞섭니다.
창간 7년을 넘긴 이상건축은 그동안 많은 성과를 이루어 왔습니다. 부산에서 발간된 유일한 지방건축지라는 한계를 넘어서 유수한 전국적인 잡지로 성장하였고, 의미있는 기획과 행사들로 한국건축문화 발전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고 자평합니다. 무엇보다도, 시각적 자료집의 차원을 넘어서 읽고 생각할 만한 내용이 있는 지성지로서 성장한 것을 기뻐합니다. 전임 편집주간인 강혁 교수의 뛰어난 공로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후임이라는 포지션 때문에 제 자신의 능력과 열정이 불안합니다. 그렇지만 이 불안한 시대에, 중년에 들어 무엇하나 보탬이 되어야한다는 생각만으로 시작합니다.
2000년도에는 다방면에 걸친 잠재력과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특히 산산 조각난 건축계의 리더쉽을 점검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또한 세대간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원로들의 업적을 정리하는 동시에, 신진들을 발굴하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2000년 말에는 13번째 잡지로 ‘이론과 실천’을 탐색하는 이론지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틀에 밖힌 아카데미즘과 뿌리없는 저널리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 건축계에 심도있는 담론을 제공하려 합니다. 이 모든 시도는 궁극적으로 우리 건축계의 무너진 리더쉽을 복원하고, 사라진 정신적 가치를 재건하고, 혼미한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려는데 방향을 맞출 것입니다. 이상건축은 더욱 현실적인 동시에 이론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편집위원진의 개편과 판형의 변화 등은 이러한 변화를 위한 기초 작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포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동지적 관심과 참여 속에서만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새해, 새세기, 새천년에 문안 인사를 올리면서, 새로운 역사를 같이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00.2.

경계를 넘어서
Beyond the Boundaries

김봉렬 (편집주간, 한국예술종합학교)

작년은 ‘건축문화’의 해였다. 문화라는 단어만큼 다의적으로 쓰이는 말도 없다. 화이트헤드는 ‘문화’에 대한 정의를 16가지로 정리할 정도로, 문화라는 말이 중층적으로 쓰인다 한다. 그렇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판단한다면, 문화란 ‘예술과 인문학의 총체’라는 정의가 적절하다. 건축이란 기술과 예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적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니, 건축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건축적 현실을 과연 문화라고 볼 수 있을까. 타 예술 분야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심미적 정서와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이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의식이나, 철학적 주체성이나,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모두가 ‘아니다’. 이 사회의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며, 지식인은 더더욱 아니다. 예술가연하는 기술자요, 지식인인 척하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건축계는 음악계나 미술계에서 무엇이 이슈화되고 있는지, 누가 무슨 작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니, 명성황후가 매일 무대에 올려져도 무대 디자인에 참여할 길이 없고, 한국영화가 공전의 중흥기를 맞아도 영화와 건축간의 협력작업 한번 할 수 없다. 그저 유한 한량으로서 건축가라는 직업이 영화 주인공으로 간간히 등장할 뿐이다.
지식계나 다른 인문학계와의 교류는 더더욱 빈곤하다. 철학적 담론이나 사회 진단을 하는 자리에 건축계 인사가 구색 갖추기로 종종 참여할 때가 있는데, 다른 분야 인사들로부터 듣는 소리는 대략 이런 것들이다. ‘건축이란 공학기술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대화를 나눌만은 하군요.’ 이처럼 사회에서는 건축계가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하리라고는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중 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지도 않다. 대중들은 HOT 멤버들의 이름을 낱낱이 알고 있지만, 이 사회의 지도적 건축가 이름은 전혀 알지 못한다. 영화 ‘거짓말’의 등급 심사위원들을 수사할 만큼 민감한 여론이지만, 건축계의 파렴치한 현상설계 비리에 대해서는 언론조차 관심이 없다. 건축계의 유일한 교류영역이라고는 건축 위에 군림하는 자본시장이나, 공무원 사회뿐이다. 그리고는 자체 시장 안에서 니전구투를 벌일 뿐이다.
올해는 ‘새로운 예술의 해’이다. 20세기의 새로움이란 전문화, 기술화, 독자화를 지칭한 것이었다면, 21세기적 새로움은 탈장르화, 인문화, 보편화를 의미한다. 20세기적 창조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발명적인 것이었다면, 21세기의 창조란 이미 존재하고 실험된 것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고 결합시키는 발견적인 창조다. 따라서 예술과 기술, 인문학과 공학, 전통과 현대, 전문가 집단과 대중 사회 사이의 경계를 부단히 넘나들면서 만들어지는 건축만이 이 세기의 주역이 될 것이다.
이번 호에 소개되는 ‘오래된 우리들의 미래’ 집담회는 건축 뿐 아니라 영화, 철학, 미술, 문학계의 주목받는 주역들이 모여서 벌이는 말 잔치였다. 그 내용이 얼마만큼 생산적이고 집약적인지는 둘째로 하더라도, 집담회를 위한 몇 차례의 예비 만남과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들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이해가 첫째, 서로의 만남과 인정이 둘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건축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인문학적 소양을 극대화시키는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건축계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경계 넘기의 움직임들이 벌어지고 있다. 건축과 춤이 만나는 이벤트도 있었고, 지역사회 시민단체와 연합한 워크샾도 열렸었다. 그러나 아직은 문화예술계의 비주류로서 머물러 있고, 대중들과의 소통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이나 건축집단의 적극적인 소통 노력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스스로 문화적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건축교육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한다. 국제적 건축전문인을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제에 문화로서, 지식으로서 건축교육의 틀을 새롭게 짜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2000.3.
우리 건축계를 위한 제도 개혁을

김봉렬 (편집주간, 한국예술종합학교)

