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설 개발과 역사환경 파괴의 쌍곡선
해방 50년의 건축사는 유례없는 개발과 건설의 역사인 동시에, 수천년간 누적되어 온 역사적 환경을 철저히 훼손해 온 파괴의 역사이기도 하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전혀 청산하지도 못한 채 미군정의 지배를 겪는 과정에서 민족적 자존심은 실추될 대로 실추되어, 이상적 사회의 모델을 內地 (일본)에서 本土 (미국)로 옮긴 것이 고작이었다. 곧이어 겪은 분단전쟁의 쓰라린 경험은 최저 수준의 경제적 삶을 갈구하게 되었고, 개발과 건설은 절대적인 목표가 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곧 과거 역사에 대한 부정과 민족적 역량에 대한 좌절과 상실감이었다. 한 술의 밥을 위해서는 전래의 문화유산을 팔아 먹는 것이 정당했으며, 한 평의 잠자리를 위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도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순리였다. 심지어 “한국적”인 것은 모멸과 타파의 대상이었고, 미국 것은 무엇이든지 최고라는 등식까지 성립하였다. 이러한 외세 지향적, 개발 지향적 사회에서 역사의 보존과 연구는 미신과 낙오의 표상이었다.
건축문화의 발전을 여전히 저해하고 있는 것은 소위 개발 신드롬이다. 누군가의 지적과도 같이 20세기 한국인들이 손을 대면 댈수록 환경은 파괴되어 가고 아름다움은 추함으로 바뀐다. 해방 50년의 건축계를 휩쓸어 왔고 아직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물량주의 건설주의는 20세기 건축인들로 하여금 역사상 가장 조악한 디자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전락시켰고, 20세기의 한국건축을 가장 저급한 질을 가질 수 밖에 만들었고, 그래서 곧 청산되어야 할 대상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따라서 50년 개발의 역사에서 그 긍정적인 공보다는 비판적인 위치에서 부정적인 면들을 부각시킬 수 밖에 없다.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된 시기는 대략 60년대라 할 수 있고, 그 시기는 개발 드라이브, 개발 독재의 대표적인 시작이었다. 불량주거 철거를 통해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한 청계천 복개공사(58년)는 하천 오염의 근본적인 대책보다는 지하에 매설하여 눈에 보이지만 않게하는 눈가림 개발의 효시였다. 군사정권은 그 위에 청계 고가도로 (61-79)를 건설함으로써, 소수의 자동차 교통을 위해 도시의 기존 조직을 교란하는 최초의 대규모 예를 남겼다. “증산 수출 건설”을 국가 경영의 철학으로 삼은 이 시기에 광범위한 개발 프로젝트들이 시행되었다. 최초의 신도시라 할 수 있는 울산공업단지 (62), 서울의 강남지구 개발 (68), 여의도 개발 (68) 등 도시 단위의 계획과 개발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도시계획의 경험과 기술이 부족하였고 전문가도 거의 육성하지 못한 시점에서의 도시계획이란 도로망을 긋는 것이 고작이었고, 인간적인 삶의 질이라던가 문화적 환경 조성은 언급될 기회마저 없었다. 무계획의 계획, 물량과 건설효율 위주의 개발은 급기야 광주 (현 성남시) 대단지 폭동 (71)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단군 이래 최대역사라고 자찬하던 경부고속도로 건설 (68)은 최단 공기, 최저 건설비를 자랑하였지만, 급조 날림 공사의 문제로 아직까지도 보수해야 하는 세계 최장 시간, 최대 건설비를 요하는 도로가 되어있다.
