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박 교수를 처음 만난 곳은 아직 늦겨울의 냉기가 가시지 않은 한 학술발표장이었다. 그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그 학술발표회는 한국건축역사학회가 주관하는 행사였고, 건축계 연구자들의 모임이어서 대개 이름과 얼굴을 알만한 분들이었다. 그는 자청해서 논문까지 발표했는데, 주제는 듣도 보도 못한 ‘목재 연륜 연대추정 방법론’이었다.
단연 그날 화제의 주인공은 이 낯선 연구자와 그의 생소한 논문이었다. 그가 소개한 방법론의 요지는 이렇다. 나무는 주변 환경에 따라 자라는 형태가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 지역의 미세 기후는 결정적 영향을 미쳐 나이테에 기록이 되고, 그 패턴을 정밀하게 분석하면 그 지역의 몇백 년에 걸친 기온변화를 알 수 있다. 전국 주요 숲의 나이테 데이터를 축적하고, 오래된 건물에 사용된 목재의 나이테 샘플을 비교해보면, 그 목재가 언제 어느 곳에서 벌채한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첫 논문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신무문은 문헌에 1865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분석에 따르면 1870~1871년 사이에 벌목한 것이라 했다. 벌목 장소까지 추정했다. 설악산 한계령 서쪽 지역의 소나무였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매우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었다. 기껏해야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정도의 해석만 가능했던 건축학자와 문화재관계자들은 그 정밀함과 정교함에 감탄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박 교수의 활약은 눈부셨다. 전국의 문화재 발굴현장에 쫓아가서 시료를 채취하여 분석하고 연대를 밝히기 60여 회, 꼬박꼬박 논문을 써서 학계에 발표했다. 그의 정확한 판단에 의존해 문화재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드디어 5년 전에는 그동안 축적한 600여개의 시료들을 기반으로 ‘목재 연륜 소재은행’까지 설립하여 사회적 기여를 해왔다. 실천적 과학자의 모범이었다.
국가적 큰 아픔이었던 숭례문 화재사건은 박 교수에게 절망뿐인 비극이 되었다. 5년간의 복원작업을 마치자마자 부실 공사 논란이 일었고, 사회적 이슈가 되더니 전면 재조사에 이르렀다. 단청 박리현상에서 시작된 비판은 급기야 강원도 준경묘에서 벌목 지급한 자재가 아닌, 러시아산 목재로 바꿔치기했다는 의혹으로 발전했다. 이미 가공하여 단청까지 한 목재의 원산지를 밝히는 어려운 작업은 당연히 박 교수 몫이었다. 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충북대의 연구실에서 여러 달 분석에 매진한 끝에, 19개 시료 중에 “준경묘 채취가 아님이 유력한 것으로 2개, 5개는 판단 불가가 되겠습니다.”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리고 이틀 후, 연구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극히 과학자다운 신중한 발언은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박 교수의 죽음을 두고 무성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 이해 당사자나 당국의 압력 때문이라는 동정론부터, 심지어 타살이라는 음모론까지.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왜 극단의 선택을 했는지 조사하면 밝힐 수 있다. 마치 목재의 나이테가 생장과 벌목의 비밀을 기록하듯이, 박 교수 주변의 단서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기록했을 테니까. 누가, 무엇이, 그의 마지막을 그토록 힘들게 했는지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런들 그의 죽음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무를 일단 벌목하면 나무의 효용은 절반 이하로 줄고 만다. 목재나 땔감으로 쓸 뿐, 더 이상 광합성을 통해 신선한 공기를 공급할 수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자신의 분야에 충실했던 한 연구자의 학문적 열정을, 이제 막 궤도에 오른 풍성한 연구 결과를 더 이상 되살릴 수 없다. 무엇보다 그 순수한 학자적 양심을 포용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편협함은 숭례문 화재 이상의 치부로 기록될 것이다.