2000년 건축계의 최대 관심사는 건축사 제도의 국제 인증문제와 이에 따른 건축교육의 전면적 개편이다. 작년부터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한 이들 문제는 결코 급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국제건축가연맹 (UIA)에서는 이미 3년 전부터 국내 건축계에 자격 인증에 대한 대비를 촉구했었고, 조금이라도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국내 건축계의 앞날을 걱정했더라면 자체적인 대비책을 마련하고 국제적 협상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계를 공식적으로 대표할 3단체의 대비는 이러한 여망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이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고, 대비책 마련에 시간을 맞추지 못했으며, 능동적인 협상을 벌이지 못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소재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너무나 부족해서 각 단체는 단체대로, 문제의 당사자인 대학은 대학대로 개별적인 이해득실 계산과 부분적인 대책 마련으로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작년 이후 3단체의 움직임을 볼 때, 신뢰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모든 건축인이 머리를 맞대고 온갖 지혜를 짜내어도 해결될까 말까하는 엄청난 문제 앞에서 단체 이기주의와 소아적 이해 계산에만 분주하다. 이 땅의 수많은 건축인들과 학생들은 도대체 누구를 믿고 따라야하는가?
급기야 몇 명의 소장층 교수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노력으로 <건축교육의 미래 (도서출판 발언)>이라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필자도 이들의 순수한 애정과 헌신에 감동하여 작업에 동참하였는데, 1년여의 과정 내내 공식 단체에서 해야할 의무를 힘없는 개인들이 대신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현실을 개탄하곤 했다. 뒤늦게 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3단체가 협동으로 <건축사 자격제도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용역을 수행하여 그 대강이 몇차례의 공청회에서 마련되고 있다. 이제 건축사 자격제도, 교육제도, 그리고 인증제도에 대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마련된 시안들에 따르면, 미국내 기구들인 NCARB나 NAAB 기준의 한국어 번역판일 정도로 미국의 기준을 충족하는 것을 최소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미국식 건축교육과 자격 제도는 건축주 요구의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전문적 서비스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년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여 결과적으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 된 것이 미국의 경험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 전개과정과 보유 자원이 다른 한국에도 적용될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개별 천민자본을 조정하고 감독할 수 있는 공공적 비판의식 교육이 더욱 절실하며, 전문기술자보다는 사회적 책무를 가진 지식인의 역할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건축가 교육을 지향하는 모든 대학의 교과과정이 획일화되고 교과목 이름까지 같아질 우려도 있다. 제도란 최소의 기준만 마련되면 된다. 그 최소선을 초과하는 내용은 해당 대학의 자율에 맞겨야 다양한 견해와 실험정신을 가진 건축가들을 배출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해도, 교육의 주체인 교수와 학생들의 자질과 성취도가 최종적인 결과물이 될 것이다. 해방 후 왜곡된 교육제도 속에서도 우수한 건축가들이 성장했으며, 이만한 환경이라도 마련했으니 제도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소박한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교육무용론과 연결될 뿐, 사회적 주장은 될 수 없다.
이번에 7회째를 맞은 이상건축 학생공모전의 심사과정을 지켜보면서 우울한 연민을 지울수가 없다. 많은 건축 공모전에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천명 넘는 대규모 학생들이 응모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던, 파행된 교육 제도가 어떻든 간에 그들의 열망과 노력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부족한 학교교육의 폐해가 짙게 깔려있다. 아직도 건축을 건물만들기가 전부라고 여겨서 주어진 땅과 환경에 대한 접근이 극히 미약하다. 또는 학교 교육을 무시하고 선후배 간에 이어지는 비정규적 지식에 근거한 설익은 모방과 시도들이 일부를 이룬다. 물론 기성 건축가를 능가하는 빛나는 작품들도 적지 않게 있어서 미래를 밝혀주고는 있지만, 학교 교육이 더욱 충실하다면 한단계 높은 차원의 노력들이 보람을 거둘 것이 확실하다.
해방 50년만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제도 개혁이다. 한번 정착되면 바꾸기 어려운 것이 제도이고, 더구나 국제적 약속을 근본적으로 변경하기는 불가능하다. 비록 외압에 의해 시급하게 이루어지는 개혁이라고는 하지만, 건축계의 지각변동에 해당하는 거대한 변화다. 건축교육계는 의욕에 찬 교수들과 열망에 가득한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다. 부디 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제도 개혁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2000.5.
만연하는 밥그릇들
(실리지 않았음. 급작스러운 현상안 취소로. –> 그래도 신세대에 희망을 건다)

김봉렬 (본지 편집주간)

4월달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386세대를 비롯한 신진들이 대거 당선되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밝게 했다는 것이 낙관이라며, 영남과 호남의 특정정당 싹쓸이와 같이 더욱 심화된 지역주의의 거대한 벽 앞에서는 비관할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만 노무현 (전직)의원의 말은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한다. “부산시민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지역주의가 이기주의와 편견 또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고 부패로 멍들게하는 것이 또 있다. 집단 이기주의, 또는 유치한 말로 ‘밥그릇 논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며, 밥을 먹고 사는 생물학적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먹고, 쌓아두고,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싸움이다.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추는 맹수와1는 달리, 인간만이 벌이고 있는 맹목적 사냥이며 착취적 채집이다. 그러다 보니, 남의 밥그릇을 깨버려야하고, 뺏어야 하고, 남들이 모두 밥그릇을 챙기니 나도 뒤지면 안된다는 조급함에 온 존재를 맡겨야 한다.
건축계에도 지역주의가 일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문제는 끈질기게 작용하는 학연주의와 연고주의다. 중요한 현상경기가 있을 때마다, 계획안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심사위원이 어느 대학 교수인가를 추적하고 그 대학출신을 앞장 세워 집중적인 로비를 벌인다. 대학 교수직을 지원할 때면, 어느 대학에 어디 출신 교수가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성공확률이 높다. 물론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은 모두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논리에서 비롯된다. 누가 먹어도 먹을 것 아닌가? 그럼 내가, 우리 편이, 내 후배가 먹는 것이 낫고, 그래야 내게 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밥그릇 논리는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건축계의 화두는 단연 건축가 자격과 교육에 대한 인증문제와 제도 개편이다. 전국의 어느 대학치고 자신들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 곳이 없다. 5년제 설계학부로 갈 것인가, 4년제 건축공학과정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전문대학원으로 갈 것인가?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3자택1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인근 학과들과 통합하여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고, 같은 학과 내에서도 건축학과 건축공학이 통합된 애매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선 그 대학의 교육목표를 설계쪽인지, 공학쪽인지, 아니면 둘 모두를 취할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제도 개혁을 준비했던 당사자들은 전국에서 설계전공 프로그램을 택할 대학은 20%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교육 여건 상 실제로 그 정도만 설계교육이 가능한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재 벌이지고 있는 상황은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 전국 거의 모든 대학이 한 학과 내에 건축학 전공과 공학 전공을 동시에 개설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 학과 안에서 한쪽은 5년제, 다른 한쪽은 4년제 과정을 공존시키는 기현상을 감수하려 한다. 그 원인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교수진의 구성분포 때문이다. 설계나 계획전공 교수는 결코 5년제 설계과정을 포기할 수 없으며, 공학전공 교수는 4년제 공학과정을 양보할 수 없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양자 공존론이다. 학생들의 졸업후 진로나, 지역사회의 요구나, 교육여건의 충족도 등은 그 다음 문제이거나,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밥그릇 논리가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다.
전국 100개 대학이 모두 5년제 설계교육과정을 택한다고 했을 때, 소요되는 설계지도 교수수는 최소 1,000명에 달한다. 또, 한해 배출되는 졸업생만도 최소한 3,000명이다. 현재 우리 여건으로, 교수는 공급 결핍이요, 졸업생은 공급 과잉이다. 단순한 산수만으로도 불합리한 결과가 예측되지만, 밥그릇 논리의 강점은 모든 합리적 판단과 예측에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5년제냐 4년제냐 하는 논란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누가 어떤 내용으로 교육하는가가 실질적인 교육인증의 내용인데, 건축교육계는 지나치게 제도의 선택에만 매달려있다. 이러한 부차적 논의를 전면화시키고, 교육의 내용과 내실화를 뒷전으로 미루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교수들의 밥그릇 챙기기에서 유발된다. 누구를 위한 교육이고, 제도 개혁인가? 이제는 침묵했던 학생들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선에 나서야 할 것 같다. 이에는 이로, 밥그릇에는 밥그릇으로.
2000. 6.
기억하라, 극복할 것이다
More remember, it will be overcome