그래도 신도시 개발은 기존의 환경이 비교적 한적한 곳에서 벌어졌지만, 71년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수천년 적층되어 온 농촌의 물리적 구조를 송두리채 교란시킨 열풍이었다. 특히 이 운동의 핵심이었던 농촌주택 개량사업은 안락한 새로운 농촌주택을 보급하기 보다는 기존 초가집의 지붕을 함석과 슬레이트로 교체하는 전시효과만을 거두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농촌공동체 파괴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 대부분 텅빈 폐가로 남겨진 각 마을의 새마을 회관은 이 운동의 단기성, 전시성을 보여주는 물증이다. 농촌 경제정책의 실패와 함께 반강제적인 취락구조 개선사업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농업에 대한 좌절만을 부채질하여 엄청난 이농민을 양산해 냈고, 수많은 빈집과 폐가를 남기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새마을 운동의 가장 큰 폐해는 농촌 공동체가 간직해 온 전통 문화와 민속을 미신으로 취급하여 말살해 버렸고, 전통적인 살림집과 건축물을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만든 점이다. 농민들 마저도 – 당시만해도 인구의 70%가 농민이었다 – ‘슬라브집’ ‘불란서집’을 가장 이상적인 건축으로 갈구하게 만든 점이다. 이제 “전통과 한국적인 것은 나쁜 것, 새 것과 서양 것은 좋은 것”이라는 허위의식은 모든 국민의 상식이 되어 버렸다.
70년대에 시작된 중동-사우디 건설 특수는 국내 건설업의 규모와 실력을 한단계 높여준 일대 계기가 되었지만, 건설 및 건축기술자는 ‘잔챙이’까지도 중동에 공수한 결과, 국내 건설계는 오히려 기술 하락의 역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건축이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는 것, 혹은 가장 넓은 건물을 짓는 것이 되어버려, 개발 신드롬의 국제화를 달성하였다. 막대한 물량의 중동 특수는 국내 건설업계의 덩치를 한껏 부풀려 놓았고, 80년대 중반 중동 경기가 사그러들 즈음, 초대형화된 건설업체의 생존은 국내 경제와 정치에 커다란 짐이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수도권 일대의 신도시 개발은 해외 시장의 침체 효과를 국내에서 보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이는 또한 5,6공 정권이 민심 수습책으로 내 놓은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인구 40만의 도시가 5년 안에 건설되는가 하면, 서울 올림픽을 전후한 대규모 토목, 건축 공사가 1-2년 사이에 완공되기도 했다. 이제 한국의 건축과 건설계는 완벽한 기술과 신속한 공사 능력을 구가하는 듯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분당과 일산 신도시의 아파트들은 완공 직후부터 균열이 일어나고, 곳곳에서 날림 부실공사의 항의가 일어나더니, 1995년 6월 29일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완전 붕괴되는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호화로움을 자랑하던 이 백화점은 신도시 건설의 붐이 한창이던 89년에 건설된 것으로 단 하루만에, 정확히는 단 35분만에 마치 폭파된 것 같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건물 내에 있던 수많은 목숨들과 함께. 이 글을 쓰는 지금 아직 구조 복구작업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현재 130여명의 사망자와 300여명의 실종자, 500여명의 부상자를 기록 중이다. 개발과 건설 드라이브의 종말 앞에서 할 말이 없다.
개발 드라이브의 구조적인 모순과 함께, 심각하게 대두하는 것은 본격적인 지방 자치시대를 맞아, 개발 지상주의의 광풍이 수도권 뿐 아니라 전국에 불어닦칠 것이라는 우려다. 해방 50년간 지방의 역사도시들은 – 전주, 대구, 경주, 충무 등 – 이미 서울과 다름없는 무성격한 도시로 조성되면서 그 역사환경은 점차 파괴되어 왔으나, “지방자치=지역개발”의 명제에 사로잡힌 민선 행정부들은 더욱 그 개발과 파괴의 질주를 가속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도시 경주는 이미 고속전철역 유치와 제2경마장 건설이 확정되어 축제 분위기이다. 이 시설들이 들어설 지역들은 신라시대의 유적들이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는 지하 보물창고 지역이다. 중규모 도시 뿐 아니라 읍면 단위 소도시들까지도 개발 열풍에 휩싸여 있다. 지리산 아래 산청군 지역은 서울랜드를 능가하는 대규모 위락단지인 “경남랜드” 개발의 꿈에 부풀어 있다. 역사환경의 파괴는 지역 소득증대의 대가로 치루어야할 가장 값싼 수단이 되었다.
