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0.10.01.
출처
이상건축
분류
건축론

국내 건축지마다 새롭게 소개할 작품들이 없어서 아우성이다. 건축계의 실력이 갑자기 떨어져서가 아니라, 새로 완공되는 건물들이 없기 때문이다. IMF체제를 벗어났다는데 왜 이리 건축경기는 점점 어려워지는가? 금년 안에 설계사무소는 물론, 건설업체 마저도 절반이 폐업하리라는 우울한 전망이 횡횡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금년 상반기 건축허가면적은 1999년과 비교하여 150% 신장되었으며, IMF 전인 1997년 수준에 70% 선까지 회복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단순한 통계보다는 더욱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위기라는 점이다. 1993년 전국 건축사 수는 5,308명이었으나, 1999년에는 12,398명으로 2배가 훨씬 넘었다. 건축 물량은 그대로거나 줄어드는데, 건축사 수는 배가 되었으니, 건축사 1인당 수주량은 급격히 감소할 수밖에 없다. 93년 년간 1인당 평균 허가면적은 6,700여평이었으나 99년은 1,900평으로 28%로 감소했다. 해마다 건축사는 등비수열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건설 물량은 기껏해야 등차수열적으로 확대될 것이 확실하니, 앞으로 물량적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체감 위기보다 훨씬 심각한 구조적 위기이다.
금년 7월, 본격적인 의약분업에서 비롯된 의사집단의 조직적 반발은 일반 국민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히며 정권적 차원의 부담이 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명분도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 근저에는 의사라는 특권적 전문직의 위상이 급속하게 격하되고 있다는 구조적 위기감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들의 수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수입은 급격히 감소하고, 사회적 존경은 커녕 이기주의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원가에 못미치는 의료수가, 약가마진의 박탈 등 경제적 악재들만 강요당하니 반발할 수밖에 없다. 건축계의 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적 위기이다.
변호사들 역시 마찬가지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한마디로 변호사 수가 너무 늘어서, 그들이 이전에 누렸던, 또는 기대했던 수입과 대우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앞으로 로스쿨제도가 도입되면 더욱 어려워지리라는 전망이다. 현대사회의 대표적 전문직이었던 의사, 변호사, 그리고 건축사들의 구조적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고수입과 사회적 특권을 누려왔던 지난 50년간 의사와 변호사라는 전문직은 어떤 사회적 공헌을 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건축 전문직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들에게 어떤 문화적 환경적 공헌을 했는지, 한국 건축의 위상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는지, 하다 못해 의사만큼 전문직으로서 사회적 인지도를 쌓았는지. 건축사들이 파업을 한다면 의사들의 파업만큼 효과가 있을까?
아무리 건축경기를 부양한다고 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다. 현재의 위기는 단순한 불경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날 수 없는 구조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건축사 수를 줄이고 과거의 특권을 회복할 수도 없다. 이미 전문직의 확대는 시대적 세계적 추세일 뿐 아니라, 소수의 특권은 건축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보다는 고급 승용차와 골프 문화만을 조장해왔을 뿐이다. 상황을 탓하기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문직의 특권이 보호받았던 20세기적 구조가 자유경쟁, 시민 감시의 새로운 구조로 바뀌고 있다. 이 와중에서 설계가 덤핑등 가격 경쟁은 건축계 모두의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바뀐 구조에 적응하려면 전문직의 패러다임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경쟁은 건축적 실력과 질적 완성도로 승부가 가려져야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최고의 건축가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한국건축계의 문제는 주도적 건축가의 부재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수한 기술력과 보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중간층의 취약함에 있다. 건축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확대시켜야 할 것이다.
20세기적 설계 행태와 작업 영역도 근본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주문생산식 설계작업, 협의의 건축 환경 창조라는 폐쇄적 벽을 허물어야 한다. 건축 설계 뿐 아니라, 도시, 조경, 실내, 환경 디자인, 심지어는 환경 미술까지도 건축가의 영역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들 영역은 산업사회 전에는 원래 하나의 영역이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시설 투자에 대한 시장 조사와 기획 업무, 마스터 플랜 등 사회경제적 디자인 부분까지, 또한 사이버 스페이스나 웹 디자인까지, 디자인과 서비스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국내 시장은 이제 한계에 왔다. 물론 남북통일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자칫하면 북한의 난개발을 초래할 수 있는 만큼, 통일 이후의 기회는 아끼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무대는 세계다. 시장 개방이나 교육의 국제기준화 등은 위기라기 보다는 기회이다. 안으로 내실있는 교육과 실력 양성을 통해, 밖으로 진출하여 세계 시장의 건축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유럽과 미국 뿐 아니다. 정서적으로, 현실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아시아 시장, 불모지에 가까운 아프리카 등 시장은 널려있다.
실력 양성, 건축 영역의 확대, 세계건축계의 진출. 거칠긴 하지만 일단의 해답은 될 것이다. 그러나 실현되리라는 기대는 어렵다. IMF 체제를 맞이하던 해, 많은 건축인들이 공언했다. 이제 일도 없는데 공부도 하고 생각을 정비해야겠다고.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무엇을 이루었는가? 실천의 의지와 노력이 없으면 해답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