김봉렬 (본지 주간, 한국예술종합학교)

항간의 언론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린다게이트’는 주책없는 전직 국방장관과 육체를 무기로 삼은 여성 로비스트가 벌인 ‘부적절한’ 염문이 아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막대한 무기 구입과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 전쟁상인과 한국 고위관료 사이에 벌어졌을 추악한 비리와 부정이다.
서해안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인 매향리 주민들이 밤낮 계속되는 미군기의 폭격연습과 오발사고로 정신적 재산적 피해를 입어온 지 반세기에 가깝다. 소음 때문에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뜬금없는 폭격과 진동으로 창문이 부서지고 지붕이 내려앉는다. 여기는 아직도 남아있는 전쟁터이다.
오늘도 동작대교를 지나면 짜증이 난다. 다리의 끝은 막혀있고 옆으로 구부러진 램프로 내려가서 우회도로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서울 남산의 가장 양지바른 남쪽 사면은 모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신성한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라 한다. 별로 교통 소통에 도움도 안 되는 이 불구 다리를 무엇 때문에 막대한 혈세를 들여 건설했을까?
그 현대판 소도 지역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그런데 관할 구청인 용산구의 자치단체장은 이 신성불가침 지역에 미군 전용 고층 호텔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불법성을 들어 건축을 금지시켰다. 물론 미군 측에서는 묵살했지만, 그 구청장의 용기와 시의적절한 제재는 높이 살만했다. 미군정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느 공직자가 미군들의 온갖 불법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그 구청장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직위를 잃고 말았다.
선글래스 시장 판도를 바꾸었다는 린다김, 향을 묻고 풍어를 기원했던 마을에 투하되고 묻혀지는 폭탄들, 조금 지체할 때마다 솟아오르는 소시민적 짜증, 불법건축을 제재하는 공권력 행사가 오히려 이상한 서울의 한 지역.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사건들은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다른 줄기일 뿐이다. 분단과 전쟁의 영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고, 그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사실에 더욱 당혹스럽게 된다.
올해는 새 천년을 맞는 대희년의 해이기도 하지만, 남북분단 55주년이며, 6.25라는 디지털식 이름의 전쟁이 발발한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과 남북 분단, 그리고 미국과 쏘련의 대리전을 자처한 동족상쟁의 어리석고 비참한 전쟁. 20세기 전반기는 한민족 최대의 비극적인 시간이었다. 아직도 한반도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단지 전쟁을 쉬고 있는 ‘휴전’ 상태요, 냉전체제가 종식된지 10년도 넘은 이 새 천년에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지역이다.
세계에서 국방비 예산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며, 최대 무기 수입국의 하나인 곳이 바로 한국이다. 전 세계 무기 상인들의 판매 로비가 가장 치열한 나라이며, 명백한 범죄자들을 주둔군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속할 수도 없는 나라이다. 좌파들의 주장대로 미국의 식민지 상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미관계가 불평등한 관계임에는 틀림없다.
분단과 6.25는 과거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오늘의 도시는 전쟁의 폐허 위에 급속하게 재건된 또 다른 지층이며, 지금의 건축은 대부분이 미국이라는 원조국에서 들여온 수입 가공품이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이 가져온 도시와 건축의 문제를 밀도있게 고민해본 적은 반세기 동안 한번도 없었다. 6월호의 특집으로 기획된 < >는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의가 될 것이다. 8월호에서는 < 와 건축>의 이슈들을 다룰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예정이다. 과거에 발목을 묶을 이유는 없지만, 역사를 망각해서도 안 된다. 불행했던 과거가 극복의 대상이라면 우선은 그 실체를 알아야 하고, 현재의 모순을 치유하려면 그 모순의 뿌리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그러면 극복할 것이다.

** < >안에 6월과 8월의 특집 제목을 넣으십시오.

2000.7.
어떤 제도라도 내용이 문제이다.