역사적인 개별건물의 파괴는 더욱 심각했다. 목조 전통건축물들이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서울 북촌의 경복궁과 칠궁들이 도로계획을 이유를 변형되었고, 독립문은 고가도로에 밀려 그 자리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의 대표작인 화신백화점은 자본의 논리에 밀려 87년, 그것도 공교롭게 3월 1일 철거되고 말았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매우 상반된 성격의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면서 옛 조선총독부를 철거하면서 동시에 경복궁 복원을 지행하고 있으면서, 옛 경희궁 터에는 막대한 면적의 지하 유물 파괴를 수반하는 시립미술관 신축공사를 벌이고 있다. 한 쪽의 궁궐은 복원의 명분 아래 일제기의 대표적 건물을 파괴하고 있으며, 다른 한 쪽의 궁궐은 건설의 명분으로 원래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 현충사를 위시하여 독립기념관 전쟁박물관 등 대형 건설사업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더니, 문민정부는 철거와 파괴로서 정권의 도덕성을 한껏 외치고 있다.
조선총독부 철거로 마치 훼손된 민족적 자존심이 살아나고, 쓰라렸던 과거의 역사가 영광의 역사로 탈바꿈하는 듯한 착각 속에서, 지방 각 도시에 남아있던 일제기의 건축에 대한 철거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경주시내 주택가에 위치한 일본식 절 (현 농촌지도소)은 민족정기 고양을 이유로 금년말 철거가 확정되었다.
2. “전통” 또는 “한국성”의 굴레
한국건축사 연구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 시초의 동인이 매우 정치적인 목적에 봉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근대 한국건축사 연구의 효시로 일본인 관학자 세끼노 다다시(關野貞)가 1904년 간행한 <朝鮮建築調査報告>를 꼽을 수 있다. 그 조사와 연구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하여 각 방면에서 행해진 조선 반도 일제 조사의 일환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행해진 건축사 연구의 대부분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철저하게 한반도 건축문화의 정체성, 타율성, 쇠퇴 등 식민사관에 충실한 분석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해방 후 건축계는 물량적인 전후 복구와 국제주의 건축의 수용에만 치중하여 70년대까지 한국건축사 연구는 완벽한 단절을 맛보게 된다. 해방 후 최초로 재개된 연구는 1968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신축공사와 관련하여 행해진 <한국건축양식조사보고서>였다. 고 정인국 선생의 주도 아래 행해진 이 보고서는 74년 <한국건축양식론>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연구 행위는 순수한 학문적인 목적이나 건축계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해 각 방면에서 “한국적”인 소재를 발굴하였고, “민족적”이라는 명분 아래 그 구체적인 재현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요구는 급기야 건축계에도 파급되어 60년대 유명했던 이른바 “전통논쟁”을 야기시켰다. 국회의사당 건립본부는 의사당 건축의 “왜색시비”를 피해나가기 위해 도대체 한국건축은 어떤 것이었나를 알기 위해 조사 용역을 의뢰하였고, 그 결과가 앞서 언급한 보고서였다.
최초의 연구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일본인에 의해 행해졌음은 역사적 한계로 수긍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긴 단절기 끝에 재개된 진정한 연구의 시작이 국수주의적 정치 목적에 봉사한 사실은 건축계가 생각하던 “전통”과 “한국성”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던 사건이었다. 과거의 형태를 적당히 모방 복원하는 것이 전통의 계승이었고, 한국건축사 연구는 학문으로 포장된 도구였을 뿐이다. 그 전말을 더욱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4,50년대의 정치는 근본적인 친미파들에 의해 행해져왔고, 사회의 모든 가치관은 미국지상주의로 경도되었다. 왜곡된 형태로나마 민족주체성을 고양하고 한국적인 문화를 부활시키려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6,70년대의 군사정권에 의해서였다. 물론 여기에는 정권의 정통성과 국민적 지지를 염두에둔 정치적인 목적이 바탕이 되었다. 건축계에는 모든 공공건축의 “한국화” “전통계승”이 정치권으로부터 요구되었다. 또한 세계건축계는 30년대 부터 세계를 평정해 온 국제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강력히 대두했던 시기였다. 선진국에서는 팀텐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제3세계에서는 멕시코와 일본을 선두로 한 “민족적 리얼리즘”이 시도되었다. 