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부산에서 건축사 한 분이 찾아오시겠다고 전갈이 왔다. 당시의 관행으로 건축사가 대학교수를 찾는다면, 건축심의를 부탁하든가, 아니면 현상설계 심사위원에 위촉됨을 미리 알고 인사차 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기에 심사위원을 사양하던 참이었고 심의위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무슨 일일까?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
그 분이 바로 이용흠 당시 일신건축설계 대표였는데, 만나기 전 선배 교수들께 어떤 분인지 알아봤다. 부산에서는 드물게 큰 설계조직의 대표이고, 맹렬하게 성장하는 사무소라는 정도의 사전 정보를 얻었다. 지방 건축계에서 큰 프로젝트란 주로 공공 부문에서 발주하는 시청이나 문화회관 등이었는데, 대개 서울의 전문(?) 사무소들이 독식하던 시대였다. 지방 사무소들은 자잘한 일반 건축설계로 유지하던 때였는데, 일신건축은 당당히 서울의 프로페셔널들과 겨루어 울산문화회관이나 금정구청사 등 큰 프로젝트들을 수주하는 대단한 존재였다.
막상 만나게 된 이용흠 대표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들을 나누었다. 부산의 건축문화가 일천함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고, 건축에는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데 당시 한국의 건축계는 그 이상들을 망각하고 있다고 한탄하셨다. 여기까지는 뜻있는 건축가의 이유 있는 푸념이라 동감할 수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제안한 말은 전혀 동감하기 어려웠다. 바로 그러기에 건축 잡지를 만들어 지역의 건축문화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 한국의 건축문화를 일신하겠다는 포부였다.
첫 느낌은 치기어린 만용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편집에 관여하고 있었던 ‘공간’지나 ‘건축과 환경’지의 사례에서도 보았지만, 경영상으로 건축 잡지란 수익성은커녕 끝없는 투자만 요구되는 밑 빠진 독이었고, 내용적으로 충실한 잡지를 만들자면 온 나라의 건축지성을 총동원해도 모자랄 국가적 차원인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일개 설계사무소가, 그것도 지역의 개인이 건축 잡지를 꿈꾸다니! 그래도 예의상 어려움을 설명 드리고 부산에도 훌륭한 교수들이 계시니 그 분들과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도움도 드렸다.
그러나 그 포부는 치기도 아니었고, 허풍은 더욱 아니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은 1992년 9월, ‘이상건축’이라는 희대의 건축 잡지를 당당히 창간했고, 2005년까지 13년간 꾸준히 발간하여 부산은 물론 전국의 건축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경성대학교의 강혁 교수가 편집주간으로 방향을 잘 잡았고, 조용수 이종건 교수 등 부산의 건축지성들이 참여하여 전국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여러분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발행인 이용흠 회장의 과감한 투자와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이상건축’이란 일신건축의 ‘이상’이며 이회장의 ‘이상’이었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이 회장님과 강혁 주간은 또 다른 제안을 하셨다. 어떤 내용이라도 좋으니, 내 이름으로 장기 연재를 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 회장님은 경주의 어떤 호텔 레스토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며 “김봉렬의 이상을 이상건축을 통해 펼쳐보라”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생각지도 못한 것까지 약속하셨다. 그리하여 시작한 연재가 ‘한국건축의 재발견’이라는 시리즈 이름 아래, 1995년 11월호부터 1997년 12월호까지 만 2년이 넘는 대 연재가 이루어졌다.
이는 단순한 연재가 아니었다. 당시 학계에는 한국건축에 대한 조사가 미진하여 매월 내용은 자료 발굴과 현장 조사를 하고, 도면도 그리고 새로운 자료를 축적한 후에 집필하는 큰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매달 이틀 내지 사흘의 답사여행을 실시했는데 울산대 제자들 4명과 이상건축 편집진과 사진작가까지 참여하는 대장정이었다. 답사에 필요한 비용은 물론, 후속 연구에 필요한 작업비까지 모두 이상건축 측에서 연구비 형식으로 부담했다. 물론 이 회장님의 용단에 따른 일이었고, 건축계에서는 흔치 않은 적극적인 학술 후원이었다.
다행히도 당시 연재는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고, 이상건축의 유료 독자층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니 이 회장님께 진 빚을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었다. 연재 도중에 필자는 지금의 학교로 이직하여 서울로 옮겼고, 연재 내용은 단행본으로 묶어 <한국건축의 재발견 1, 2, 3>을 출간하게 되었다. 물론 단행본 작업 역시 이상건축에서 담당했고, 이상건축의 편집진이 수고하셨다. 단행본 출간 역시 이회장님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바 컸고, 국내 건축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연재와 출간은 소장학자였던 필자를 일약 유명 인사로, 전국적인 강의 요청을 받는 건축계 명사로 만들었으니, 이상건축과 이 회장께 더욱 큰 빚을 진 셈이다.
이상건축은 1999년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여 명실상부한 전국지의 위상에 도전했고, 사업 영역도 확장했다. 서울 이전과 더불어 2대 편집주간으로 나를 임명하여 3년간 이상건축의 편집과 사업에 참여할 영광도 얻었다. 그러나 전임 강혁 교수와 이회장님에 키워 놓은 이상건축의 성공을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상당한 재정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건축의 경영은 적자가 누적되었고, 2005년 결국 폐간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경영 악화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필자의 무능도 그 원인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하니 이 회장님과 일신건축에 평생 갚지 못할 빚을 또 지고 말았다.
이상건축을 통해 만난 이용흠 회장은 내 젊은 날의 영광을 만들어준 큰 은인이었고, 학문적으로 큰 성장을 시켜준 최고의 후원자였다. 또한 이상건축의 발행을 통해 이 회장은 성공한 건축가로서 뿐 아니라, 건축계의 메디치로서 고귀한 역할을 한 것이다. 비단 나와 이상건축에 대한 후원 뿐 아니라, 다른 젊은 학자들과 건축가들에 대한 크고 작은 후원도 마다 않으신, 아마도 국내 건축계에서는 최대의 후원자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 후원의 목표는 본인과 일신건축에는 하등 도움 될 것이 없는, 오로지 후원을 통해 젊은 인재세대를 키우고 건축문화를 진흥하려는 순수한 이상뿐이었다.
일신건축의 창립 40주년을 축하합니다. 건축가와 일신건축의 설립자, 지역건축의 진흥자, 이상건축의 발행인, 그리고 건축계의 위대한 후원자 이용흠 회장께 건축계를 대신하여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일신건축의 국제적 발전과 더불어 이 회장님의 건강과 더 큰 기여를 기대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 봉 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