분단 55년만에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는 감동의 장면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을 무렵, 경향 각지 대학의 건축과들은 대대적인 환경미화 작업에 열중이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교협)에서 주관하는 1999년도 대학 평가가 공교롭게도 건축분야였고, 바로 그 실사가 각 대학별로 시행되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도 평가가 왜 새 천년의 6월에 실시되는지 의문이지만, 평가 준비 때문에 시달린 교수들의 불평이 아니라도 이번 평가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평가 시기가 하필 이때인가? 작년부터 건축계는 국제 인증을 둘러싼 학제개편으로 몸살을 앓아왔다. 최근에 건축사 자격을 비롯한 교육 인증까지 일관된 시안이 발표되었고, 대부분의 대학들은 2002 학년도부터 건축(설계)와 건축공학 교육을 분리하여 실시할 준비들을 갖추고 있다. 건축계는 이제야 비로소 해방 55년 동안 왜곡되어 왔던 교육적 질곡을 극복할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학 평가는 미래의 계획과는 무관한 과거 5년간의 업적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내년 혹은 후년부터 시급히 시행해야할 과제들은 미뤄 놓은 채, 올 상반기 6개월간을 오로지 평가준비로 허송해 버렸다. 이처럼 소모적인 평가를 수용하여 교수들의 연구시간을 온갖 서류 정리와 보고서 작성에 허비하게한 책임은 누가질 것인가?
둘째, 평가 수행과정에서 드러난 상식 밖의 불공정 행위다. 대교협에서는 정해진 평가기준없이 대학들의 자체 평가보고서를 접수한 후, 보고서 내용들을 정리하여 평가기준으로 삼겠다고 했다. 따라서 전국 대학들은 자체적으로 다양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그 와중에 전국 8개 대학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따로 평가 기준을 정해 일방적으로 각 대학에 통고했다. 그것도 본격적인 평가가 시작되기 1주일 전 급박한 시점이었다. 이미 보고서를 제출한 각 대학들은 몹시 당황했고, 설정된 기준에 맞추어 보고서를 재작성하느라 밤을 새는 등 큰 혼란을 야기했다. 더 큰 문제는 기준 설정에 참여한 8개 대학은 이미 내부 정보를 입수하여 앞으로 정해질 기준에 맞추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기준 설정 논의 과정에서 내부 정보를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은 어떤 사전 정보에 접할 수 없는 불공정성을 노출시켰다. 출제될 문제를 미리 알고 대비한 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의 준비 상황은 말할 나위없이 현격한 격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셋째, 우여곡절 끝에 설정된 평가기준의 문제점이다. 평가란 어쩔 수 없이 정량적인 기준을 포함할 수밖에 없겠지만, 물량 위주의 평가기준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전임 교수수는 10명 이상, 5개 전공 이상을 만점으로 하고 있다. 교수수는 학생 비율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이번의 경우, 학과의 크기나 학생수와 관계없이 무조건 전임교수만 많으면 유리하도록 되어있다. 또, 전임 교수들이 5개 이상의 전공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건축(공)학과가 설계부터 시공 도시까지 백화점식 교육을 해야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화 전공화를 지향하는 건축교육 구조조정과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시대 역행적 기준이다.
교수 연구실적에 학생공모전 지도여부를 포함시키는 것도 문제다. 학생공모전이란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자발적인 과외활동이며, 지나친 공모전 응모로 인해 정상적인 설계교육이 피해를 본다는 항의도 많다. 공교육을 포기하고 사교육에 치중하라고 권고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양보다 질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해야할 건축교육 개혁의 방향에 반대되는 기준이다. 기준 설정에 참여한 대학은 수도권 사립대학 5 대학, 지방 사립대학 2, 그리고 국립대학 1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이들 8개 대학에 유리하도록 임의로 평가기준을 설정한 것이라면, 교육적 윤리적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소모적이고 형식적인 대학평가 결과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전국 대학의 실정이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 혹은 재단의 압력 때문에, 혹은 홍보 효과 때문에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이번 평가 결과를 무의미하다고 여기면서도 한점이라도 더 얻으려 무리한 준비에 여념이 없는 과정을 보면서, 과연 앞으로 전개될 건축교육 개혁이 제대로 정착될 것인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 호의 특집으로 건축사 자격제도와 교육 인증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필자들이 제도보다는 내용을, 형식과 물량보다는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핵심적인 과제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대학 평가과정에 나타난 허구성과 갈등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현될 소지가 있다. 인증을 행하고 기준을 작성하는 측에서 자신이 속한 기관이나 집단의 소아적 이익에 집착하여 건축판 게리멘더링을 행하고, 사전 정보를 편파적으로 빼돌리고, 제도적 업적 건수에 연연해하는 한,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교육과 건축계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다행히도 건축사협회와 건축가협회, 두 단체가 손잡고 건축연합회를 결성하여 창구를 단일화하고 객관적 제도 마련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모처럼의 대국적인 결단에 찬사를 보내며,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난관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2000.8.
위대한 건축은 일상에서 태어난다.