내부의 정치적 요구와 외부의 문화적 변화에 직면한 당시의 국내건축계는 그 돌파구를 “전통의 현대건축화”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어떠한 깊이있는 철학이나 이론이 바탕이 된 것은 아니었고, 단지 국민 정서에 부합하리라는 감각과 정권에의 순응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최초의 시비는 1966년 옛 국립중앙박물관 (현 민속박물관, 철거예정) 현상설계를 둘러 싸고 벌어졌다. 당시 현상공모 요강에는 “기존의 전통건축의 모사로서 가능한 표현”을 명시하였고, 창작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는 기성건축계의 여론은 “현대건축 가운데 밀양 영남루만큼 아름다운 건축이 있느냐?”는 문공부 측의 고압적 답변으로 잠재워졌다. 결국 강봉진이라는 용감한 건축가에 의해 불국사 기단 위에 법주사 팔상전 – 화엄사 각황전 – 금산사 미륵전의 세 건물이 조합되는 기상천외한 실현을 보았다. 전통은 오로지 형태였으며, 공간적 구성이나 전체적 장소성은 개입의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이는 건축계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문제는 1967년 벌어진 부여박물관에 얽힌 왜색시비였다.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된 후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릴 정도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사건은 작가 김수근의 로칼리즘을 건축계 일각에서는 “왜적의 신사가 재현된 인상”이라고 공격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아마 이때만큼 건축적 이슈가 사회화되었던 경우도, 건축가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인지된 적도 없을 것이다. 60년대 두 건의 사건은 건축계에 “전통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던졌고, 이후 공공건축 설계에는 빠짐없이 “전통적 형태를 계승할 것” 혹은 “한국적 조형을 추구할 것” 등의 요강이 삽입되었다.
70년대의 기념비적 건축은 거의 대부분 이른바 한국적 조형을 구현한 것들이다. 국립경주박물관 (75)을 필두로 공주박물관, 80년대의 진주와 청주박물관들이 전통 구현의 여러가지 방법들을 구사하였고, 반복되는 열주와 삐로띠, 길게 내민 처마를 구현한 이희태의 국립극장 조형 (72)는 세종문화회관 (74)에서 그 극치를 이루었다. 이후 부산과 울산 진주 인천 강릉 등 지방 도시 곳곳에 세워진, 또는 세워지고 있는 문화회관류의 전형이 완성된 것이다. 경주의 보문단지와 성남 정신문화연구원 (78)은 더욱 복고적인 형태로 콘크리트 몸체 위에 한식기와를 씌운 절충적 조형을 선보였다. 이미 전통적 형태란 기득권 건축가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수단이었고, 그 외의 건축가들에게는 모방의 대상이던가 아니면 철저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더 이상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소모적 질문에 대답을 구하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절충적 양식으로서 천연스럽게 써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꺼져가는 전통논쟁에 다시 한번 불을 지핀 것은 독립기념관 현상설계 (83)를 통해서이다. 당선작가인 김기웅은 독립기념관에서 보여준 모더니즘 건축과 전통적 형태의 결합을 이미 전주시청에서 실험한 바 있었고, 그의 이론적 바탕은 역사적 모티브를 인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였다. 특히 80년대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국제 행사를 치루었고, 체육 뿐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이 국제적 조명을 받은 시기였다. 이때 한국의 작가들은 세계적 보편성으로 승부를 건 것이 아니라, 한국적 예술과 한국적 정신으로 세계 무대에 선을 보였다. 잠실의 주경기장은 조선백자의 선을 따랐다고 해야 먹혀들어 갔으며, 김중업의 유작인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85)은 한국적 조형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때 가장 유행했던 명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였고, 아직까지도 이 명제는 옳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련의 한국적 조형을 추구해 온 결과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관 주도로 시행해온 소위 문화재 복원건축이었다. 67년 드디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복원이 결정되었고, 그 설계 과정에서 영구성을 이유로 들어 콘크리트 구조로 할 것을 확정하였다. 구조만 콘크리트로 한 것이 아니라, 기둥머리 포작 서까래 부연 등 디테일한 목조 부재들까지도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로 조성하여 결구하였고, 그 위에 단청까지 칠하였다. 결국 “콘크리트 한옥”이라는 20세기의 발명품이 실험된 것이다. 이 형식의 위력은 대단하여서 아산 현충사, 한산도 제승당, 강화도 전적지, 경주 보문단지 등에 재생산되었고, 당시 집권자가 선호했던 계란색 단청까지 덧칠해져 전국 유적지 건축을 석권하였다. 