김봉렬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건축물들을 보고 왔다. 인구만으로 따지면, 핀랜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4개국은 500만 정도의 작은 나라지만, 알바 알토를 위시한 대가들을 배출했다. 알토 뿐 아니라, 스웨덴의 아스프룬드, 덴마크의 웃존, 그리고 재작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노르웨이의 펜. 모두가 독자적인 건축세계를 개척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들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스웨덴의 또 한명의 대가, 시구드 레베렌츠를 만난 것인 이번 여행의 최대 수확이었다. 그는 국내에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아스프룬드의 설계로 알려진 ‘숲 속의 공동묘지’의 실질적인 건축가이며 조경계획자였다. 그는 80 평생을 은둔적 건축가로서 시종하면서, 스톡홀름의 성 마가교회, 말뫼의 이스턴 공동묘지와 성 베드로교회 등 걸작들을 남겼다.
스톡홀름의 숲 속의 공동묘지와 말뫼의 이스턴 공동묘지는 극히 대조적인 개념에 의해 계획되었다. 앞의 것은 울창한 교목들 사이에 묘지를 묻어서, 마치 산발적으로 부려놓은 것과 같은 비석들을 보노라면 자연으로 돌아간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처연한 장소이다. 반면 말뫼의 묘지는 격자형 가로들과 인공 언덕으로 구성된 죽은 자들의 도시로 재현된 곳이다. 여기에는 단독주택(독립무덤)과 공동주택(떼무덤)이 있고, 죽음의 공동체를 위한 광장도 있는 따사로운 풍경을 이룩하고 있다. 하나가 성스러운 자연이라면, 다른 하나는 활기로 가득한 인공적인 도시다. 대조적인 이 개념들은 단순히 거장의 천재성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스톡홀름의 자연환경이 울창한 처녀림들이고, 말뫼의 자연은 농경지로 개간된 드넓은 들판과 구릉임을 눈여겨 본다면, 레베렌츠의 두 묘지는 결국 그 대지가 속한 환경과 풍경에서 개념을 설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곳의 묘지는 그 지역의 풍경을 기막히게 다시 재현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거장들이 건축물 자체의 보편적 구법과 기능적 일반 유형들을 발명하고 실험하는데 그들의 정열을 쏟았다면, 레베렌츠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의 건축가들은 각 지역의 주어진 환경과 문화적 전통을 재해석하고, 각 프로젝트의 대지가 형상화된 개성에 충만한 하나 하나 작품들을 창조해 냈다. 이들의 지역적 전통은 이미 20세기초부터 시작됐으며, 알토에서 집대성되어 웃존이나 펜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램튼은 이러한 건축적 태도를 일컬어 ‘비판적 지역주의’라고 부르며, 현대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비판적 지역주의 – 슐츠는 이와 유사한 경향으로 ‘새로운 지역주의’라고 부른다 -는 현대건축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 지역과 문화적 환경을 재해석하여 창출해 내는 개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단 스칸디나비아의 건축가들 뿐 아니다. 포르투갈의 시자, 멕시코의 바라간, 스위스 티치노의 보타, 일본의 안도 등 20세기 후반기의 국제적 대가들의 건축적 태도가 바로 ‘비판적 지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건축적 성취와 영향력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구미권의 건축가들에 비해 오히려 탁월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열주를 세우고 기와지붕을 씌우던 7-80년대의 한국 건축이 저속한 통속적 지역주의였다면, 현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진 건축가들의 태도는 비판적 지역주의에 가깝다. 이러한 건축적 자세는 세계를 향해서 당당한 대안이요 진로로 제시할 수 있는 비젼이다. 한국 건축을 둘러싼 장애요소들은 첩첩하다. 불충분한 건축교육, 사계절이 뚜렷한 불리한 기후, 건축적 변방의 아픔, 전통의 단절과 부재, ……. 그러나 비판적 지역주의의 태도는 이러한 주어진 환경과 일상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탐구에서부터 시작된다. 희소한 인적 자원, 태양이 없는 우울한 기후, 변방부 유럽의 약세 등 무수한 악조건들 속에서 스칸디나비아의 건축가들은 자유롭고, 빛으로 충만하고, 영감에 가득한 건축적 전통을 만들어냈다. 장애요소는 비판적 태도에 의해 얼마든지 새로운 창작의 원동력으로 바뀔 수 있다. 일상에 대한 리얼리티가 관건이다.
“위대한 사상은 사소한 일상에서 솟아 나온다. 위대한 생각은 대지의 조건에서부터 우러나온다. 재료와 공법은 수단일 뿐, 건축의 진정한 가치가 아니다.” 알바 알토의 이 금언은 곧, 스칸디나비아 건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2000.9.
창간 7주년 – 인문학적 지식을 위하여
7th anniversary, toward the humanistic knowledges

김봉렬 (본지 편집주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건축잡지는 물론 한국 잡지사상 <이상건축>만큼 독특한 역정을 걸어온 잡지도 없을 듯 싶다.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창간되어 역량을 쌓았고, 지역지가 아닌 주요 전국지로서 위상을 구축해왔고, 상업성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 오면서도 건축이론 분야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강화해 오고 있다.
어언 창간 7주년이다. 금년 몇 개월간 편집에 관여하면서, 그간 형성해온 이상건축의 전통을 유지한다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임을 절감하고 있다. 추상적 주제를 현실적 기사와 원고로 바꾸는 기획부터, 필진의 인선, 청탁, 의견조정, 독촉과 편집까지 이처럼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일을 해야 잡지가 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수많은 작품들, 특정 건축가 소개, 또는 해외건축 소개 등 쉽고 빠르고 편안 길도 많은데, 현란한 볼거리도 없고 어렵다는 평을 감수하면서 이 길을 가야 하나?
그러나 몇 번을 반문해도 이상건축이 추구하는 길은 포기할 수 없는 건축 본연의 길이라 생각한다. 흔히 건축은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말도 아니다. 건축은, 의미있는 건축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결과이며, 건축가의 세계관과 개념에 의해 좌우된다. 그 일련의 선택적 과정에는 인문학적 지식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매 순간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건축은 예술이요 기술인 동시에 또 하나의 인문학이기도 하다. 이상건축이 건축의 이론화라는 방향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본질적 이유이다.

창간 7주년 기념인 이번 호와 다음 호는 건축계 바깥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건축과 도시환경에 대한 담론들을 소개한다. 건축이 인간의 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한, 건축은 인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건축의 생산 혹은 창작행위가 건축가라는 지식인의 정신적 결과라고 한다면, 더더욱 인문학적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비단 건축이 건축가와 건축주라는 개인들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건축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며 공공적인 재화이다. 어차피 대지에 뿌리내려야만 하는 것이 건축의 운명이며, 대지의 일시적 소유주가 누구인가와는 관계없이 도시라는 사회적 복합체의 일부를 형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건축계가 주위의 인문학이나 사회학적 성과를 체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통로도 없거니와, 개척하려는 진지한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관심있는 개인의 탐구와 독서에만 의존할 뿐인데, 자칫하면 유행적 경향이나 주변적 잡학에 사로잡힐 위험도 크다. 또는 자신이 우연히 접한 특정 인문학 분야만이 지고지선이라는 아집에 쌓일 수도 있다.
우리 건축계가 안고있는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의사소통의 단절이다. 건축계 내부의 의사소통도 문제지만, 타 예술계나 기술계와의 소통은 더욱 단절되어 있으며,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는 아예 관계조차 맺지 못하고 있다. 건축과가 공과대학에 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 건축사협회가 건설교통부에 있어야 하느냐 문화관광부에 있어야 하느냐로 논란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세계 건축은 하나의 인문학적 전통으로 자리 매김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야기다.
이번 기획을 진행하면서 적지 않은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우선 적절한 필진을 초청하기가 어려웠다. 이상건축의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쉽고 정확한 원고를 주실 분들을 찾기가 무척 버거웠다. 그만큼 건축 외부와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정보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또는, 원고 청탁을 받은 몇 분의 경우지만, 건축분야에 기고한다는 사실을 너무 무겁거나, 반대로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성사가 안된 경우도 있었다. 전혀 모르는 건축계 어떻게 원고를 싣겠는가는 반응과, 아니면 그까짓 건축에서 무슨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는가 하는 오해였다. 어쨌든 건축과 외부 사이의 한국적 단절은 심각했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아픈 것은 인문학 분야의 전반적 침체와 위기였다. 이미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여러 차례 들어왔지만, 청탁 과정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은 전공자가 감소하고, 그나마 순수 학문을 포기하며, 대학의 학과는 폐쇄 일보직전이다. 인간성의 근원을 생각하고,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본연의 역할에 앞서서, 소속된 학문 분야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학계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을 것인가에 더욱 많은 신경을 써야하는 형편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건축의 위기요 사회의 위기다. 건축이 인문학에 더 많은 관심으로 가지고 도움을 받아야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학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직의 구조적 위기
The Structural Crisis of Architect Profession

김봉렬 (본지 편집주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국내 건축지마다 새롭게 소개할 작품들이 없어서 아우성이다. 건축계의 실력이 갑자기 떨어져서가 아니라, 새로 완공되는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IMF체제를 벗어났다는데 왜 이리 건축경기는 점점 어려워지는가? 금년 안에 설계사무소는 물론, 건설업체 마저도 절반이 폐업하리라는 우울한 전망이 횡횡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금년 상반기 건축허가면적은 1999년과 비교하여 150% 신장되었으며, IMF 전인 1997년 수준에 70% 선까지 회복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단순한 통계보다는 더욱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위기라는 점이다. 1993년 전국 건축사 수는 5,308명이었으나, 1999년에는 12,398명으로 2배가 훨씬 넘었다. 건축 물량은 그대로거나 줄어드는데, 건축사 수는 배가 되었으니, 건축사 1인당 수주량은 급격히 감소할 수밖에 없다. 93년 년간 1인당 평균 허가면적은 6,700여평이었으나 99년은 1,900평으로 28%로 감소했다. 해마다 건축사는 등비수열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건설 물량은 기껏해야 등차수열적으로 확대될 것이 확실하니, 앞으로 물량적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체감 위기보다 훨씬 심각한 구조적 위기이다.
금년 7월, 본격적인 의약분업에서 비롯된 의사집단의 조직적 반발은 일반 국민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히며 정권적 차원의 부담이 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명분도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 근저에는 의사라는 특권적 전문직의 위상이 급속하게 격하되고 있다는 구조적 위기감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들의 수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수입은 급격히 감소하고, 사회적 존경은 커녕 이기주의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원가에 못미치는 의료수가, 약가마진의 박탈 등 경제적 악재들만 강요당하니 반발할 수밖에 없다. 건축계의 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적 위기이다.
변호사들 역시 마찬가지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한마디로 변호사 수가 너무 늘어서, 그들이 이전에 누렸던, 또는 기대했던 수입과 대우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앞으로 로스쿨제도가 도입되면 더욱 어려워지리라는 전망이다. 현대사회의 대표적 전문직이었던 의사, 변호사, 그리고 건축사들의 구조적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고수입과 사회적 특권을 누려왔던 지난 50년간 의사와 변호사라는 전문직은 어떤 사회적 공헌을 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건축 전문직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들에게 어떤 문화적 환경적 공헌을 했는지, 한국 건축의 위상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는지, 하다 못해 의사만큼 전문직으로서 사회적 인지도를 쌓았는지. 건축사들이 파업을 한다면 의사들의 파업만큼 효과가 있을까?
아무리 건축경기를 부양한다고 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다. 현재의 위기는 단순한 불경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날 수 없는 구조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건축사 수를 줄이고 과거의 특권을 회복할 수도 없다. 이미 전문직의 확대는 시대적 세계적 추세일 뿐 아니라, 소수의 특권은 건축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보다는 고급 승용차와 골프 문화만을 조장해왔을 뿐이다. 상황을 탓하기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문직의 특권이 보호받았던 20세기적 구조가 자유경쟁, 시민 감시의 새로운 구조로 바뀌고 있다. 이 와중에서 설계가 덤핑등 가격 경쟁은 건축계 모두의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바뀐 구조에 적응하려면 전문직의 패러다임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경쟁은 건축적 실력과 질적 완성도로 승부가 가려져야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최고의 건축가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한국건축계의 문제는 주도적 건축가의 부재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수한 기술력과 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중간층의 취약함에 있다. 건축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확대시켜야 할 것이다.
20세기적 설계 행태와 작업 영역도 근본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주문생산식 설계작업, 협의의 건축 환경 창조라는 폐쇄적 벽을 허물어야 한다. 건축 설계 뿐 아니라, 도시, 조경, 실내, 환경 디자인, 심지어는 환경 미술까지도 건축가의 영역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들 영역은 산업사회 전에는 원래 하나의 영역이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시설 투자에 대한 시장 조사와 기획 업무, 마스터 플랜 등 사회경제적 디자인 부분까지, 또한 사이버 스페이스나 웹 디자인까지, 디자인과 서비스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국내 시장은 이제 한계에 왔다. 물론 남북통일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자칫하면 북한의 난개발을 초래할 수 있는 만큼, 통일 이후의 기회는 아끼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무대는 세계다. 시장 개방이나 교육의 국제기준화 등은 위기라기 보다는 기회이다. 안으로 내실있는 교육과 실력 양성을 통해, 밖으로 진출하여 세계 시장의 건축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유럽과 미국 뿐 아니다. 정서적으로, 현실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아시아 시장, 불모지에 가까운 아프리카 등 시장은 널려있다.
실력 양성, 건축 영역의 확대, 세계건축계의 진출. 거칠긴 하지만 일단의 해답은 될 것이다. 그러나 실현되리라는 기대는 어렵다. IMF 체제를 맞이하던 해, 많은 건축인들이 공언했다. 이제 일도 없는데 공부도 하고 생각을 정비해야겠다고.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무엇을 이루었는가? 실천의 의지와 노력이 없으면 해답도 없다.
건축적 리얼리티를 위하여 – 일상의 재발견
Rediscovery on the architectural reality of the ordinary world