민간의 설계도 이에 호응하듯 광주박물관 (77)과 용인의 호암미술관, 이촌동 순교기념성당 등이 꽤 이름이 있던 건축가들에 의해 콘크리트 한옥으로 계획되었다. 이제 전통 계승이란 과거 목조건축의 껍데기를 재현하는 매우 저급한 단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퇴행적인 과정 속에서도 한국성에 대한 진지한 추구가 있었다. 그 한줄기 빛은 바로 왜색건축의 장본인인 고 김수근과 그 동지들에 의해 추구되었다. 부여박물관 시비로 대단한 충격을 받은 김수근은 이후 줄곧 한국성 탐구에 몰두하였고, 각 분야의 전통 계승자들을 후원하였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공간지는 줄곧 한국문화에 대한 진지한 내용들을 발굴하여서, 곱사춤의 공옥진이나 각 지방의 탈춤은 물론 멀리는 백남준까지 재조명하여 소개하였고, 이른바 70년대 국학부흥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김수근 자신은 최순우 박물관장과 철학자 소홍렬과의 지적 교류를 통하여 자신의 건축이론을 구축하여 드디어 공간사옥이라는 가장 한국적인 공간을 완성하였다. 71년 범태평양 건축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어 행한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건축이론을 네가티비즘으로 설파하였고, 모태공간 자갈리즘 등의 공간적 개념을 구축하였다. 이 시기에 시도한 전돌건축은 70년대 한국건축의 주류로서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진지한 탐구는 요절로 완성을 보지 못했으며, 이후 한국의 유능한 건축가들에게 “전통”이란 커다란 굴레로 씌워져 애써 외면하려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3. 건축의 수명 ; 중건의 지속성과 새로움
(건축과 환경 93.12., 한국성을 다시 생각한다)
다소 비판적으로 고찰해 본 현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발의 파괴성과 도구적 역사관의 폐해이다. 50년 역사로 이루어진 건축과 도시는 이미 청산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무너져 버린 삼풍백화점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사라져버린 한국 최초의 아파트단지 마포아파트, 수많은 시영아파트, 재건축의 미명 아래 사라질 운명의 반포 잠실 아파트들의 수명은 고작 20년이었다. 영구적인 건축을 위해 콘크리트조를 채택했다는 복원 광화문은 30살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철거될 예정이다. 국내의 현대 건축물 가운데 영원히 보존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서울 시내의 어느 장소를 영원한 도시적 장소로 보존할 수 있을까. 우리의 도시는 얼마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가.
동양 목조문화권의 건축의 수명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목조건축이란 언제든지 쓰러지고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이었고, 인간의 창조물이란 대자연에 대해 매우 하찮은 것이라는 무상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건 (重建)의 개념이 생겼다. 경주의 불국사는 1,200년의 역사를 갖지만, 그 목조건축은 불과 300년 전 중건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0년간의 시간적 갭이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 역사적 맥락을 계승하면서도 결코 옛것으로 돌아가지 않는 새로움, 시간의 적층 위에 쌓여가는 새로운 시간들. 중건의 개념 아래서는 건설은 과거의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를 더욱 새롭게하고 풍요롭게 하고 유용하게 하는 개발 만이 있을 뿐이다. 도시환경 파괴의 주범이 바로 개발과 건설이었다는 아이러니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도시 중건의 개념은 유효할 것이다. 중건의 개념이 혼란스럽다면 차라리 재구축 (reconstruction)이라고 해도 좋다. 서울시내 대다수의 현대건축은 해체 (deconstruction)의 대상이 아니라 재구축의 대상이다. 해체할 만큼 질적을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는 평가이기도 하다. 중건이 되었든 재구축이 되었든 21세기의 도시와 건축은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또 다시 시행착오를 되풀이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배우기에 충분한 희생을 치루었기 때문이다. 실현해야 할 중건의 건축을 위하여 건축역사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결코 얄팍한 도구로 활용되어서는 않된다. 건축역사란 치열한 자기 성찰과 수련의 지적인 과정이 되어야 한다.
( 이 글은 전통논의와 역사적 인식에 관한 해방 50년 건축사를 위해 쓰여졌다. 따라서 필자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월간 <건축과 환경> 1993년 12월호에 게재된 “한국성을 다시 생각한다”를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