어느 대학의 초청강연에서 겪은 이야기. 주제는 주로 20세기 도시건축의 문제에 대해, 특히 서울시내에 세워진 몇 기념비적 건축물에 대한 비평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예의 질문이 있었는데, 시니컬한 강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학생들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라파엘 비뇰리라는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한 종로삼성타워는 국내 어떤 건축보다도 진취적이고 독특한 데, 왜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그 학생은 비뇰리 뿐 아니라, 하라 히로시나 피터 아이젠만의 설계 방법론을 열거하면서, 이른바 파편적 도시이론이나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야 말로 첨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이론이 아니냐는 반론도 폈다. 진지한 탐구와 해박한 지식을 가진 보기 드문 학생이었다.
현대건축의 접근 방법은 너무도 다양해서, 어느 누구가 옳고 누구는 나쁘다는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특히, 국내 건축계에서 회자될 정도의 유명한 세계적 대가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수준과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교훈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이, 실현된 건축물이 서울이라는 특정한 도시에 섰을 때는 무조건 정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종로타워가 아무리 새로운 공법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 그 건물은 종로라고 하는 역사적인 땅 위에 서있는 대상물이고, 서울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일정한 장소를 이루고 있는 종각역 부근의 부분일 뿐이다. 한마디로 종로타워는 그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5년 전까지 바로 그 자리에 서있던 박길룡의 화신백화점을 기억할만한 어떤 흔적도 없을뿐더러, 조선조 500년간 서울의 등뼈를 이루어온 운종가라는 도시적 중추에 대한 해석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길 건너, 뒷골목의 복작대는 서울 청년들의 활기나 거리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건물 뒤편의 전통적 거리-인사동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다. 오로지 독특한 기념물로서 서울의 명물이 되고픈 상업적 욕망만이 빛을 발할 뿐이다. 종로타워에 대한 비판은 바로 서울이라는 도시, 종로라는 거리에 대한 건축적 리얼리티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재화라는 명제를 끄집어내는 것조차 쑥쓰럽다. 건축은 우선 대지라는 한정된 재화를 필요로 한다. 다른 공산품과는 달리 대지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개인이 소유한 땅이라 할지라도, 그 땅을 부풀릴 수도, 폐기할 수도 없고, 단지 일시적인 이용권만 소유할 뿐이다. 또한, 어떤 건축이든 일단 세워지면 좋던 싫던 공공에게 공개되고 도시의 부분으로 사회화된다. 그리고 그 공공적 수명은 짧으면 몇십년, 길게는 몇백년을 지속한다. 미술관이나 음악당과 같이 한정된 장소에서만 공유되는 타 예술 장르와는 그 존재양상이 전혀 다르다. 건축적 리얼리티란 건축을 둘러싼 대지와 장소, 역사와 문화, 사회와 인간이라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리얼리티가 없는 건축이란, 아무리 독창적이고 첨단적인 발상을 가졌다고 해도, 본질적인 역할을 포기한 개인적 유희에 불과하다.
위대한 건축은 일상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파편도시론과 같은 현대적 도시관을 비판하게 된다. 비록 현대도시가 파편과 같이 불연속적이고 개별적이라 하더라도, 또 하나의 파편을 만들어 도시의 분열에 가담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잃어버린 도시의 전체성과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21세기 건축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사이버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 비판을 받는 것도 결국은 구체적인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이유일 수 있다. 도구가 목적이 되어버린 전도된 방법이라면, 그것이 비록 세계적 대가의 이론이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이상건축 학생공모전의 화두는 ‘일상성’이다. 너무 추상적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이란 주변에 널려있고, 이 시간에도 풍미하고 있으며, 내 친구나 내 이웃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세계다. 이 일상적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그 방법론과 해답을 난해한 이론서나, 기상천외한 대가들의 방법론에서 발견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일상이란 이곳, 여기와는 다르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작고 소박한 발견과 해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건축적 리얼리티의 실체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2000.12월호
정치적 리더십만이라도 절실하다
At least we need a political leadership

며칠 전까지 새천년 건설환경 디자인 세계대회가 성대하게 열리더니, 지금은 2000년 건축가 축제가 진행 중이다. 불과 몇달 전, 세계의 국가원수들이 모여 다자간 정상회의를 열었던 아셈 컴플렉스의 바로 그 회의장에서 50여명의 국내외 건축계 석학과 대가들이 디자인을 주제로 국제대회를 열었다. 파올로 솔레리나 안트완 프레독 같이 이름만 들었던 대가들이 수도 없이 초청되어서, 누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들이 모였다. 예술의 전당에서 벌어지는 건축가 축제의 일반 공모전에는 1400여 작품이 응모하여 100여 작품이 입선 전시 중이고, 초대 작품전에는 50여 기성 건축가들이 서로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바야흐로 건축의 세기, 건축의 계절이 도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대학 졸업자들을 받아주는 건설회사나 설계사무소는 열에 하나도 되지 못하고, 현재의 20%까지 건설회사가 줄어들어도 무방하다는 경기 예측이 나오는가 하면, 절반 정도의 설계사무소가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으리라는 비관적 전망에 우울하다. 하늘에는 새천년의 장미빛 무지개가 걸려 있는데, 건축의 터밭은 가뭄과 냉해에 말라 터지고 있는 꼴이다.
정말 우울한 사건이 하나 더 발생하고 말았다. 노동부에서 입법 예고한 ‘자격의 관리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다. 이에 따르면, 변호사 의사 회계사 법무사 등 60개의 국가자격은 현행대로 개별법에 의해 관장하고, 건축사 부동산중개사 주택관리사 손해사정사 안경사 등 117개 자격은 통합하여 관장토록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래도 건축사의 입지가 변호사나 의사만은 못해도 법무사 정도는 되리라 생각했다. 4년제 교육도 모자라서 5년제냐 4+2년제를 논의하고 있고, 가협회 사협회 학회 등으로 나뉘어 건축의 예술적 기술적 학술적 주도권 다툼을 벌일 정도로 활발한 건축계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국과 세상은 건축가를 여전히 설계사로 부르고 있으며, 복덕방 아저씨나 관리사무소장과 구별하지 못하며, 보험설계사나 안경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전문직은 의사 변호사 건축사(가)다. 이들 3대 직종은 별도의 교육체제를 가져야하고, 별도의 시험을 통해 면허를 받아야 한다. 그만큼 중요하기에 국제인증이다, 상호 개방이다 하는 압박이 있지 않은가? 건축사협회에서는 당연히 이 입법에 반대하고 관계기관과 담당 공무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도 안돼는 법안이 수정되어 건축사법에 따라 건축사 자격이 관리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처럼 건축의 위상이 추락해버린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건축의 사회적 제도적 위상은 건축계 내의 제도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가협회 사협회 학회는 내부 결속과 주도권 다툼에만 익숙했지, 변화하는 국제상황과 국내 정세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탄력도 여력도 없는 듯이 보인다. 교육의 국제 인증과 자격 시장의 개방 등 중요 사안을 3단체가 서로 책임을 미루다가 결국 급조된 시안으로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던게 바로 작년이었다. 그후, 건축단체연합(가칭 FIKA)을 결성하고, 건축인증원을 설립한다더니, 아직 아무런 가시적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몇개의 건축잡지들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건축계에는 리더십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건축사 자격이라는 전문직에 속한 한, 그리고 건축허가라는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는 한, 또한 교육인증이라는 국가적 제도가 작동하는 한, 건축계의 제도적 리더십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혼란이 제도적 리더십의 부재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 해결책도 다름 아닌 리더십의 문제이다. 정치권과 행정부를 설득하여 건축계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국제적 활약으로 한국적 교육 인증을 인정받고, 언론과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로 건축의 문화적 사회적 역할을 제고시켜야 한다. 그 일을 누가 하겠는가? 아직은 건축 3단체로 대표되는 제도권 조직이 담당할 수밖에 없다.
우물 안 개구리는 하늘을 알지 못하며, 여름의 베짱이는 겨울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건축인들이 건축계라는 영역 안에서 아웅다웅하고 있는 사이에, 또는 세계대회다 새천년이다 자위하고 있는 사이에, 우물은 메워져가고 여름은 끝이 나고 있다. 이 공멸의 위기, 추락의 늪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리더십이 절실하다. 이제는 도덕적 권위나 학술적 존경이나 디자인의 실력을 갖춘, 그런 이상적 리더십은 바라지도 않는다. 정치적 역량만이라도 갖춘 리더십만이라도 절실하다.
2001.1.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모로 갈 수는 없다

김봉렬 (본지주간,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21세기를 여는 2001년, 새해 아침. “대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지만, 한국 사회는 우울한 한 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다시 고조되는 국가적 경제 위기를 맞고도 정치계는 정쟁과 집안 싸움으로 파행만 일삼으니 사회적 불안과 방황이 증폭될 뿐, 어떤 희망이나 비젼을 찾을 수 없다. 탈출구 없는 위기이기 때문에 더욱 절망적이다.
건설 경기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시공회사의 대명사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대주주였던 현대건설마저도 부도와 퇴출의 벼랑에 서 있다. 현대건설의 위기는 물론 방만한 경영과 과도한 부채 등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지만, 사회 경제 전반의 구조적 위기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70년대 이후, 건설업이 국가 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줄곧 22%정도였다. 가히 국가의 기간 산업으로 큰소리칠만했다. 그러나 선진국과 같이 안정된 사회의 건설업 비중은 8%정도라 한다. 정부와 학계에서 내놓고 말을 못해 그렇지, 30년간 한국의 건설경기는 이상 과열경기였고 현재의 불황이 오히려 정상이라는 것이다.
건설물량에 목을 메고 있는 설계업계는 더 말할 나위 없다. 풍문이기는 하지만, 5000명에 달하는 올해 건축과 졸업예정자 가운데 설계사무소에 취직한 인원은 전국을 통틀어 30명 이내라는 비공식 통계가 떠돈다. 시공회사 취업자도 전무에 가깝다고 풍문은 아울러 전한다. 결코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이미 폐업했거나 개점휴업 상태의 사무소들이 부지기수니 풍문이 그럴법하게 들린다. IMF 관리체제가 시작되던 1997년, 전국의 대학원들은 이상한 호황을 맞았다. 취업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2년 후에는 좀 더 상황이 나아질 것을 기대했던 졸업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고, 많은 대학원들에 정원미달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내년에 대한 희망은 물론, 2-3년 후에 대한 낙관마저 사라진 처절한 현실이다.
사태가 이처럼 심각해지면서, 우려할만한 집단 아노미 현상의 조짐이 나타난다. 우선 기성세대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원망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왜 기존의 명망있는 건축가들이나 선배들을 멸시하는 현상이 젊은 세대들에게 팽배해 있는가? 기성세대는 너무나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고귀한 건축적 이상을 위해 노력할 뿐, 큰 물량을 수주해서 한 명이라도 더 직원을 채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당장 일자리가 없는 당사자들의 절실한 심정을 이해한다. 그리고 기성세대에게 일말의 책임도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천박한 설계와 부정과 협잡으로, 그래서 전반적인 건축의 질을 떨어뜨리고 사리사욕을 채워온 부도덕한 기성세대가 자초한 것이다. 자신의 건축을 위해 꾿꾿하게 한 길을 걷는 소수의 건축가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숨겨진 거대한 부정과 죄악에는 눈감은 채, 드러난 사소한 결점만을 물어뜯는 제살 깍아 먹기에 지나지 않는다. 온갖 협잡과 뇌물이 판치는 추악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자신의 순수한 이상을 유지하려는 그들을 존경하지는 못할 지라도, 최소한 보호해야할 의무가 후진들에게 있다.
이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갈래의 노력들이 나타나게 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어 그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이다. 그 책임은 물론 건축계의 공식 단체들의 몫이다. 큰 시야를 가지고 인력의 재배치부터, 산업구조의 개선노력, 각종 제도의 정비를 통해 일자리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단체나 협회도 조직도 노력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소아적 권력과 이익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제도적, 구조적 개선의 비전이 전혀 보이지 않는 현실은, 그래서 더욱 비관적이다.
구조적 개선은 개인의 힘으로, 특히 아무런 힘이 없는 사회적 초년생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제도의 탓만 하면서 개인의 생존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나라도 살자’고 왜곡된 길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경제적 어려움을 핑계로, 상대를 헐뜯으면서 로비와 뇌물로 경쟁에서 살아남는 추악한 기성세대들을 비판해오지 않았는가? 개인적 명성을 위해 주변의 소중한 노력들을 짓밟고, 온갖 독설과 편협한 비평으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지식인들을 경계하지 않았던가? 부정한 방법으로 취업을 꾀한다거나, 일확천금의 투기에 젊음을 소진한다거나, 모두를 부정하면서 자신을 알리려는 상극적 처신. 기성세대의 일그러진 가면을 다시 쓰려는가?
공자님 말씀 같지만, 세계를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내공을 쌓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안된다. 젊은 시절의 1-2년 고생은 앞으로의 수십년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건강한 정신과 탄탄한 실력을 갖춘 이들만 세상에서 선택한다. 세상이 비록 어리숙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무척 까다롭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정상적 방법으로 세속적 성공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성공의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제도나 구조 역시 개인들의 노력과 실력과 올바른 가치관이 쌓이고 쌓여 고쳐질 수 있는 문제다. 타율적 구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자성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